<마지막 소원>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마지막 소원이 한줄기 있습니다.

가장 큰 줄기 하나
고통 없이 죽고 싶습니다.
평소처럼 밥 잘 먹고
똥 잘 누고
제 할 일 다 하고
다음날 아침
잠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나의 부음 들은 이들이
어제 아침 출근길에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어제 점심시간에
함께 커피를 마셨노라고
어제 저녁에
술잔 높이 들어 그의 잔에
짠짠!을 하였노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도리질하게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에게
병수발이란 엄청난 고통
절대로 주지 않고
이 세상을 사는 그날까지
건강한 육신으로
말짱한 정신으로
어느 곳에서나
쓸모 있게 살다 가고 싶습니다.

내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이
아까운 사람 세상 떴다고
피붙이처럼 서러워하고 아쉬워하며
애통절통이 뼈에 사무쳐
장미꽃보다 더 붉은 통곡이
사흘 내내 식장에 들끓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다보고
후회하게 하고 싶습니다.

염습할 때 나의 모습은
예쁜 꿈꾸고 있는 것처럼
웃을 듯 말 듯 평온하여
흔들면 눈 번쩍 뜰 것 같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살아생전 예쁜일 많이 하더니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갔다고
굳게 믿게 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으로 걸치는 복장은
내가 평소 가장 아끼고 좋아했던 옷에
즐겨 쓰던 예쁜 꽃 달린 모자도 쓰고
즐겨 두르던 멋진 스카프도 목에 걸고
즐겨 신던 신발도 그냥 신고
예쁜 손수건도 주머니에 넣고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작고 예쁜 나무술잔
그것도 꼭 갖고 가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나의 육신은
뜨거운 불꽃으로 깨끗이 태워
한 줌 가루로 훨훨 흩뿌려 날려
가장 낮은 자세로
꽃뿌리 풀뿌리 나무뿌리를 향해 기어들게 하여
그들의 성장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무덤 하나 만들지 않았지만
나를 아는 모든 이들 가슴속에
티끌만한 씨앗으로 다시 태어나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뿌리 내리고 가지 뻗고 잎 너울거려
무럭무럭 자라 열매까지 달며
그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에게만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나 이제부터라도
바보 같단 소리 수없이 듣는다 해도
묵묵히 착한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족 하나하나에게 시시콜콜 부탁하는 식의 글을 썼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커 버린 어느 날부터 그런 콜콜한 부탁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이처럼 시의 형식을 빌어 유서를 써보았다. 매년 마지막 날에 유서를 다시 꺼내어 읽으며 글귀를 다듬고 다듬어 오늘의 이 유서가 완성되었다. 올해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이 유서를 꺼내어 보고 다듬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특별히 부탁해야할 정도의 일들은 살아생전에 생각나는 대로 행할 것이다. 주고 싶은 것도 미리 다 주고, 하고 싶은 말도 평소 밥상머리에서 농담처럼 진담처럼 다 해서 특별히 문서화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혹시나 착한 것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 때, 이 유서를 읽으며 마음을 바로 잡기도 한다. 이 유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쳐지고 고쳐져서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일한 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은 유서라기보다 내 마음의 다짐서가 될 것이다.)2005.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