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글렌 굴드/ 김옥인
내가 음반으로 글렌 굴드를 만난것은
비엔나로 유학와서 얼마 안된 때였다.
아직 오디오 시설이 집안에 안 되어 음악의 고갈증으로 허기졌었다.
앙상블을 같이 하던 동료가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음반을 듣을 수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장 그곳으로 갔었다.
딸애를 적당히 맡길 곳이 없어 데리고 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어린이들이 놀수있는 놀이방이 있어 나처럼 엄마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데 집중하게 되어있었다.
(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나는 그때가 무척 그리웁다.
음악에 대한 동경과 인식욕의 허기를 채워주던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의 정신적 충전...
동행했던 딸애도 그 때 놀이방에서 풍요로운 그림책들과 놀이기구를 대하던 경험을 귀한 추억으로 간직한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고..오히려 누구의 간섭없는 자유로움이 유일했던 보석같은 순간이라고 .. )
그곳에 소장한 음반( LP.CD. )목록에서 내가 듣고 싶은 것을 골라
창구에 주면 틀어주었는데.,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각자 자리에서 들을 수있었다.
어느 날 바흐의 곡을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듣는것 같았다, 왜냐하면 허밍하는 소리가 너무나 가까히 들려왔기 때문이다.
헤드폰을 벗고 주위를 살폈으나 모두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헤드폰을 쓰고 듣었다.. 여전히 들려왔다.
나는 그때까지 글렌굴드에 대헤서 너무나 무지한 사람이었다.
30여년을 음악을 배우며 살아 온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지도교수님에게 가서 나의 경험을 말했다.
그랬더니 Gould의 음반을 듣지 말라고 했다.
너무나 굴드의 음악해석이 특이하기때문에
배우는 입장에서는 기존의 기초해석으로 연습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의 음악을 들어버린 후였다.
나의 내면의 욕구는 벌써 변화된 이후였으나
교수님에게 교습을 받을 때에는 예전과 같이 쳤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왜 한국에서 그를 모르고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한국의 지도 교수님도 굴드에 대한 생각이 비엔나 교수님과 동일 하였던 것이리라.. 하고
그 후
음악활동을 하며 친해진 악우가
내가 아직 오디오 장치가 없는 것을 알고
본인의 CD를 테이프로 옮겨주어 그것을 듣었으며
국영 방송국에서 보여준 기록 영상을 녹화했던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주어
점점 굴드를 이해하며 집중하게 되었다.
CD 플레이어를 마련한후
내 자신이 골라 그의 바흐 골드베르그변주곡을 장만했을 때는 너무 행복했다.
그는 1932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죽은 카나다 음악가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으나,
31세가 되면서 공개 연주는 안하고 녹음만 했다니
저절로 한국에 공연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문명의 이기에 따라
그의 연주 동영상도 이렇게 종류별로 보게 더욱 용이해졌다.
오늘은 그에 대한 기록 동영상을 보며
그와 가까히 만난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모아 인류 후세에게 전해주는
관계자 모두에게 감사하다.
글렌 굴드님 당신이 남긴 음악을 귀하게 듣습니다.
고맙습니다.
2013년 12월 9일
글렌 굴드
글렌 허버트 굴드(영어: Glenn Herbert Gould, 1932년 9월 25일~1982년 10월 4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바흐 음악의 대위법적 텍스쳐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굴드는 대부분의 낭만주의 피아노를 거부했으며 사춘기 이후 리스트, 슈만, 쇼팽을 피했다. 그의 녹음 음반은 대부분 바흐로 채워져 있기는 했었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브람스, 전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얀 피에테르존 스벨링크, 20세기 작곡가인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가지각색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굴드는 갖가지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비정통적인 음악 해석법, 악기를 연주할 때의 버릇에서부터 삶의 양상, 개인적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기인적인 면모를 보였다.
196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라이브 공연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 다른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 작곡자, 지휘자,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 잡지에 음악 이론을 논하며 그의 음악 철학을 나타내는 수많은 기고를 했다. 작곡자로서의 면모는 눈에 덜 띄는 편인데, 수는 적었고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지휘와 다른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방송인으로서 굴드는 스튜디오 연주에 대한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라디오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옥인 선배님
계속적으로 음악을 삶의 한 부분으로, 가장 가깝게 위로의 동반자로 여기게 만드는 선배님
감사드립니다.
