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정관념

구경분

나는 때때로 사람이 아니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갖가지 소소한 고정관념이 나를 힘들게 할 때, 그 고정관념을 확! 깨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날 때, 바로 그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땅만 사 놓고 집을 짓기 이전에 가끔 밭에 나가면 용변 볼 일 때문에 중간에 집에까지 갔다 와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곧 집을 지을 곳에 간이화장실을 설치하기도 뭣하고 하여 그냥저냥 지내는데, 공교롭게도 밭에만 나가면 화장실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머리위로 새똥을 맞은 적이 있었다. 모자를 쓰지 않았더라면 정수리에 맞았을 새똥이 하얀 모자 위로 떨어져 모자에 얼룩이 졌다. 자동차 앞 유리나 지붕에 새똥을 맞는 것은 흔한 일이고 어쩌다 재수 없으면 머리위에도 맞는다. 밭에 나갈 적마다 화장실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나는 자유롭게 날면서 똥을 싸 내리는 새들의 염치없는 짓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마음으로 부러워하였다. 사람이 그래봐라. 아무데나 똥 싸갈긴다고 얼마나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인가!

 

때때로 이른 아침 시골 학교의 한적한 운동장에서는 동네 개들이 쌍으로 붙어있을 때가 있다. 우습다기보다 민망스런 그 광경이 만약짐승이니까 그냥 봐주는 것이지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흉 떨릴 일이겠는가! 이렇게 사람이기 때문에 짐승과 달라야할 예절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어야할 예절이지만 시대에 따라 바뀌거나 없애야할 예절도 더러는 있다.

 

사람은 스스로 짐승과 구별 하느라고 예의범절을 정하여 지키기를 권장한다. 그러나 그 정한 것들 때문에 스스로 힘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사람이니까 그리해야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힘든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가! 짐승과 구별 짓는 예절은 당연히 있어야할 예절이지만 지워도 될 만한 예절 때문에 사람이 힘들어진다면 그 고정관념은 과감히 깨어 버려야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양반과 상놈이 엄격히 구별되었던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가 있어 우린 아직도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참 많이 남아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더 관심이 가는지 모르겠는데, 제사 때나 명절 때 장만해야하는 음식들을 보면 온 나라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천편일률적인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산적, 어적, 육적,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도라지나물, 탕국, 식혜, 편, 약과, 다식……. 물론 가정마다 간소화 시킨다고 더러 빼는 것도 있지만 절대로 빼면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있어 제사 때나 명절 때 음식을 장만하는 여자들은 무지 바쁘고 힘이 든다.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은 말한다. 일 년에 명절 두 번 제사 몇 번 있는 것을 가지고 뭘 그리 호들갑 떨며 힘들다고 하냐고. 그런 사람에게 한 번 종부 노릇을 시켜보고 싶다. 종부는 보통 고조부 대까지 제사를 모신다. 명이 짧은 조상님들을 모신 집에서는 조부 한분에 조모가 둘 셋 있는 집도 있다. 그런 집은 제사만도 열 번이 넘는다. 거기에 시제와 성묘까지 합하여 계산해 보라! 이렇게 말하면 동네에 종부가 몇이나 된다고 그러냐며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종부가 아니라고 남의 종부 소 닭 보듯 하는 건 사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사람이 어울려 살면서 내 이웃과 함께 행복한 것이 진정한 행복이지 나 혼자만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나는 내 딸이 종부라서 종부의 삶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제사 음식은 소담하게 담아야한다는 시할머님 지론에 의해 음식을 참 많이씩 한다. 요즘엔 음식이 귀하지 않아 제사음식을 싸들고 가는 친척들도 없단다. 남의 집 제사 음식을 덥석 받아먹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제사음식은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된다는 법도가 있어서 난감해 하는 딸에게 조금씩 장만하라고 충고를 해도 시할머님 살아생전엔 그분 뜻을 받들어야한단다.

 

하기사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격식대로 제사상을 차렸었다. 그런데 60고개 넘으며 집안에서 내가 제일 큰 어른이 되면서부터 한 가지씩 살금살금 일을 줄여나갔다. 우선 가짓수를 줄이고 양을 줄였다. 그래도 제사를 준비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준비단계로 들어가 제삿날은 종일 주방에서 산다.

 

올해는 아랫동서가 예순 살이 되었다.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어 제일 어른이 된 나는 과감하게 추석과 설 명절을 간소화하기로 하였다. 제사 때에는 제사음식을 정식으로 차리지만 추석 명절과 설 명절엔 초 간단으로 차려 말 그대로 즐거운 명절로 탈바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을 세웠다.

 

<우리 집의 추석명절 계획>

1. 차례 상에 올리는 음식: 햇과일들 (사과, 배, 감 밤, 대추), 산적, 어적, 포, 송편, 술

2. 새벽미사로 성당 다녀오고 아침 8시 경 집에서 가족 친지들 모여 차례를 지냄

3. 차에다 먹을 것 싣고 가족친지 모두 차에 올라 강화일주 하기

4. 낚시하기 좋은 곳 나오면 낚시하기

5. 때가 되면 시원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싸온 점심 먹기

6. 집에 돌아와 차 버리고 혈구산 1코스 올라가기

7. 저녁 식사 후 바로 옆에 있는 교회 마당에서 열리는 마을 노래자랑 참석하기

 

명절날 주 메뉴는 모둠생선구이와 산적, 묵은지 찌개이다. 가장 많이 손이 가는 녹두전과 각종 전 등을 없앴다. 그리하여 여자들을 음식 만드는 데에서 해방시켰다. 동서한테는 상에 올리고 싶은 맛있는 반찬 한 가지 정성껏 만들어 한 접시만 들고 오라했다.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동서의 밝은 목소리로 내 결정이 참으로 탁월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효도는 살아생전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 상차림 후하게 차리느라 애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들다고 얼굴 찡그리며 상 차리는 것은 조상님들의 영혼한테 결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마음 편하게 해드리고, 용돈 한 번 더 드리며, 맛있는 것 한 번이라도 더 사드리는 것이 효도이지, 돌아가신 후 상다리 휘게 음식 차려놓는 것은 효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