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부자 집

 

“엄마! 오늘 언니 운동회 때 못 오는 거야? 점심에 밥 먹을 때도 못 와? 우리는 할머니랑 먹어야 해? 빨리 아기 낳고 학교로 와!!!!”

다섯째를 출산하려는 진통을 시작한 어머니를 향한 넷째 동생의 철없는 애원이었다.

언니를 맏이로 하여 나와 여동생 그리고 또 여동생 이렇게 두 살 터울로 내리 딸 넷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아버지가 맏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낳고 대를 이어야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들에게는 쓸데없는 수두룩한 딸들이라고 사촌 남동생들과 차별을 하며 대놓고 미워하셨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은 딸이면 어떠냐고, 딸이라도 잘 키우면 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이셨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셨는지 부모님은 남자동생을 보라는 의미로 넷째를 어려서부터 남장을 해서 키우셨다. 머리도 짧게 깎고, 남자 옷을 입고 남자로 불리던 동생이 기저귀를 뗀 어느 날 밖에서 소변을 보게 되었는데 동네 남자아이들로부터 ‘쟤 남자 아닌가봐! 앉아서 오줌을 누잖아.’ 하는 놀림을 받고 들어와서 자신의 정체감에 혼란을 느끼며 울던 일도 있었다.

 

이런 서러움에 대한 무거운 과제수행을 위해 어머니는 다섯째를 가지셨고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5월 8일 아침에 산기를 느끼며 병원에 가셨다.

그날은 마침 어머니날로, 우리학교에서는 어머니날을 기념하여 매 해 그 날 운동회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들 엄마가 싸온 도시락 보자기를 풀고 도란도란 밥을 먹는데 4학년인 언니, 2학년인 나는 친구엄마들의 함께 먹자는 권유도 마다하고 운동장 한 구석으로 갔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6살인 셋째 그리고 4살인 넷째를 데리고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에 오신 할머니 앞에 우리는 쭈그리고 앉았지만 모두 고개를 외로 꼬고 교문 쪽을 쳐다보며 선뜻 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산고 끝에 다섯째를 낳으셨는데 또 딸이라는 얘기에 막 우시며 미역국도 안 드신다고 했다. 아버지도 무척 섭섭해 하시며 별 얘기를 안 하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인 딸부자집이 되었다.

중학교 수학선생님인 아버지는 매우 꼼꼼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야한다는 지론을 가지신 탓에 무섭기도 했지만, 풍부한 감성을 가지셔서 매일 아침에 어린 우리들에게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생상의 백조---등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시고, 엄마를 도와 총채로 온 집안을 털고 쓸고 닦고 우리를 씻기고 먹이고 가르치고 하는 자상한 가장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너그러운 성격으로 생활력이 강하셨다. 나의 어린시절은 전쟁 후 베이비 붐(baby boom)의 영향으로 학령기 인구가 많아서 한 반에 70여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아침반 오후반, 심지어는 저녁 반으로 나뉘어 2부제, 3부제 수업을 받았다. 부모님은 그런 교육환경을 못 마땅해 하시며 우리를 모두 사립초등학교에 보내셨다.

 

아침이면 우리 집은 난리였다. 어머니는 둥그런 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우리들 뒤에 앉으셔서 돌아가며 빗으로 길게 기른 머리를 빗겨 고무줄로 묶어주시고, 도시락을 싸서 보자기에 싸 주시고, 우리가 학교에 간 뒤에는 기계로 털실 옷을 짜는 편물 기술을 배우러 다니신 끝에 집에 편물기계를 들여놓고 부업까지 하셨다. 여름이면 재봉틀을 돌려 포플린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시고 겨울이면 편물기계로 두툼한 코트를 만들어 입히셨다. 지방에 사는 관계로 우리 집에 와서 학교에 다니는 외가와 친가의 삼촌과 사촌들의 뒷바라지하시며 분주했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을 돌볼 틈은 없으셔서 어느 때는 며칠간 머리도 빗지 못해서 빗이 내려가지 않는 적도 있었다.

 

부모님은 우리 다섯 딸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게다가 특기를 발견하고 재능을 키워주는 일에까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우리들은 좁은 방에 한데 몰려서 생활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옷, 신발, 모든 것을 모두 함께 돌아가며 물려 입었지만 넉넉하고 풍요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우리를 지지해주시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자란 탓에 남성위주의 문화에 기죽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라도 남자처럼 할 수 있어.’, ’커서 부모님께 아들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 드릴거야.‘ 라는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삶에 어려움도 있었고 우환도 있었지만, 올해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78, 75세가 되셨고, 우리는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둘씩 낳고 어느덧 중년의 여성들이 되었다. 맏딸인 언니가 54세, 나와 셋째가 52, 50세, 남장을 했지만 결국 여동생을 본 넷째가 48세, 막내딸인 다섯째가 45세가 되었다. 언니는 50이 넘은 나이에 박사과정을 공부하더니 54세의 나이에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나도 교사로 29년째 근무하고 있고 동생들도 모두 교사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그 집 딸들은 모두 부지런하고 똑똑하다고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똑똑해서 기가 세지 않느냐, 남편들이 힘들지 않겠냐는 뼈 있는 농담도 건네지만, 우리 다섯 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 한다.

“일회적인 인생을 열정적으로 성실히 열심히 살아야지요. 나만 잘났다고 하는 것 아니고 남과 더불어 열심히 사는 것 멋지잖아요! 부모님 덕분이지요. 부모님도 저희들을 자랑스러워하세요!”

이번 구정에 멀리 나가 공부하고 있는 조카들까지 모처럼 가족이 모두 모이니 부모님까지 22명이었다.

다섯 딸들을 건강하게 행복하게 키워주시느라고 청춘을 다 바치고 가늘어진 팔다리에 세월의 무게만 남은 부모님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란히 서서 세배를 하는 우리를 보시며 아버지가 크게 외치셨다.

 

“우리 딸들 만세~ 우리 사위들, 손자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