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인천은, 아니 인일은 내게 언제나 흡수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난 인천 아이가 아닌 김포아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인천에 육 개월 정도 살았고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가 통학을 했다. 고3 때는 이모네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서울로 갔다.
김포 촌아이가 처음 인일여고 입학 했을 때 동계진학을 한 인천 아이들은 내 눈에 무척이나 커보였고 여유로웠으며 모두 다 똑똑하고 공부들도 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타교생이었다.
서울로 갔을 때 서울 아이들에게는 당당하다가도 인천아이들에게는 주눅이 들었다. 인천 아이들이 기차 통학하는 것조차 좋아 뵈고 부러웠다. 인천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처음 동창회 홈피가 생겼을 때 얼마나 열심히 들락거리며 글을 쓰며 댓글을 달고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내 생활이 마비될 정도였다. 사이버 속에서는 거리가 없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서울이나 인천이나 똑같았다. 그때 잠시 나는 인천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 깊숙이 차지하고 있는 인천 아이들에 대한 열등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십대 때 타교생이며 이방인이었던 그 열등감은 화인처럼 내 가슴속에 찍혀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쓴 작품들 중 일부를 책으로 묶었다. 내 책을 본 동기 유지인이 가장 먼저 내 책에 대한 평을 해 주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의 순간에도 사랑과 이해의 실마리를 놓아버리지 말아야 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강추위 속에서도 살아남는 바위취의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는’ 평을 평론가보다 더 평을 잘 했다.
오늘 여고동창 몇몇이서 모여 점심 먹고 내 책을 주기로 했다. 거기에 선배 동문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고, 인천에서도 동창들이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동기 민정숙이는 프랭카드도 만들어 가져와 걸어주었다. 오늘 나는 비로소 인천 아이들 속에서도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인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내 작품 속에는 젊은 날 내가 그리워하고 갈망하던 인천에 대한 정서가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더 짙게 흐른다. 11편 중 6편의 배경이 인천이다. 배다리가 나오고 주안과 월미도 자유공원 신포시장이 나오고 강화도가 나온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아픔이 추억과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소설을 읽고 이렇게 행복한 게 처음인 것 같다>는 대학 선배님 말씀과 <수상한 시절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소설을 써 주어서 고맙다>는 어떤 시인의 메시지도 받았다. <그때는 고통이었으나 지금은 그리움으로 다가와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바쁘게 만>들었다는 지인이의 평까지 내게는 모두 다 큰 격려다
오늘 참석해 주신 선배님과 동기 친구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강 명희후배 소설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어제 아주 밤늦은 시간에 전 영희후배와 전화 통화중에
소식을 듣고 이 컬럼방도 들어와 보았네요.
나라는 사람은 인천사람이 김포 출신 사람을 만나 오래도록 서울서 살다
뒤늦게 김포로 내려와 사는데
친구들은 나를 "김포댁" 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글을 읽다보니 생면부지인 여고동창 후배이지만
남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김포출신인 우리집 남정네도 글쟁이란 이름으로 사는일로 일생을 건 사람이지요.
시아버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견디어 냈는데
이곳에 내려와 힘들게 세번째 시집을 출간했었답니다.
책을 출간하는일이 많이 힘들지만 보람된 일이라는것을 잘 아는지라
더 더욱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츌국하고 돌아와서 내년에 책을 구입해 읽어보아야 겠어요.
들르는 방만 홈피에서 찾아가곤 했는데
한 곳이 더 늘어 바쁘게 되었읍니다.......ㅎㅎㅎ
은희선배님! 김포댁이란 정겨운 이름입니다.
거꾸로 저는 김포사람이 인천사람 만나 인천댁이 된 사람이지요.
사부님이 시인이시군요.
시인이건 소설가건 글 쓴다는 것은 고달픈 일인 건 틀림없습니다.
김포 어디서 사십니까?
저는 지금은 걸포동이라고 하는 걸포리 사람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 하자고치면 길지요.
김포댁이 된 사연은...................
우선 우리집은 강 명희후배와 연관이 있는 걸포리에서 강화쪽으로 새로생긴 초지대교 방향으로 오다보면
대명항 못미쳐 대곶 대벽리 라는 곳 입니다.
알기로는 예전엔 벽정리라 불리웠다고도해요.
