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태자 오토 합스부르그의 죽음을 맞아
그를 추념하는 글입니다.
장엄미사곡:
미하엘 하이든의 레퀴엠을 성스테판 주교성당에서 국영방송국이 중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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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4일
푱!푱!...메세지 시그날이 울린다.
일하다 마침 쉬는 중이라 핸디폰을 펼쳐본다.
" Otto Habsburg ist tot sei nicht traurig..."
----- 오토 합스부르그가 죽었어, 슬퍼하지 말기를...----
가까운 친구의 전문이었다.
아! 떠났구나.. 누구나 그러듯이...
그러면서 저절로 Otto 어릴적모습의 그림이 떠올랐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붙여있는 그림으로서,
아버지 칼황제 대관식에 동행했다가 대관식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4살짜리 어린 황태자와
아직 마차안에 앉아있는 젊은 왕비 치타가 우아하게 보이는 것이다.
1916년12월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Gyula Eder( 1875~1945 헝가리태생)의 역작이다.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그러나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 과정은 여러형태이다.
1912년 11월 20일에 태어나 2011년 7월 4일에 죽었으니 99세를 바로 얼마앞둔 노장의 죽음에 슬픔보다는
비장함이 서려왔다.
내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현재 우리나라처럼 Republic 정치체제이다.
1918년까지는 합스부르그 왕가가 이웃 헝가리,슬로바키아,보헤미아,모라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지니아 헤르체고비나 등등 폴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 등 ..여러나라와
아드리아 남단 몬테네그로, 남부티롤 (현재 이탈리영)까지 이끌어가던 황제국이었다.
스페인의 혈통이 끊겼을때 스페인의 왕위계승을 했었으며
현재국토의 약 15 배정도 지역에 사는 5700만 민족을 지배했었다.
19세기중반에는 멕시코의 황제를 하였으며 당대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도 일컬었었다.
그러나 바로 오토의 아버지 마지막 황제 Karl이 1916년 등극하고
2년후인 1918년에 700년가까운 역사의 합스부르그 왕정이 무너진 것이다.
바로 그해, 인근나라들이 독립되는 유럽역사의 변환 정점인 해였다.
이곳에 와서 살면서 이나라와 유럽역사를 배워가며 느꼈던 모든 것들이
갑짜기 나를 업습해왔다
7월 11일
주말여행 다녀온후 집에서 쉬다가 무료하여 동네 산책을 나갔다
신문과 잡지를 사러 갔더니 신간지 Profil표지에
"Otto der Letzte" 라는 제목이 눈에 뜨인다.
얼른 사가지고 동네 카페에 들어가 읽어 나간다.
그동안 알아왔던 내용이 사진과 더불어 소개된 것이다.
쉔브룬에 가면 그의 아버지 마지막 황제 칼의 대리석 흉상을 보면서
항상 아직 살아있는 그를 떠올렸었다...그러니까 바로 일주일전까지...
- 이 황제의 아들이 1912년 태생으로 아직 살아있어요--- 설명하면
-어머? 아주 장수하네요..라고 .방문객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랬었다.
그러면 한술 더 떠 그옆에 전면 초상화 속의 마지막 왕비 치타를 가리키며
-이 왕비는 남편 황제가 1922년 죽은후 유복녀를 낳았는데,
8남매를 키우며 67년을 더살고 1989년 97세에 죽었지요... 부언을 해왔다.
이제는
이 마직막 황제의 아들 오토가 98세인 2011년 7월 4일에 세상을 떠났어요..라고 해야겠네...
오토가 90세되는 해 2002년
ORF국영방송에서 1시간 넘게 도큐영상을 보여 주었었다.
역사를 어깨에 짊어졌던지 구브러진 몸매로 지팡이를 집고
어린 아이들 그룹에게 설명하는 그의 지난 과거와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감명깊게 보았었다.
오스트리아가 계속 왕정국가라면,
분명히 황제가 되였을 노인이..
어린날 쉔브룬 궁에서 지냈던 일과
그의 나이 6살부터 시작된 황족의 스위스 망명생활과
35세 아버지가 망명지 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에서 폐렴으로 죽어간 것을 더듬는 모습이었다.
더불어 마지막황제가 죽은 곳을 보여주었다. 1922년 4월 당대 그는 불과 9살의 소년이었다.
