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기르던 강아지를 잃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는 순호 선배님의 글을 대하면서 나에게도 1년전의
  강아지와 작별하던 감정과 첼시와의 추억이 몇일이 지났는대도 가슴속을 아련하게 추억속으로 이끈다.

  첼시와 우리 가족과의 인연은 17년 전 으로 되돌림 해서이다. 그 당시 우리는 처음 이민 와서 짐을 푼
  뢀리 노스켈롤라이나에서 10년 가까이 정을 들이고 살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정착해 살고 있던 뢀리는
  미국에서 그당시 세번째로 살기좋은 곳으로 선정 될 만큼 교육과 환경 경제 모든 면에서 정이 가는 도시였다.

  한국에서 이민 보따리 5개와 딸 셋을 데리고 한살인 딸은 등에 업고 다섯살이었던 쌍둥이 딸은 남편이 양손에
  잃어 버릴까 겁에 질린 모습으로 꼭 잡은채 비행기를 시카고에서 내린후 또한번 15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에
  실려 이리저리 대기권에서 흔들려 가며 내린 공항이 바로 뢀리 공항이었다. 그당시 뢀리 공항은 아주작은
  시골의 초라한 공항의 모습이었엇다. 하지만 지금은 유명 대학 주위로 리서치 트라이앵글 타운이 생기고
  여러 모로 엄청나게 발전을 했다.  

  우리 가족은 낮설고 물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딸랑 다섯명이 전혀 생소한 거대한 고목에 접붙임을 하여
  생살을 알으며 뿌리를 내리는 고통속에서도 대 식구가 늘 떠들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가느라 외로움은 전혀 느낄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이곳 생활에 정착이 되던 어느날 남편은 나에게 신학을 하겠다 천명하고 그의 말대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듀크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이사를 가야 할곳이 바로 사우스케롤라이나 라는 도시의 교회였다. 헌데 문제는 벌써 중학생이 되고 초등 학교를 다니고
  있던 딸들이 어데서 들었는지 환경이 안좋은 도시로는  자기들의 학업과 친구를 포기 못 한다고 눈물로 대모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정말 큰 바윗돌에 맨발로 부딪히는 아픔이었다. 

  우리부부는 몇일을 고민하다 머리속이 갑자기 백촉짜리 전구를 킨듯 환해지면서 궁여지책이 떠올랐다.
  아~~강아지~~드디어 나는 확신을 갖고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을 했다.

  몇년전부터 아이들이 강아지 기르자고 성화인 것을 나는 어렵게 지금까지 강하게 버티며 밀어 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해서 강아지 대신에 안 길러 본 것들이 없었다. 처음엔 금붕어 토끼 햄스터 새 등을 아이들 맘을 강아지로 부터 돌리기위해  사주었다.
  강아지는 사 주고 난후에 결국은 내가 긴 세월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해답을 알고 있기에 끝까지 버티고있었다.

  그당시 기르던 토끼는 초코라는 이름의 귀가 아주 작은 짙은 갈색의 희귀종 이었는데 강아지같이 우리들 앞에 와서 쓰다듬기를
  바라며 늘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곤 했다.

  햄스터는 번식력이 너무 왕성해서 문제였다.  한번은 남편이 햄스터 케이지 앞에서 신문을 바닥에 깔고 읽고 있는데
  펼처진 신문위로 핏덩어리 햄스터 새끼가 몇마리 날라와 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자지러지는 남편의 비명과 함께였다.
  어미 햄스터가 해산 과정에서 쉽게 낳을려고 케이지 지붕을 철봉대 삼아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흔들며 출산하던 중
  몇 마리의 새끼들이 케이지 밖으로 날라 떨어지는 사건이 돌발한 것이었다.

  그러한 여러가지의 요리조리 비켜가던 강아지의 불변의 신념을 할수없이 아이들의 맘을 돌리기 위해선 바꿀수 밖에 별다른
  해답은 찾아낼수가 없는 처지였다.  강아지라는 히든카드를 내놓는 앞에 아이들의 닫혀서 거세게 반발하던 모습은 할수없이
  받아 들인다는 태도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느날 막내는 아빠의 손을 잡고 신이나서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시골 동네로 향했다.
  그날저녁에 우리집에는 크림색의 파마레니언 새끼 강아지가 순종이라는 보증서를 지니고 한식구가 되었다.
  신문에는 150불이라고 난것을 50불을 깍고 데려왔다는 남편의 칭찬 받고 싶어하는 표정과 함께였다.  

  강아지의 이름은 아이들이 그당시 대통령의 딸 이름인 첼시라고 지어주었다.  너무 작은 사이즈라 가끔씩은 밟힐까
  겁이 날 만큼  아이들과 잘 놀았다.

  드디어 이사가는날 승용차속에 빈틈없이 타고 있는 다섯 식구와 새장속의 트윈키  초코 첼시 등의 모습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재현하는 정경이었다. 그래도 햄스터는 아이들의 동의를 받아내 이웃에 입양을 보내서 다행이었다.

  이사를 마치고 첫 예배를 백인 감리사님을 모시고 보는중 그분이 우리 가족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는데 놀랍게도 
  첼시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 기도 덕인지 첼시는 건강하게 우리가족에게 늘 웃음을 주었다.

  막내 딸은 첼시를 여러가지로 묘기도 가르쳤다.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면 그 소리 만큼만 짖고 앉어 하면 앉고
  굴러 하면 구르고 우리가족이 행복해 하면 첼시도 덩달아 부산스럽고 또 가족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면 첼시는 옆에서
  두 발로 일어서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핧아 주곤했다.  첼시는 하루하루를 우리 가족이 되어 17년이란 긴 세월을 
  알콩 달콩 함께 했다.

  첼시는 떠나던 날 까지도 우리집을 나서는 모습을 꿈에 나타나 보여 주고 떠났다.
  그애가 가는날 아침에는 강아지가  갑자기 두 발을 자꾸 헛 디뎌서 병원에 갔더니 안락사를 권유했다.
  남편과 문 밖으로 나와서 뻔한 결론을 못 내리고 둘이 붙잡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시간만 보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첼시야! 안녕 ! 너 땜에  우리 가족이 너무 행복했어~~잘~가~

  그애는 내 말을 알아 듣고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 기를 쓰면서 너무 애절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려고 계속 자빠지면서 애를 쓰는 거였다. 첼시의 그런 필사적인 행동은 제발 자기를 집으로 데리고 가라는
  절규인 것 같았다.  눈 뜨고는 차마 볼수없는 그녀의 최후의 행동으로 하는 의사 표시였다.

  의사의 권유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돌아와 울고 또 울고~~

  그날밤 꿈에 하얀 소복 입은 여인이 우리집 차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자꾸 뒤돌아 보는 꿈을 꾸었다. 
  아마도 첼시 였나보다 ~~~ 암놈이었던 첼시가 꿈에서도 여인으로~~~

  첼시가 떠나고 한달후에 첼시 병원에서 보내온 예쁜 카드에는 직원 모두가 싸인한 위로의 문장과 그후의 절차 과정이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첼시와 헤어질 당시의   나와 마주친 첼시의 눈물 그렁그렁한 눈빛은 인간의 말의 표현 보다도 더 강한 언어 표현을 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