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골학교 선생이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낯선 도시에서 새벽에 학교로 달려가 자율학습을 했고, 방과 후에는 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또 4년을 공부하여 임용고시를 쳤다. 드디어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꿈이 이루어졌을 때는 육아를 위해 꿈을 버려야 했다. 시어머니는 연로하셨고 친정어머니는 허약하셔서 도저히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버린 꿈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딸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딸이 결혼할 때 말했다.

  “ 육아는 엄마가 맡아줄 테니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직장에 다니는 딸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않았다. 나는 딸을 볼 때마다 엄마가 아직 건강하여 애를 봐 줄 수 있으니 얼른 낳으라고 채근했다. 내가 육십이 넘으면 안 봐줄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 반 협박도 했다. 채근 덕분인지 협박 덕분인지 아무튼 딸이 손녀를 낳았다.

  내가 도와주면 딸은 자기 꿈을 펴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힘이 드는지 몰랐다.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소설 쓰는 시간 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손녀 자라는 것이 너무 대견하고 예뻐 그걸로 만족을 했다.

돌이 되어올 때 딸은 둘째 소식을 전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 다시 소설 쓰기도, 친구들과 산도 다니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하지만 금방 맘을 돌렸다. 그래 하나보다야 둘이 낫지. 이왕 키워주는 거 둘은 봐주어야지 하고 자위했다.

  둘째가 태어나자 하나만 있을 때보다 두 배로 정신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우리가 애들 키울 때와는 세상이 달라져 내가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것들이 많고, 정작 쓸데 있는 것들은 도외시 하는 육아 방법으로 딸과 계속 갈등했다. 내가 왜 누굴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지나 손자 돌이 지났다. 육아가 조금씩 수월해졌다.

  휴직을 했던 딸이 복직할 날이 다가오자 여행이라도 갔다가 오라고 권했다. 육아가 조금 쉬워졌으니 혼자서도 두 아이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이었다. 

  세계에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5개가 있는데 그 중 8개가 네팔에 있다. 네팔 여행은 설산을 바라보며 트레킹 하는 것이 묘미다. 설산이 잘 보이는 곳에는 예외 없이 롯지가 있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설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밀크티를 마시는 낭만도 특별하다. 열대 우림지역으로부터 눈 내리는 고산지역까지 몇 일만에 다 맛볼 수 있는 것도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보름 사이에 기어 다니던 손자가 이주일이처럼 손을 휘저으며 열심히 걷고 있었다.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돌보던 딸의 살림 솜씨도 많이 늘어 이래저래 흐뭇한 여행이었다. 점점 편해지는 육아에 대해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내가 너무 자랑질을 많이 했나 보다. 딸이 세째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히말라야 산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딸은 세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심정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또 다시 힘들고 정신없는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도 안 왔다.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다시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 이 힘들고 복잡한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세째를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덕분에 딸과의 관계가 내내 소원했다.

  다섯 살짜리 손녀와,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세 살짜리 손자가 어린이집에 입학하는 날, 세째가 우렁찬 탄성을 내지르며 이 세상에 나왔다. 한 생명의 탄생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답고 벅차다. 첫째 낳았을 때보다는 그 기쁨이 익숙하다는 것 뿐 세째도 첫째 못지않게 기쁘다. 딸은 2년마다 아이를 생산해 냈다.

  어쩌다 보니 딸은 셋째를 생산했다. 딸 이름 앞에는 다산이란 호가 붙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애국자라고 말했다. 세째를 출산하고 나니 나라에서 받는 출산 장려 혜택이 많았다. 살고 있는 구청에서 출산장려금이 나오고, 다니던 회사에서 육아휴직과 함께 금일봉이 나왔다. 병원비도 셋째라 20%를 할인해 주고 그것도 회사에서 나왔다. 구청에서는 아이 돌보미를 15개월간 무료로 보내준다. 세째는 학비도 안내고 대학까지 다닐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들어가기 힘들다는 어린이집도 무조건 0순위라는 것이다.

  그만큼 혜택을 주어도 애를 안 낳는 요즘 세상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자식을 셋 낳으면 야만인 취급을 했다. 아들 딸 구별말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를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셋째는 의료보험 혜택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애를 낳았다.  지금이 알 수 없는 세상인지, 그때가 알 수 없는 세상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모녀에게 히말라야 트레킹은 특별했다. 돌아와 나는 트레킹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의외로 주위의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어떤 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가는 기쁨도 맛보았다. 히말라야가 내 문학적 감수성에 불을 확 질러 놓았다. 그 반응에 용기를 내어 여태까지 써 온 소설을 모아 단편집을 출간했다. 

  반면에 딸은 진짜 떡두꺼비 같은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자식 같은 책을 낸 엄마보다는 진짜 자식을 셋이나 생산해 낸, 이 시대에 진정한 애국자인 내 딸이 열 배 스무 배 더 대단하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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