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호주제 폐지를 놓고 논란이 많은데, 딸 부잣집 우리집에서도 남녀평등 문제때문에  유교사상이 투철하신 아버지  마음이 불편하셨을  것 같다.
우리집은 2대 독자이신 아버지한테 시집온 어머니가 딸여섯을 내리 낳는 바람에 어머니는  늘 죄인처럼 사셨다.
어쩌다 고모들이 친정에 오시면 시앗을 봐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고모들 성화에 시달리시다가 돌아가는 고모들한테 곳간을 비워서 바리 바리 싸들려 보내시곤 하던 기억이 난다.
둘째, 제섬( 인일 6회)가 태어 났을때는  할아버지께  딸 손주라는 말 씀을 못 드려서 아들 손주를 보신 줄 아신 할아버지는 밤새 손수 탯줄을 태우시곤 날이 밝자 바로 동회로 달려가서 출생 신고를 하시는 바람에
남자아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셌째, 성순(인일 8회) 에 이어 넷째, 성희(인일 10회)를 낳으셨을때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기는 강보에 싸서 윗목에 밀어 놓고 엄마는 돌아 누워서 눈이 퉁 퉁 붓도록 울고 계셨었다.  그후 또 딸, 그리고 여섰째도 또 딸인 성옥(인일 15회)이 남동생을 본 날는 온동네가 들썩했고 새벽까지 온동네잔치가 시끌 벅적 요란했었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엄마는 8번째 아이를 임신하셨다 내가 다 큰 딸 한테 창피하지도 않냐고 핀잔을 주었더 니 엄마왈 어차피 50%확률인데 아들 하나 더 낳아야 한다나.... 훗날 내가 한 말때문에 엄마는 그렇게 챙피 했었노라고 고백하신 적이 있다.
그렇게 8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우리 부모님은 일생을 고생하셨다.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때 엄마는 5개씩 도시락을 사곤 하셨다  남들은 딸은 대학을 안 보내도 된다고 했어도 아버지는 딸도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고 교대나 간호대를 적극 권하셨다. 이화대학을 가겠다고 하는 동생을 억지로 교대에 가게 해서 평생 원망을 들으시기더 하셨다.  그래도 나는 첫 자식이라고 각별하게 생각하셔서 초등학교때 그때만해도 남자는 반장, 여자는 부반장을 고집한거 까지는 참으셔는데, 졸업할때 남자라고 경기도지시싱을 날 제치고 받게 된 걸 못 참으시고 학교로 찾아오셔서 항의를 하셔서 내가 상을 타게 해 주신 분이다.
또 지금의 교대가 생기기전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사가 되니까 사범 병설학교를 가도록 권유하시곤
일반 중학교에 앞서 특차로 보는 시험날  담임 선생님과 하루종일 운동장에서 시험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하셨다.
중학교 입학하고 첫 시험에서 어쩌다 평균 100점을 받아서 전교 1등을 했을 때
" 네가 아들로 태어 났으면 얼마나 좋았냐" 고 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난 평생 남자보다 더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 여자가...." 하는 여자 비하의 말은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아버지는 돌판에 임명장과 학위증을 새겨 달라고 하셨다. 하긴 자식의 기쁨을 본인의 기쁨 보다 더 기뻐하는 부모마음을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깨닫게 된다.

그런 아버지한테 최근에 기인 편지 한장을 드리게 되었다.
그리도 애지중지하시던 아들 장가도 못 들인채엄마가 세상을 떠나시자  금방 아버지는 재혼을 서두르셨다.  출가외인인 딸들은 어차피 친정 걱정하지 말고 제 살림에 열중해야 한다고, 아들 둘 데리고 당신은 재혼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해 드리기로하자, 아버지는 딸 들에게 나중을 위해서 재산 상속 포기서를 쓰라고하셨다.  우리 딸 들은 아직 결혼도 안한 두 남동생한테 재산상속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포기서를 썼는데....
요즈음같은 남녀 평등시대에 우리 딸 들의 권한포기가 두 아들, 며느리, 새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편안하게 잘 모셔드리는데  좀 생색이 날지.... 아버지는 아직도  딸들은 당연히 출가 외인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버지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렸을 딸들을 대표해서 드린 편지에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으시다.
아버지도 그리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다르게 생각하셔서인지....
아무튼 옛날에는 그렇게 공평하시던 우리 아버지, 유교사상에 젖어서 평생을 사신 아버지가 요즘 세상을 사시는게 편안치 만은 않으실상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