몇년 전 남편이, 독특한 천재 음악가라며 글렌 굴드의 일대기 영상을 열심히 보던 일이 있었는데
아마 이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오늘 월요일 아침 너무 감명적인 일대기 잘 보았읍니다.
긴 영상이라 한번에 보지는 못하고 나누어 보지만 훌륭한 다큐 영상이네요
반가운 정인옥 후배,
잘 지내지요?
어느덧 연말이 되어갑니다.
제가 올린 영상이 좀 길어서 한꺼번에 보려면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할거에요.
시간여유있을 때에 옆에 따뜻한 차 타가지고 앉아 보세요 ^^
저는 아직도 처음에 굴드의 음반을 들었을 때 감흥이 신선하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그의 음악을 듣고 보게 되어 너무나 좋아요 ^^
같이 여러분들과 보고 싶어서 올렸어요.
아래에 골드베르그변주곡 올릴께 우선 들어 보세요.
그럼 세모를 즐겁게 지내고요... 반가웠어요.
몇년전에 제가 다른 컬럼에 올렸던 동영상이에요,
제가 장만한 음반세트에는 굴드23세(1955년) 연주와 49세(1981년)연주한 것과 인터뷰까지
"A State of Wonder"라는 타이틀 3CD로 나와서 작만했어요.
젊은시절과 나이든때 연주시간이 차이가 많더라고요.38분26초와 51분 14초로.
거히 나중것을 들어요.조금 느리다 싶지만 깊은 그의 내면이 느껴져서요.
이 두번째 녹음한지 몇달후며 50세생일 9일지난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데요...
바흐의 이곡으로 데뷔하고 ...같은 곡으로 일생을 마친 피아니스라고 회자되고 있지요.
Glenn Gould: Bach Goldberg Variations 1981 Studio Video (complete)
This is the original studio video during which Gould recorded Bach's Goldberg Variations in 1981 which was released on CD. This video originally appeared on Google Video, but was taken down when that service was discontinued.
옥인아!
이곳에 들어오니 이렇게 좋은 글과 음악이 머물고 있네~~~
굴드는 나도 좋아하는 음악가인데 그의 영상을 보니 행복하다!
고마워^^*
젊은 시절엔 헐리욷 배우 같은 외모였네~
비정통적인 해석이 그 시대에는 이단아 같았으나 지금은 환영받는 시대가 되었는데 ㅠ
그가 2000년대에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 음악의 다양성과 무궁무진한 해석으로
그의 음악이 더더욱 풍성해 졌을 것 같다.
ㅎㅎ 굴드가 우리를 만나게 해주었네 ^^
그렇지? 젊은 시절은 제법 핸섬했었지?
남자들도 나이에 따라 많이 변하는 것 같애.
그가 인터뷰할때 의지에 찬 모습을 보면 괜히 힘이 솟는 듯해.
인터뷰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친근한 음악들을 들으며 한없이 옛날로 돌아가며 감회가 깊구나
위의 기록영상은 그가 죽은지 26년째 되던 해에 그를 기념해서 제작한 것이라고 영문으로 적혀 있잖니..
그러니까 2007년쯤 되겠네.
그해에 그의 두개의 골드베르그변주곡 녹음이 CD로 재생산되어지면서
많은 그에대한 기록동영상들이 나타났었지..나중에 시간나면 자료들을 더 올려 볼께.
그가 더 오래 살았었다면 지금은 81세... 와! 상상이 안되는구나 !
물론 연륜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남아있겠지..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if) 이라는 추정을 삼가해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지금 그가 남긴 것 만으로 그를 기억해보려고 ㅎㅎ
선화야 정말 좋다 ,, 너랑 여기서 이리 대화를 나누니^^
이런 대화도 얼마후에 여기에서 찾아서 또 읽을 수도 있고..
우리가 얼마만큼 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있으려나?
여튼 ,우리 모두 더더욱 풍성하게 지내자
안녕,, 또 보자,
안녕하세요. 김옥인 선배님!
좋은 음악 칼럼 잘 읽고 갑니다.
음악에 허기가 졌던 젊은 날 딸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음악을듣고 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강명희 후배,반가워요!
