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존경하는 교수님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은 학과 교수님이 아닌 써클 지도 교수님이셨다. 써클 지도 교수는 이름만 걸어 놓았지 극히 제한적인 활동을 하는 다른 지도교수들과는 달리 이분은 회의뿐 만 아니라 써클 이름으로 학교 내에서 한문 특강을 하시기도 했고, MT 때마다 참석하시어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자연히 학과 교수님들 보다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그분은 모교 학생들께 가장 영향력을 많이 주는 최고로 존경받는 교수님이셨다.

 우리는 연초에 한복을 입고 교수님께 세배를 다니곤 했다. 그때 말씀하셨다.

 ‘자네들 졸업하더라도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연초에 연하장이라도 꼭 보내게.’ 

 그 후 해마다 나는 그 분께 연초면 연하장을 보냈다. 시골학교에 발령이나 근무한다고 연락을 드리면 ‘도시에 새 물결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은 도시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 아닌, 시골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이라고 쓴 답장을 보내 주셨다.

 나는 남편 직장을 따라 제주에 내려가 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시외전화요금도 비싸 마음대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비행기 티켓 값도 비싸 서울을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오로지 편지만이 소통의 수단이었다.

제주에 내려간 첫해 나는 열통의 편지를 써서 육지에 보냈다. 그때 제일 먼저 답장을 보내주신 분이 그 교수님이셨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편지가 왔다.

 “나는 편지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장을 씁니다. 그런데 편지를 정리하다가 답장을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보냅니다.”

 교수님으로부터 두 번째 편지를 받은 이후부터 나 역시 누군가의 편지를 떼어먹는 일이 없다. 요즘은 편지가 메일로 변하고 또 카톡으로 밴드로 변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소식에 바로 그 자리에서 답장이나 댓글을 쓰려고 노력을 한다.

 내가 일원동에서 서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은 근처에 오는 길에 들렀다며 서점에 오셨다. 그분은 남편에게 고개를 숙이며 바쁘더라도 시간을 좀 내주어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라며 부탁하셨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내가 글을 포기하지 않고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교수님 덕분이라고.....

 그 후 모교에서 정년퇴직하시고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계실 때까지 연락이 되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책을 냈을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사람이 그분이었다. 모교로 연락을 하여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드렸다. 책을 냈다는 소식에 ‘내가 구박을 좀 했더니 드디어 냈군요.’ 하며 좋아하셨다.

 우편으로 책을 보내드렸더니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다. 책을 받자마자 첫 작품 을 읽고 강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신입생 시절에 만났으니 40년의 참으로 오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