20세기 초에 여러나라의 정국변화와 더불어
한 인물, 즉 황권을 잃은 황태자라는 신분속 삶의 변화를 가슴깊이 받아드렸다.
언제인가는 마지막 황제의 유해가 잠들고 있는
포루투갈의 마데이라섬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그후, 드디어 2008년에 그 곳에서 2주동안 구석 구석 찾아다니며 지내다 왔다.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된 섬으로서,
연중 꽃이 피는 아프리카 가까운 대서양 남단 끝의 섬..
영국 처칠수상도 휴가철마다 찾었던 곳이다.
그곳 체류기간중,
Otto의 아버지 칼황제를 비롯한 합스부르그왕가의 흥망성쇄를 깊이 생각하며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국제사회를 넓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기회를 가졌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어 한참을 카페에 있었다.
7월 14일
문자 메세지를 주었던 친구를 만났다.
- 오토때문에 아직도 슬퍼?
평소에 내가 자기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줄아는 터라 물론 놀리는 것이다.
-내일 모레 16일 장례식인데 갈꺼야? 나는 그날 ㅁㅁ에 가는데 같이 갈래?"친구가 묻는다
-장례식장에 초대도 안받았었는데.. 뭘,,그래도 그냥 집에서 TV중계볼래.. ㅁㅁ에는 다음에도 갈 수있으니까..
나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다.
-내 그럴줄 상상은 했지만 .. 너가 그리 왕정주의자인줄은 몰랐네 후후..
그러면서 자기대신 기록사진 많이 찍으란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곰곰히 생각한다.
오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친구에게 놀라움을 주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비애감은 무엇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합스부르그 역사는 12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 2011년이니 바로 오토의 죽음이 결정적으로 733년 왕가의 마지막을 고하는 것이다.
733년!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벌써 방송이 시작되고 있다.
기록영화라 전에도 보았던 것들이 보여진다.
마지막 치타왕비,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영국의 다이에너...등등"
참, 사람이 세상에 와서 저렇게 전세계를 울리는 가하면
소리 소식 없이 죽어가는 그많은 사람들,,,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 점심에
나의 상념은 한도 끝도 없이 전개된다.
점점 오후 세시가 되어가니
유명인사들이 속속히 도착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스웨덴국왕 부부,리히텐스타인 공국부부, 체코의 외무장관 스바르첸베르그,등등
어너운스 얘기로는 1000명이상의 국빈이 참례한단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오스트리아 대통령부부,수상, 전수상, 비엔나 시장 등등이
자리에 앉는 것이 보인다
스웨덴 국왕부처
리히텐스타인 공국의 제후 부처
오스트리아 대통령
오스트리아 전 수상, 현 EU의원
비엔나 시장
드디어 유족들이 차분히 들어온다
오토의 맞아들과 가족,
헝가리에사는 둘째아들가족 그리고 딸들가족.
오토의 유해가 있는 중앙제단 앞
추기경이자 비엔나 주교신부님이 등장하며 많은 성직자들이 줄줄히...
옛날 합스부르그 황제시대 종속국가의 의전대들이 의전기를 들고 등장하고...
과연, 현재가 과거의 황제시대처럼 재현되는 것이다.
주교님의 강론중에
오토의 업적과 더불어 " 신심이 강한 사람"였슴이 강조되었다.
맏아들이 나와서 성경귀절을 낭독하고
또 한번 어린 장손이 나와서 로마서를 낭독하고..
많은 절차를 밟고 2시간동안의 장례미사가 마쳤다.
운구가 바깥으로 나온다.
운구이동 경로가 보여진다.
성당을 떠나 그라벤을 통해 호프부르그 궁전을 빠져나와
링거리를 돌아 오페라뒷쪽으로 해서 카푸치너 왕정지하무덤에 안치된다고 한다.
아! 그럼 이제라도 가면 운구행렬을 볼수 있겠네..
갑짜기 맘이 급해진다.
이번이 733년 역사의 합스부르그 황가 마지막
카푸치너 왕정지하무덤에 안치되는 장례식인데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으면서 집에서 TV 만 본다는 것이
나중에 두고 두고 후회될 것만 같다.
(계속..).
옥인후배, 오스트리아도 한때 해가 지지않는 강국이었군요.
마지막 황제의 아들 이라니 우리 이조말기에 고종의 아들 영친왕, 이은이 생각남니다.
