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의 애절한 사연/신금재 


 한국 뉴스를 보니 이산가족의 애절한 사연들이 방송되고있었다. 

휠체어를 타고온 아흔이 넘으신 할아버지와 동생의 두 딸을 만나러가는 할머니의 설레이는 얼굴 모습이 화면 가득하였다.

그중에서 신의주 반공학생 투쟁에 가담하였다가 어머니의 권유로 월남한 어느 할아버지의 사연은  각별하게 다가왔다.

하나라도 살아야한다면서 큰 아들을 월남시킨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듯 할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친정아버지의 사연과 비슷한 부분에서 나도 눈가가 젖어왔다.

아버지는 1.4후퇴 때 조카 두 명과 아들을 데리고 월남하셨다.

공산당들의 악몽같은 정치가 극에 달할 무렵--공산당들은 지주였던 아버지네 들판에 와서 벼 낟알을 세어 수첩에 적어갔다는데--형님들이 자손들의 안전을 우려하여 셋째 아들인 아버지에게 집안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서해 외딴섬으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고향 황해도로 다시 돌아가려던 계획은 휴전선으로 무산되었고 아버지의 고생스런 남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반공학생 투쟁을 하였던 그 할아버지는 지금도 하나라도 살아야한다면서 월남을 권유하였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 뒤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이산가족 아픔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감히 할 수 없는 말--아버지는 항상 고향의 가족만 생각한다--는 지독한 언사도 아무렇지않게 하곤 하였으니.


이제 나이들어 이민살이를 하는 요즈음,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온다.

아버지가 조카 둘을 데리고 아들은 걸리고--섬에서 아들은 전염병으로 병사하는 아픔을 당하셨다--어렵게 오른 피난길에  아버지의 귓등으로 들려오던 형님들과 부모님의 부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신의주 할아버지의 어머니처럼 너 하나라도 살아서 우리 집안을 지켜다오---라는 처절한 부탁의 목소리였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하여본다.

언젠가 미국 시카고에 고모님을 방문하러갔다가 먼 집안 친척 할머니를 만났었다.

그 할머니는 거창신씨 집안에서 소작일을 보던 분의 따님이었다.

나의 손을 잡고 셋째 도련님의 따님을 만나다니---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산가족 상봉뉴스가 나올 때마다 마당에 나가 먼 하늘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뉴스 화면과 어우러져 흐리게 다가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치매 증상이 왔을 때 아버지는 정말로 대문을 열고 고향으로 떠나셨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집에 가야지, 집에 가야해---하시더니 송도버스에 타셨다가 길을 잃으셨다.

아버지는 며칠 뒤 인천시립병원에서 손발이 동상에 걸린채 발견되었다.

하마터면 아버지가 객사하실뻔하였다며 아버지의 질부이자 우리의 사촌올케인 언니가 목을 놓아 울던 기억이 난다.


고국에서 전해져오는 남녘의 꽃소식과 이산가족 상봉 소식에 왠지 마음이 따스해져오는 아침  

로키산 너머 불어오는 치눅바람에 마음 한자락 실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