그래요. 그 때는 음악에 허기가 지다못해 거히 도취해 살았었어요^^
요즘은 여유있게 집안에 앉아 편히 듣고 보면서도
그때,도서관 음악실에서 헤드폰끼고 옆사람 안보이는 탁자막이 공간안
나만의 나라에서 음악에 완전 몰두하던 순간...
다소 시.공간적으로 불편하였지만 신선하던 감동의 순간을 그리워 해본답니다.
사랑하는 옥인~!
멋지게 잘 지내는 모습이 그려지네.
그냥 가만 앉아 있는 것보다 두릿두릿
돌아보며 길 뚫린 곳을 따라 댕기는것을
더 좋아하는 나는 울엄니 늘 하시던 말씀대로
ㅂㅆㄴ 이 맞는것 같애.
지금도 여기서 음악을 들으면서도 체코의
시계탑밑의 광장을 떠올리고 있다네.
나는 그어떤 오케스트라보다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네.
우리의 늙어가는 감성을 깨우쳐주며 귀를 톡톡 건들여
가슴을 열게 해주는 옥인~!
늘고맙고 사랑한다네~~~
사랑이 넘치는 슈노언니!
제가 얼마전에 감기에 걸려 며칠동안 두문불출하며 음악속에 지내고 있어요.
이제는 거히 다 나았지만 그래도 좀 쉬려고요.
일년이 이리 마지막으로 달리는데
나 자신 늦추움으로 릴렉스를 하며 지내네요 ^^
지금도 위의 골드베르그변주곡을 들으며 글을 적고 있어요.
오래전 도서관에서 헤드폰으로 들으며 놀랬던 음악이 바로 이곡이에요.
그때는 굴드의 모습도 모르던 시기였지만 그의 허밍이 얼마나 가깝게 들렸던지요.
상상이 되세요? 언니
요즘도 가끔 이어폰으로 듣다보면 그런 느낌이 들고 있어요.
언니는 들으면서
먼 추억의 그 곳을 향해 달려가시는데...
저는 추억의 그 순간으로 향하고 있네요.
언니!
저도 피아노 솔로곡을 제일 좋아해요.
한악기로 이루어 내는 소리가
우주가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한 연주자의 기쁨과 슬픔과 모든것이 우러나며 표현되는 것을 ...
(물론 작곡자 의도의 테두리가 지어지면서도)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
따뜻한 집안에서
멀리 계시는 언니를 이리 가깝게 느끼며
굴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세상에 부러울게 하나도 없어지네요 ^^
평강하세요. 느을 계신 그곳에서
1.글렌 굴드 이야기 계속:
2007년 쏘니에서 3개의 바흐 골드베르그변주곡을
굴드의 1955년과 1981년 녹음한 것을 생산하고 판매했었을 때.
냉큼 달려가 장만 했던 CD커버와 CD들^^.
사랑하는 소장목록중에 하나 ㅎㅎ
당시 이 음반이 생산 발매되면서 각계로 부터 글렌 굴드에 대한 글이 쏟아져 나왔다.
2007년 당시의 글을 요약한다.
( 제일 위의 올린 기록 동영상 Genius within - The inner life of Glenn Gould 참조가 되는 글을 적어본다.^^
사진들은 여러 웹사이트로부터 옮겨와 편집했음,)
최근, Sony Classical에서 굴드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해서 3장짜리 기념앨범을 출시했는데,
이를 계기로 또다시 굴드에 대한 새삼스러운 조명작업들이 봇물처럼 쏱아지고 있다.
세상 떠난지가 20여년이나 훨씬 지났는데도 이렇게 여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이 또한 전설일 수 있겠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하지만,
글렌 굴드는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마치 전설 속의 연주가처럼 인구에 회자되었던 인물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50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일생동안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4년(32세),
"오로지 고통 뿐인 속임수"라며 돌연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그후론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러셀 허버트는 모피 제조공이었고,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머니 플로렌스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의 외가쪽 먼 친척 중 작곡가 그리그(Grieg)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굴드의 회상에 의하면 그의 외할머니는 파데레브스키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 욱스브리지를 떠나 온타리오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글렌 굴드는 간신히 걸음마를 옮겨놓을 무렵인 3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스승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할머니
최초의 선생님이자 어머니
글렌 굴드는 5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굴드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4년 2월 15일,
키와니스 페스티벌의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 직업 피아니스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합격한다.