이글을 통해서 오스트리아의 간략하나마 역사를 알게됨을 감사드림니다.
김숙자 선배님,
오토를 생각하며
이 오스트리아 왕가의 기나긴 역사를 좁은 지면에 열거한다는 것은 무리라서
그냥 저의 상념의 조각을 써나갔어요.
일요일날 모았던 자료사진들을 편집하며 윗글을 쓰다보니 기운이 떨어져 중단했고요 ㅎ
계속 마무리 할께요^^
선배님께서 우리나라의 왕가를 말씀하시니 죄송한 맘이 드네요.
고국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타국의 얘기를 늘어놓는 듯해서요...
선배님께서 언급한 이은씨 후손을 1996년에 비엔나에서 만났었어요.
한국으로부터 비엔나에서 열리는 세계의 쓰리 테너(파바로티,도밍고,카레아스) 음악회를 직접 보러 오셨더라고요.
그전에 흔히 알고있던 조선왕조 후손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예상과 달리,
경제적 여유가 있어 5일간 오스트리아 국내여행을 음악테마식으로 하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었기도 ㅎㅎ
20여년을 고국을 떠나 살다보니
이곳에서 유명인사가 아니라도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을 대하다보면
저절로 친척이상으로 애도를 하게되어요.
한사람 한사람 그 누구나 개인의 여정이 모두 나름대로 깊은 삶이잖아요.
항상 관심 갖고 저의 장문^^을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Haydn- Emporor's Hymn, from String Quartet in C
이곡은 오스트리아 출신 요셉 하이든이 오스트리아 황제 Franz를 위해 작곡한 것이었다.
이번 장례미사중 스테반성당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 하였으며 참석자 모두 합창도 했었다.
또한 왕정무덤에 모였던 군중이 지하무덤으로 들어가는 운구의 마지막 절차에서 이곡을 합창을 했다.
관례적으로 국가 중요행사에 항상 연주되는 곡이다.
(본문 계속)
TV의 중계방송에서 운구가 성당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본후,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중심 순환도로 링거리까지 전차를 타고 나갔다.
길건너 중심가는 전혀 차량이 없다.
어쩔 수없이 걸어서 왕궁쪽으로 가는데
나처럼 뒤늦게 부지런히 운구행렬쪽으로 가는 무리들이 제법된다.
골목중앙에 황비 엘리자벳(일명 씨시)의 포스터를 보니
오토가 자택에서 인터뷰할때마다 바로 증조할머니 초상화 앞에서 모습보여주던 것이 떠 오른다.
계속 부지런히 걸어가며 국립도서관 뒤 요셉광장을 지난다.
오토의 몇대 선조 요셉황제의 동상이 오늘 따라 의미있게 닥아온다.
점점 행렬쪽으로 닥아가니 사람들도 많아진다.
오페라하우스 뒷쪽 모짜르트 카페앞에서 18시가 지난후에 의전일행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겹겹이라 도저히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알버티나 박물관 윗쪽으로 올라가니 아래에 지나가는 의전일행이 잘보인다.
여러 민속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껍게 입은 것이 안스럽다.
거히 행렬이 마쳐가는듯하여 알버티나를 내려와서 왕정지하무덤 쪽으로 향했다.
Kaisergruft에 도착하니 국영방송과 보도진들이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
베토벤의 9번교향곡의 합창을 군중이 따라서 부른다.
가슴이 먹먹해오며 역사의 한순간에 동참한 기분으로 감명받는다.
조총이 몇번터지고
운구가 들어간후 철문이 닫혔는데도 군중은 떠나지 않는다.
주교님과 성직자일행이 나온다.
주교님이 우리를 위해 손을 흔들어 준다
모든 예전이 잘 마친후의 안도의 웃음이 보인다.
성직자 일행이 멀어져 가며 모든행사가 마쳤는데,
한여인이 집요하게 카메라를 왕정무덤을 향한 모습에서
두달전 바로 이 분수가 보이는 호텔에 묵으셨던 사진작가 선배님얼굴이 떠오른다.
군중제지하던 칸막이가 제거되기 시작하자
모두들 왕궁무덤있는 성당으로 몰려간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무덤은
후일 조용한 때에 오리라 맘을 잡으며 그곳을 떠나왔다.
