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離婚)도 용기(勇氣)다.>


명절 연휴가 끝나 집안이 고요로 돌아왔다. 음식 장만에 부산스럽고 힘들긴 해도 명절엔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었는데 요번 명절엔 마음이 심란하여 즐거움보다 힘든 쪽으로 더 큰 비중이 갔다.

막내 동서가 지난달에 느닷없이 이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잘생긴 아들은 공부 잘해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미스코리아 같은 딸도 일류 대학에 보내었으며 게다가 남편의 사업체도 둘씩이나 있어 부(富)도 한 몸에 누리고 있어 겉보기엔 세상에 우리 막내동서처럼 팔자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나와 둘째가 늘 부러워했었는데 50이 넘어서 살그머니 이혼을 하다니…….

지금까지도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아 이혼의 구체적인 이유를 모른다. 깜짝 놀라 전화를 건 내게 그냥 전화상으로 ‘부부지간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이라고 일축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남이 되어버린 동서의 짤막한 대답에 내가 여지껏 자랑해왔던 3동서의 이야기들이 와르르 소리 내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맏동서로서 막내가 그리되기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뭇소리 않고 혼자서 일을 결행한 시동생 내외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합하여 야릇한 기분을 만들어 내었다.

명절 전날 모여 오후 세시까지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세시가 되면 명절 전야제 상을 차려놓고 삼동서가 짠짠 술잔을 부딪치던 것도 못하고 우울한 명절을 지냈다. 셋이서 할 땐 척척 돌아가던 일이 둘이서 하니까 서로 둥개고 왔다갔다 하다가 차례상 물리고 나니 준비해 놓고도 빠뜨린 음식이 있었다. 많은 사람 중에 오직 한 명 빠진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아버님께 세배를 드릴 때에도 부부 부부가 따로 하던 절을 막내 시동생 혼자서 절하는 것이 보기 싫어 다 함께 했고, 아이들에게 절을 받을 때에도 막내 시동생을 둘째와 함께 앉혀놓았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동생에게 뭐라 말을 붙이기도 어렵고, 우리끼리 모여앉아 깔깔 웃을 수도 없었다. 형제 하나가 우울한 것이 온 집안을 우울하게 하여 심란스런 명절을 보내었다.

동서의 이혼 사실을 처음 접하였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혼 사유가 될만한 이유를 모르기에 더욱 놀랐다. ‘부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라는 말 한마디로 일축하고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캐어물을 수도 없어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여자가 결혼 생활 하면서 이혼을 꿈꾸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나도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수없이 이혼을 꿈꾸었었다. 정작은 이혼할 용기가 없어 감히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을 핑계 삼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다말고 이혼해 버리는 여자들을 향하여 엄마 자격이 있네 없네 하며 열을 올리곤 했다.

명절 전 둘째 동서와의 전화 통화에서 둘째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난다.
“형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자식새끼도 눈에 보이지 않아요. 형제자매도 눈에 보이지 않아요. 오직 나 밖에 생각이 안나요. 저도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형님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럼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걸려서 큰일을 저지를 수 없는 나는 아직 극한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것일까?

명절 연휴 내내 나는 막내동서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훌쩍 떠나 커다란 빈자리를 남긴 동서가 한 편 야속하기도 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그 용기가 한편 부럽기도 하다. (2006. 1. 31)(: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