1946년에는 음악 이론시험에서도 1등 상을 받았다.
어린 굴드에게 유일한 우상이 있었다면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었다.
굴드는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할 만한 말을 했다.
"슈나벨은 악기로서 피아노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었는데, 이 목표는 베토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 글렌 굴드는 그 목표를 아마 '바흐'로 삼았던 것 같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 리사이틀은 1947년, 스카를라티, 베토벤, 쇼팽,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굴드는 이후 뉴욕을 데뷔타운이라고 불렀다 한다).
데뷔 연주회를 가진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계약을 맺었고,
그리하여 굴드의 첫 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기록 동영상 Genius within - The inner life of Glenn Gould
03: 19 부터에 맞는 내용과 그외 참조의 글:
따뜻한 뉴욕의 6월,
굴드는 베레모를 쓰고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와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과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5개의 약병,
그리고 한 무더기의 타올을 챙겨 들었다.
게다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유명한 의자까지 글렌 굴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굴드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굴드는 이 의자에 앉아 그 특유의 연주자세를 만들어 냈다.
마치 건반 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건반을 향해 머리를 깊이 박고,
몸을 전후좌우할 것 없이 비틀어가며 움직이는 그의 연주 모습에 이 의자는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굴드는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반드시 더운물에 손을 20분간 담그고 자신이 준비해온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의 연주를 녹음하던 음향 엔지니어는 아마 세 번 놀랐을 것이다.
한 번은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야 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에,
몸을 비비틀며 연주를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놀라고,
그가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 입으로도 쉴새없이 허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계속 몸을 앞으로 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고,
그 와중에도 입으로는 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계속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반을 녹음할 때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이건 연주자가 바로 건반 위에서 입으로 허밍을 하고 있으니 엔지니어로서는 최악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었다.
굴드의 연주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오디오에도 상당한 투자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된다.
질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는 그러나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글렌 굴드의 가까이에서 연주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의 음반을 듣다보면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굴드가 현대적 녹음 시스템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기계들을 놀랄만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나벨이 베토벤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를 이용했듯이
굴드는 바흐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와 녹음을 매우 자유롭게 이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우리가 실제 듣게 되는 피아노 소리와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 데
여기에는 굴드 자신이 가벼운 터치를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굴드가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당시 기술로 가능한 음향적 가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계속...)
옥인 선배님! 글 따라 다니려니 체력관리가 필요한 것 같애요
선배님께서 올려 준 동영상을 보며 꼭 제 추억을 보는 듯했어요
토론토에서 살 때 어린 아이들 3명 데리고 다니던 거리들과 건물들 그리고 집들이 정겹게 다가와서 그런 것 같애요
그리고 선배님 표현대로 굴드의 핸섬한 모습이 꼭 울 집 옆 총각처럼 다가옵니다
늘 반가이 내 가게에 와서 물건사면 인사하는 젊은 캐너디언 모두가 다 핸섬하다고 해도 거짓이 아닌지라...ㅋㅋㅋ
선배님!
오늘도 감사했어요
사이버 공간임에도 함께 한다는 것이 참 위로가 됩니다
순정 후배! 오늘도 찾아와 주었네요.
체력관리를 할 정도로 힘들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시간 여유있을 때 읽으며 즐기기를 바래요.
저는 요즘 일부러 두문 불출하면서 이리 몰두를 하고 있어요.
다음 주에 이탈리아로 성탄휴가를 떠나는데,
그 전에 좀 정리를 하고 싶어서요....
순정후배,
젊은 캐너디언 모두가 핸섬하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라는 표현에 동감이 가는데요 ㅎㅎ
저도 처음 오스트리아에 와서 젊은 미소년과 청년들의 모습에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를 연상까지 했었어요.^^
지금도 가끔 그럴 적이 있고요.
굴드의 동영상을 보면서
젊은 시절과 마지막 시절의 모습의 현저한 차이에 가슴이 찡해집니다.
30이 되기전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여 머리중앙이 헐거워 보이는 것이...
얼마나 집중력이 필요한 예술가였을까요...
모짜르트를 그린 작가 미상의 그림에도
모짜르트 죽기 2년전 모습에서 머리가 거히 빠져 속이 다 보이는 그림이 있어요.
