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평야를 나르는 쇠기러기떼)

아버지의 키는 162센티 밖에 되지 않았다.
어릴 때 지게를 많이 져서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소학교 다닐 때도 꼴 한 짐을 베다 놓아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내던지고 들로 나가 일을 하고
다음 날 풀지 않은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공부를 잘해  별명이 <글병정>이었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오로지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들어갔다.
6. 25가 터지자 학도병으로 군대에 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전역을 하려하자 모시던 장군이 만류하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군인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너는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으니  장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전역은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오로지 작은 키 때문에 장군감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옷을 벗었다. 
후에 아버지는 가지 않았던 그 길에 대한 미련이 무척이나 컸었다.

아버지의 꿈은 고향에서 교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오십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고향으로 금의 환향한 아버지는 찾아오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동네 유지들과 술독에 빠져 사셨다.
아버지의 모습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금의환향한 항우의 모습이었다.  
결국 항우는 전쟁에 패했지만
아버지는 위에 큰 구멍이 나 각혈을 하고 오랫동안 병원 시세를 져야했다.
아버지의 인생은 시골 학교 교장으로 끝나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퇴원해서 몸도 아직 추스리지 못하고 있을 때 큰 자리로 영전이 되었다. 
아무도,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후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아주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때 문교부장관이 고향 사람이라 윗사람이 알아서 영전시켜 준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관운도 꽤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꿈은 퇴임 후 어릴 때처럼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퇴임은 경기 과학고등학교에서 맞이 했다.
농사짓기 위해 낙향한 고향은 
아버지에게 <교육위원>이란 예기치 않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아버지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시골 촌부로 돌아가 농사를 짓던 시절이었다.
젊은 날에는 바빠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던 아버지와
농사지으며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자연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진리와 방식과 요령들을 가르쳐 주었다.

정작 아버지의 인생 대박은 말년에 터졌다.
소작인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땅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지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은 때로은 좋은 모습으로, 
때로는 좋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자식들 교육시키기도 빠듯한 박봉의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아버지는 그렇게 조금씩 땅을 장만해 귀향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신도시 발표가 나고 고향이 떠들썩했다.
아버지는 신도시 주변에 꽤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신화가 아버지에게도 대물림되었다.

작년 3월 아버지는 아버지가 그토록 소중이 여기는 흙 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주어진다.
그러나 누구나 다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기회를 잡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준비한 사람 뿐이다.
이미 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생애를 통하여 그것을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