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 신순애 님은 나랑 이름뿐 아니라 나이도 같을 터이라,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사진으로는 나보다 젊고 아름답네요 )

 

ㆍ66년 13살 때 평화시장 봉제일 신순애씨 ‘여공의 삶 석사논문’
ㆍ“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안타까웠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시다’(보조원)로 일했던 소녀가 환갑을 앞둔 나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쓴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됐다. 주인공은 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한 신순애씨(58)다.

서울 중랑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신씨는 7남매 중 막내였다. 아버지와 오빠는 몸이 불편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신씨는 어린 나이에 콩나물 값이라도 벌어 와야 했다.

신씨는 열세 살이던 1966년 주인집 언니의 손에 이끌려 평화시장의 한 공장에 미싱사를 도와 잡일을 하는 시다로 취직했다. 미싱사와 시다들은 천장 높이가 1m 남짓한 다락방에서 하루 종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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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미싱공 생활 등 자신의 생애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신순애씨. | 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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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미싱사’ 밑에서 일을 하게 됐기에 신씨는 ‘7번 시다’로 불렸다. 신씨는 2년6개월이나 같이 일한 ‘7번 미싱사’의 이름조차 몰랐다.

시다들의 작업판은 높이가 매우 낮았다. 신씨와 다른 시다들은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작업판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일했다.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재단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점심시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통행금지 직전인 밤 11시30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일을 하고 손에 쥔 첫달 월급은 700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3400원이었다.

2년 반 동안 시다로 일하고 나서야 신씨는 ‘미싱 보조’로 승진했다. 월급이 3000원으로 올랐다.

힘들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신씨는 ‘열심히 일해 미싱사 언니처럼 옷 만드는 기술자가 되면 삼일빌딩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다부진 꿈을 갖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삼일빌딩은 부의 상징이었다. 신씨뿐 아니라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면 가난한 가정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견뎌냈다.

신씨는 5년 만인 18세에 미싱 기술자가 됐다.

일하는 만큼 돈을 벌었고 때로 조카들과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기도 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셋째오빠의 결혼 자금도 댔다. 몇 년만 미싱 기술자로 일하면 집안 형편이 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다른 여공들도 비슷했다. 어떤 여공들은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며칠 동안 철야작업을 하기도 했다.

1975년 3월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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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 인근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옷감을 쌓아놓고 재봉 작업을 하고 있다. 한 작업자는 옷감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신순애씨는 13살 때 평화시장의 한 공장에 미싱사를 도와 잡일을 하는 ‘시다’로 들어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인물 한 장이 신씨의 인생을 바꿨다. 공장 안에 뿌려진 유인물에는 ‘중등 수업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신씨는 퇴근하자마자 ‘청계피복 노동교실’로 달려갔다. 입학 신청을 하고 손꼽아 입학식 날을 기다렸다. 그곳이 노동조합인지도 몰랐던 신씨는 청계피복 노조 사람들로부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당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공부는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노동교실에서는 ‘7번 시다’라든지 ‘1번 미싱사’라고 부르지 않고 ‘순애야’라고 불러줬다.

자연스레 노조에 가입한 신씨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 33명 중 재단사를 뺀 32명을 노조에 가입시켰다. 농성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으로 결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노조에 다니느라 일을 안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신씨의 공장 사장은 노조 활동에 앞장서는 신씨가 눈엣가시였지만 성실하고 일 잘하는 미싱사였던 그를 내보낼 수가 없었다.

1977년 9월 이소선 여사가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경찰이 청계노조 노동교실을 폐쇄하려 하자 신씨와 동료들은 “빼앗기더라도 소리나 한번 내보자”며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은 신씨와 동료들에게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신씨는 “노동교실을 돌려달라는 요구가 어째서 북한의 지령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신씨는 결국 구속돼 재판을 받았고 1978년 5월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다시 미싱사가 되려 했지만 들어가는 공장마다 신씨를 쫓아냈다. 옛 공장 사장은 신씨에게 “함께 일하고 싶지만 압력이 들어와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결혼을 해 딸 둘을 낳았다. 둘째딸이 중학생이 된 후에는 우연히 연을 맺게 된 청소년상담센터에서 일했다. 늦게나마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2003년부터 초·중·고 검정고시를 차례로 통과했다.

신씨는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해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뒤 2010년 정치경제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생애사를 석사 졸업논문에 담담히 적었다.

신씨는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도 “생애사를 책으로 써보라”는 지인과 옛 동지들의 권유를 수차례 받았지만 망설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사회학 공부를 하며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다룬 책과 논문들을 접하고 마음이 달라졌다. 지식인들이 평화시장 여공들에 대해 쓴 저술을 볼 때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노조에서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투쟁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신씨는 못내 안타까웠다. 공부를 계속하며 신씨는 ‘내가 직접 쓴 기록을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 교수가 신씨의 여공 시절을 적은 리포트를 본 뒤 “대학원에 진학해 이 내용을 논문으로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신씨는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논문작업에 매달렸다. 아침식사를 끝낸 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논문을 쓰다 시계를 보면 어느새 오후 3시가 훌쩍 넘곤 했다. 시다 시절 무릎 꿇고 앉아서 일하느라 생긴 허리질환과 체력·집중력 부족으로 힘든 날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논문을 완성했다.

신씨는 논문을 쓰며 여전히 노동자들이 경제성장의 성과를 나눠갖지 못하는 현실이 슬펐다고 했다.

“우리가 투쟁할 때 정부 관계자들이 나와서 ‘GDP 1만달러만 되면 당신들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말했어요. 사실 그때부터 분배를 했어야 해요. 공부를 해보니까 유럽에서는 경제성장기부터 노동자들에게도 성과를 분배했더라고요. 그때부터 쌓인 모순이 지금까지 커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신씨의 자전적 논문인 <13세 여공의 삶>은 지난 12일 성공회대 NGO대학원의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 신씨는 오는 8월 석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도교수인 김진업 성공회대 부총장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저술은 많지만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문자 그대로 여공인 신순애씨가 자기의 삶을 석사논문으로 표현해냄으로써 학계의 멤버로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논문 말미에 “내 논문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적었다.

신씨는 이 논문을 갖고 곧 이소선 여사의 묘소를 찾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제 학부 졸업식 날 몸이 아파 오지 못하셨어요‘너 석사모 쓸 때는 꼭 가마’ 하셨는데…이소선 어머니께는 꼭 석사논문 한 부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