이 그림을 볼때마다 아직도 맘이 저르르 해진답니다.
예술에 살고 예술과 죽는 이들은 특별합니다.
순정후배 건강살피며 천천히 홈피 산책을 하세요. 안녕!
굴드는 1964년이래 더 이상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았다.
글렌 굴드가 콘서트를 포기하고 음반 녹음에만 치중했다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당시 굴드는 콘서트 현장에서도 최고의 각광을 받는 피아티니스트였다.
1957년에 글렌 굴드는 냉전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소련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다.
그의 소련 연주회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의 연주에 대해 청중은 물론 비평가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럽순회 연주기간동안 베토벤의 협주곡 제3번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음반 녹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카라얀이
음반 녹음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연주로 승화시킨 굴드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3 (Gould/Karajan/Berliner Philharmoniker, 1957)
GERMANY. West Berlin. 1957. Canadian pianist Glenn Gould and Austrian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during a rehearsal with the Berlin Philarmonic Orchestra.
Photographer: Erich
Lessing (1923- ) Austrian
1960년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다.
굴드는 1960년의 TV 출연 이전에도 이미 캐나다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유명 인물이었고, 정기적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글렌 굴드는 전생애를 통해 확고한 평화주의자였고,
그런 때문인지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상황을 주제로 한 캐나다 영화 <전쟁>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964년 4월 10일, LA에서 마지막 연주회 이후 굴드는 콘서트 연주자로서 자신의 경력을 끝냈다.
파블로 카잘스도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엔 절대로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곧잘 콘서트 활동을 중단했지만 글렌 굴드는 이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굴드는 이후 전혀 연주회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처럼 글렌 굴드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굴드는 자신의 직업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공적인 생활을 모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여러 방면의 생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방송활동, 작곡, 지휘 등 그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해보고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때 이상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생애 동안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한 기간은 10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다.
그 기간 동안 주로 바흐를 연주했는데,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에는 분명 다른 연주자의 그것과는 다른,
단순히 '파격'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굴드는 녹음 기술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채택했고,
자신의 연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당시 다른 연주자들이 느끼는 거북한 기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마 기술적인 제약만 없었다면 글렌 굴드는 신서사이저나 컴퓨터를 도입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목적을 향해가는 도정에서 채용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가 한 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1981년 다시 녹음하게 된 것은
1955년과 1981년 사이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며
골드베르크변주곡과 바흐는 바로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콘서트를 포기한 탓인지 글렌 굴드의 음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음반들이 글렌 굴드라는 명성에 걸맞는 것들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편식(그는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 그는 거의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연명했다고 한다)과 기행으로 일관한 그답게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들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그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고,
심지어 브람스의 경우에도 녹음 직전에야 겨우 연습하여 녹음에 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작곡가는 오로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고,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이 말은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명확한 설정이 없다는 점에서)
바흐 이전의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다.
굴드가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26년 전 자신이 처음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한 것도
기술적 진보에 따른 그의 도전이자 동시에 세월을 거치며
다시 마음속에 담게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글렌 굴드는 비교적 손쉽게 유럽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낸 사람이었지만,
그가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냈을 때만 하더라도
대중의 환호와 달리 일부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글렌 굴드 무대생활시의 뒷이야기^^
글렌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협연하게 되었다.
두사람은 최종 리허설에 이를 때까지 이 곡의 템포 문제를 놓고 서로의 음악적 해석과 견해가 달라서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번스타인이 굴드의 고집에 못이겨 엄청나게 느린 그의 템포에 뉴욕 필을 맞추기로 했다.
한 번이라도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보면짐작이 되겠지만 지휘대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을 만큼
힘차고 다이나믹한 지휘와 템포를 가진 번스타인이
굴드의 느려터진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4번을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Glenn Gould - Beethoven piano concerto No.4 in G major 1st movment (1/2)
결국 연주가 끝나고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지만
번스타인은 그 순간 청중들에게 다음과같이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이니,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스타인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이 굴드는 자신의 템포대로 연주한 뒤
어리둥절해하는 청중들을 뒤로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가 버렸다.
굴드는 유럽적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음악을 시작했고,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방식을 극한까지밀고 나갔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연주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다른 연주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학습기간을 보냈고,
그 기간에도 유럽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여긴 작곡가의음악을 연주하지 않았고,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굴드는 절대로 에어콘이 켜진 식당을 가려 하지 않았고, 타인과의 접촉도 최대한 피했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전화를 통해야만 했는데 전화 통화 중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감기 옮아요."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노이로제 증세는 매우 심각해서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다.