스테판 성당 광장쪽으로 가니,
불과 몇시간전의 흔적은 어느덧 사라져 가면서
거리곳곳에 낮동안 동결되었던 관광객의 물결이 넘쳐 흐른다.
의전예식에 참가했던 이들도 의전격식을 풀고 노천카페에서 쉬고 있다.
광장에는 묘기를 보여주는 이 앞에 어린이들이 모여있다.
Otto Habsburg
그가 어디선가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듯싶다.
옥인 후배님,
그렇지 않아도 지난 주 Times에서 간략히 사망 소식을 읽었는데
이처럼 자세히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덕택에 세계1차 대전 전후의 세계 변화를 인터넷으로 찾아볼 기회도 가졌고요.
또 이처럼 옥인 후배의 글을 다시금 접할 수 있어서 반가왔어요.
계속 좋은 글과 음악 올려주세요.
제가 옥인 후배님 팬이랍니다.
함정례 선배님 안녕하세요
제가 본문을 쓴다음 20일부터 집떠나서 지냈어요.
오스트리아 중부지역 Graz 라는 도시에서 21일에는 음악회를 보았고
그날 전후 며칠을 몇곳을 돌아보고 오늘 귀가했어요.
그라쯔의 중앙광장에 설치된 돔성당 박물관의 전람회 포스터에
"유럽의 성인들"이라는 제목아래 문화와 정치라는 소제목이 적혀있더군요.
그리고 그아래에 OTTO의 아버지 마지막 황제 KARL의 모습이 있었고요.
이분은 2004년부터 로마 바티칸에서 준성인으로 선포한 분이에요.
이분의 가톨릭에서의 업적은 설명이 길어 이곳에 옮기지 못하지만
아들 OTTO의 장례식을 며칠전 실제로 본후라, 이 포스터를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었어요.
세계1차대전에 대해 참조로 말씀드리자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훼르디난도 부부 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고요.
그후 암살당한 황태자의 조카아들 KARL이 대를 이어갔었지만 결국은 1918년에 왕정이 무너졌지요.
이 칼황제는
세계1차대전중 로마 교황님이 세계 곳곳의 위정자들에게
휴전을 권고하는 서신을 보냈었는데,
유일하게 회답신을 보낸 위정자이었답니다.
" 하늘의 뜻을 권고하시는 교황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너무 길어지면 지루 하실까봐 오늘은 여기서 줄일께요.
건강하세요 선배님.
그런 배경은 몰랐어요.
그런데도 ...
1차 세계대전은 당시 국제 정치상 윌슨의 자주 정신과 맞물려...
어쩔 수 없는 국제 싸움이 되었군요.
자세히 아시는 내용 전해 주세요.
저도 모레 남아공의 더반에서 있을 국제 모임에
2주간 일하러 갑니다. 대표로 가는 건 아니고요.
온 종일 일하느라 혼좀 날 거 같은데...
그래도 짬이 생기면 아직 교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몇가지는 들고 갈 참입니다.
이럴 땐 이메일이 참 편리하네요.
그리고 모든 일정 끝나고 딱 하루 더 있다 떠나요.
하루만이라도 관광을 하려구요.
요한네스버그랑 희망봉은 전에 다녀온 적이 있어서 생소한 나라라는 느낌은 없네요.
함정례 선배님
내일 남아공으로 떠나시겠네요.그곳은 더웁겠지요?
모든 행사 무사히 하시면서 짬짬히 즐기시기를 바랄께요.
다소 지루한 아래 정치적 얘기를 슈베르트의 "로자문데"를 들으시면서 읽으세요 ^^
세계1차대전과 관계된
오스트리아 역사는 바로 유럽의 역사를 거슬려 올라가야 하는 방대한 자료지만,
이런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의 전개, 중개, 종료가 되었다고 요약할 수있지요.
즉, 합스부르그왕가의 영향이 유럽대륙의 프랑스를 제외하고 거대한것을 능가 하려고 했던 독일이
마침 1914년 황태자 암살 사건때 오스트리아의 요청으로 속국 보즈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압에 개입되었었지요.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바로 종식을 원했으나 독일이 이 기회를 전개하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 영국, 러시아등등으로 전개되었지요.
바로 이런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종속국가들이 자주독립을 원하면서
유럽의 대강국의 도움보다 미국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피상적인 요약이고요...
