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칼럼 쓴 지가 언제였던가. 아마도 슈링크의 <주유소의 여인>이였던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거의 3년간 모시고 있던 내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손주를 2년 터울로 둘이나 보았다. 손주들이 자랄수록 나도 내 어머니처럼 자꾸 어디론가 떠밀려 간다. 손주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나 역시 어머니처럼 저 세상으로 가겠지. 중간에 서서 세대를 교체시키던 내가 어느덧 세대교체의 선두에 서 있다.

 손주들은 나에게 엄청난 기쁨과 일거리를 제공했다. 첫째 손주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던 어깨가 둘째 손주를 보고나서 탈이 났다. 둘째 손주가 15개월이 되었건만 그 어깨가 아직까지 아프다. 작은 아이가 걷고 의사표시를 해서 이젠 다 키웠는가 보다 안도하고 있었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어깨 통증만 아물면 육아로부터 해방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뒤퉁수를 맞았다. 나는 지금 세째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세째 손주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기뻐해야 할 지 화를 내야할 지 한참 생각했다. 결국 나는 화를 냈다. 요즘처럼 아이 기르기 힘든 세상에 셋째가 웬 말이냐고....오죽하면 아이를 안 낳지 않느냐. 그러니 둘째 놈이 아우 볼 짓을 할 때 누누이 조심하라고 타일렀건만 셋째라니....난 둘은 키웠지만 셋째까지는 못 키워준다. 딸은 너무나 완강하게 말하는 내게 셋째는 자기의 힘으로 키울 테니 휴직할 때까지만 봐달라고 울며 말했다. 그렇게 셋째를 받아 들였다. 내년 3월 손주를 또 본다. 결혼을 하지 않겠고 고집부리는 큰 딸 아이의 몫까지 작은 딸이 다 해주려나 보다.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딸 부부는 아이를 너무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부터 자기 생활은 없어졌다. 딸은 경향신문에 3년 동안 칼럼을 쓰고 있었다. 그 칼럼들은 몽땅 아이의 얘기였다. 입덫을 할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소주에 맥주에 양주를 밤새 혼합해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같은 기분-, 아이 낳을 때 고통이 얼마나 큰지, 또 아이 기를 때 얼마나 졸리고 힘이 들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고 가고 싶은 곳이 많은지, 아이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 썼다. 아이는 딸이 세상을 들여다 보는 창구가 되었다. 

 다행이 요즘은 우리 때처럼 셋째를 낳으면 의료보험도 안 되고 비애국자로 치부하던 세상이 아니다. 딸이 둘째를 낳았을 때 받은 혜택이 어마어마했다. 회사에선 병원비를 몽땅 대주고 또 두툼한 금일봉이 나왔다. 구청에선 도우미를 무보수로 보내주었다. 양가 부모들 호주머니도 많이 털렸다. 나라에서 양육비가 매달 나오고 큰아이 어린이집 보육료를 내도록 아이사랑 카드가 나왔다. 그 카드를 가지고 음식점에 가면 할인 혜택까지 준다. 셋째는 대학 등록금까지 면제해 준다는 세상이 되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의료보험 혜택을 주지 않는다 해도 꾸역꾸역 낳던 아이를 온갖 혜택을 주면서 낳으라고 해도 안 낳는 세상이 되었다.

 큰 손주는 기저귀도 떼지도 못한 채 어린이집에 보내졌다. 예전에는 부모로부터 배우던 것을 이제는 어린이집에 가서 배운다. 대소변 가리는 것으로부터 혼자 밥 먹는 것 장난감 정리하는 것 인사하는 것까지 어린이 집에서 배운다. 마냥 아기같던 손주가 어린이집 다니고부터는 의젓한 어린이가 되었다. 그런 어린이집 보육료는 나라에서 부담하고 있다. 아이는 개인이 낳지만 양육은 나라에서 맡는 세상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침묵의 변명을 하다가 손주들 얘기만 늘어놓았다. 아기는 블랙홀이다. 시간과 에너지와 머니까지 한없이  빨이들이는 불랙혹.  침묵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