그가 이스라엘 항공사만 이용했던 까닭은 이항공사의 비행기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정비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물론 나중엔 그나마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다른 사람과의 악수도 피하고,
손을 내밀어도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하며 거절했다.
그의 이런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피아노 제작회사인 스타인웨이를 향한 3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이었다.
굴드의 피아노 터치는 매우 가벼운데 굴드 자신도 바흐 시대 악기의 특징을 염두에 둔 듯
작고 변화 없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중시했다
(피에르 앙타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OPUS111>을 들어보면 굴드가 얼마나 가벼운 터치를 위해 노력했는지 새삼 알게 된다. 피에르 앙타이의 쳄발로 연주는 고악기 특유의 매우 가벼운 터치들이 돋보이는 연주를 하고 있는데, 굴드는 피아노를 통해 이에 못지 않은 가벼운 터치를 보이고 있다).
굴드는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찾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자신에게 꼭 맞는 피아노를 발견했다.
바로 <스타인웨이 CD318> 제작번호 174번이었다.
그러나 1958년 클리블랜드 연주회 직후 운송하던 트럭이 피아노를 떨어뜨리고 크게 손상을 입었다.
굴드가 크게 상심한 것은 불문가지였고, 어떻게든 이를 재생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174번은 살아나지 않았고, 굴드는 다른 <스타인웨이 CD318>을 사용해야 했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이었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도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굴드는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공연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번스타인이 굴드와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에
무대에 홀로 나와 청중에게 말한내용이다.
그 중에서
"In a concerto, who is the boss (audience laughter) ? the soloist or the conductor?" (Audience laughter grows louder)
위의 녹음 01: 14 부분부터 ...`라는 문귀로
당시의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던 것이다.
(솔리스트? 아니면 지휘자?)
Gould, Bernstein, Brahms: 50 years ago
April 6, 1962 at Carnegie Hall; Leonard Bernstein conducts Gould
playing Brahms First Piano Concerto, after warning the audience he takes responsibility for what they are about to hear.
와우!!!!
글렌 굴드에 대해 이렇게 방대하고 자세한 것이 있을까요?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사감사합니다!!!
지난 여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만으로 연주를 한 미국의 여류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시몬 디너스틴>(Simone Dinnerstein)이라고 하는....
그녀는 반복되는 부분은 몇 개 빼고 연주를 했는데
저를 비롯해서 저와 친한 분들은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그녀가 친 골드베르크의 각종 춤곡들은 글렌 굴드와는 크게 차이를 보였기에
의아했는데
이미 우리는 글렌 굴드의 흥얼거림이 있는 골드베르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가 친 것과 차이가 나서 어리둥절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ㅎㅎㅎ
글렌 굴드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참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바흐의 피아노를 그렇게 가벼운 터치로 치면서 거기에 굵고 진정한 이미지는 다 담아내는 것.
그것이 그가 친 바흐의 곡이고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바흐의 또 다른 해석으로서 나름 아주 괜찮은 교과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귀한 포스팅!!!~~~정말 고맙습니다!!!
역시 멋지고 대단한 김옥인선배님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올 2월에 캐나다의 여류피아니스트인 안젤라 휴이트 (Angela Hewitt)가 옵니다.
그녀 역시 바흐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웁니다.
이번엔 골드베르크변주곡이 없지만 그녀가 치는 영국조곡이 어떨 지 매우 궁금합니다.
지난 연말에 저는 이미 예매를 해 놓은 상탭니다.
이제 오늘 어찌어찌 해서 로그인을 하여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기뻐요!!!
김옥인선배님~~~~반갑습니다!!!
Genius within - The inner life of Glenn Gould
An enigmatic musical poet and the most documented classical musician of the last century world-renowned pianist Glenn Gould continues to captivate international audiences twenty-six years after his untimely death. Genius Within: The Inner Life of Glenn Gould humanizes the legend, weaving together an unprecedented array of unseen footage, private home recordings and diaries, as well as compelling interviews with Goulds most intimate friends and lovers, all exploring the incongruities between Gould s private reality and his wider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