그뒤의 정치적 배경의 골은 깊어요.
강대국 사이에서 아직도 기를 못피는 나라가 Bosnia- Herzegovina이지요.
원래 두나라가 단독국가 였었는데 20세기초 지배국 오스트리아가 강압으로 합병시킨것에 불만으로
그당시 보스니아 레지탕스 소속 젊은이들이 있었어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발칸 반도에서 제일 힘이 컸던 세르비아가 B-H가 합쳐지자 견제심이 강해졌어요.
이런 상황을 눈치챈 러시아가 그 이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이 큰 것을 경계하던차에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를 뒤에서 후원하고...
세르비아측에서는 보스니아 레지탕스를 후원하고...
이러면서 드디어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 터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정치적혼란을 수습하는 상황으로
독일군의 원조를 부탁 하게 되었고요.
그다음은 위에 언급한데로 전개되어 1차대전으로 이어졌어요.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했던 라틴다리건너 박물관이 사라예보에 있어요.
역사의 현장이지요.
사진설명:
1. 다리 건너 Museum 표시가 있는 모퉁이로 황태자부부 차가 들어가는 것을 레지탕스가 암살했어요.
2. 이 강이 흘러 흘러 저멀리 아드리아 남단 드브로브닉까지 흐릅니다.
3.박물관 모퉁이 길을 계속해서 들어가면 차가 안다니는 길에 상가들이 있어요.
4.민속품을 파는 옛거리에요
5. 식수의 원천이었던 광장이에요
6.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기전 오스만 터어키가 지배하던 때 부터 내려오던 모슬렘 성소 뾰족탑이 곳곳에 보입니다.
이제는 거히 100년이 되어가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지만
아직도 세계각국에서 이곳을 찾아오며 그때를 유추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옥인후배 덕분에 역사공부 확실히 잘 했어요.
나도 그런 성격탓으로
TV중계로는 맘이 안 차는 경향이 있어요.
가끔 직접 참여할 적이 있어요.
그리고 슬픔을 못 참고 잘 운답니다.
광숙 선배님,
이번에 전 황태자 죽음과 장례식을 보면서
옛날 오랫동안 영화를 누리던 황가의 마지막을 바로 공간과 시간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세상의 영화, 부귀와 권력을
소유,무소유하거나 막론하고 누구나 죽는 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집안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많은 후손들의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어요.
위에 제가 요약해서 올린 장례식 준비를 맏아들이 12년간 준비해왔다고 인터뷰한 것을 보았어요.
워낙 고령이었기에 준비시작이 일찍 되었기도 하겠지만
700여년의 합스부르그 왕가의 자존심의 일면이었겠지요.
이번에 여러가지로
삶,죽음, 정갈함, 관용 ,,, 등등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도 언제인가는 떠나는데
남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부터라도 배려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고요.
7월 16일
아침일찍 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다.
-장례식이 15시부터이니까, 지금 나랑 ㅁㅁ로 가서 거기서 TV중계 보아도 되거든..같이 가자..."
'-아니야.. 나 그냥 집에서 지낼래.. 거기서는 느낌이 다를거야.잘 다녀와
전화를 끊고 뉴스를 보니
아침 11시부터 18시까지 시내 전차가 안다니고
장례식이 열리는 스테판성당 지하철 역은 전철이 서지않고 지나쳐 운행한단다.
그렇다면 시내중심 못미쳐까지 전차타고 간 후 걸어서 중심은 들어 가야 한다는 얘기네..
12시부터는 오토의 도큐를 보여주고
13시부터는 유럽의 왕가의 장례식을 보여준단다.
토요일이라 상점들이 문을 일찍닫는다.
서둘러 슈퍼마켙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 갖고 오다가
동네 소비에스키 광장에 앉아 잠깐 쉬었다.
11시정도 밖에 안되었는데도 몇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지나간다.
아마도 장례식에 가는 듯이 합스부르그가의 특이한 모자를 썼다.
갑짜기 웃음이 피식 난다.
내가 뭐라고... 한국여자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외출한 딸에게 전화를 놓는다.
- 얘야~ 너 나랑 오후에 스테판 성당쪽에 갈래?
딸애가 실소를 한다
-엄마! 그냥 TV나 보세요.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교통도 마비되고..
애그,, 그려 그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