고을 원님이 이곳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소리를 귓결로 들었는데
우리집 지하수는 일급수로 광천수라고도 하네요.....아직은
수도가 들어와 있는데 잠궈두고 있지요.
김포시내쪽 보다는 청정지역 같긴한데.....모르겠어요 우리마을도 공장들이 이차선도로 옆으론
무수히 자리잡고 있으니 언제 달라질지 모릅니다.
십년전만해도 농로길에 한적한 곳이였는데 이젠 일이년이 옛말이지 싶네요.
복잡해지니 좋은점 나쁜점이 항상 부대낍니다.
좋은점은 몇년만지나면 가까운곳에 지하철 노선이 생긴다니 내 노년엔 세상구경하러 길 나서기엔
편리하겠지 싶긴해요.
실은 우리집 가장은 이곳 내려오기 전해에 일년 살기 어렵다해서
고향으로 내려왔지요...........그리고 십사년이 지났으니 고향덕을 많이 보았다면 보았지요.
우리집 가장도 청장년시절을 나름 치열하게 지냈다고 말 합니다.
보면 어느 부분이든 예술을 택한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 그러지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집 가장도
첫시집으로 선배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두번째 시집으로 김 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었지요.
모교에서 동국문학상도 수상했으니
본인 생애에 글쟁이로는 신명나게 지내던 시절이였지 싶어요.
앞으론 다시 올것같지 않은 대접을 받던 일 중엔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씨가 신문사에 문화부 기자로 있을때 쓴 인터뷰
기사가 문화면을 다 차지했던 일이였구요....
어렵게 어렵게 세번째 시집을 죽지않고 출간했을때 김훈씨가 연필로 쓴 장문의 편지를 보내주어서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걸로 압니다.
그렇게 죽을둥 살둥 하다 다시살아나서 모교의 문예창작과 강의를 다년간 맡아 했으니
김포 수안산자락 선대 조상님께 물려받은 팔십여년전 땅인 이곳
김포가 어찌 고맙지 않겠어요
강 명희 후배가 김포출신이라서 인천에서 겉돌았던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 자신도 이곳 김포는 맛좋은 쌀을 생산하는 김포평야와 김포장릉이 있다는 것 밖엔 모르는 곳이였으니까요.
김포 어디서 사십니까?
........하니........
어찌 이야기가 길지 않을 수 있겠어요....ㅎㅎㅎ
강명~!
애쓰셨네.
난 강명이 늘 보고 싶었거든
전화를 받았을때,
두말할것도 없이 OK했네.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올라 왔을때,
드디어 ~해냈구나 ~!!!
하는 마음의 갈채를 보냈었다네.
히말라야 다녀왔다고 했을 때,
가슴에 그득하게 충만함을 품고 왔을 것 같았다네
끝까지 읽어보진 못했지만 강명의 부드러운 첫인상과 너무도 일치함을 느꼈네.
연약한 듯 하면서 강인함이....
작은 가슴에 추운 겨울에 꽝꽝얼어 붙은 폭포가 하늘로 솟아 있는 듯 한 열정이....
부드러운 듯 하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이...
백록담 올라갈 때 더 높은곳에 올라갈 적 마다 나무들이
더 야트막하면서 단단하게 웅크리며 신비함을 내뿜듯이
껍질을 벗길수록 따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동질감도 느끼고 ......
어릴 적 형제들 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주머니에 넣어두고
야금야금 꺼내 먹었듯이 찬찬히 두고두고 맛나게 음미하며 읽어봄세.
모든 지나간 날들은 아름답다....
어린나이에 강명이 가슴앓이 했던것도 자양분이 되어
이소설의 진액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네.
인일여고 동문이라는 이름하에 글로만 나누다가
실제 모습을 보는것도 신기하고
얼굴도 모르는 선배를 출간 파티에 후배들이 초대해 주는것도 감사하고
여러가지 행복하고 즐거웠다네.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글 많이 쓰시게.
ㅡ강명을 많이 사랑하는 애독자ㅡ
명희야!
네 글을 읽으니 한결 내 추위도 덥혀지는구나
눈물은 눈물이 위로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생각에 눈물은 웃음이,
추위는 더위가 위로해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네
나는 김포보다 더 시골 동네인 경기도 서정리에서 인천으로 올라왔지.
근데 묘한 건 나는 명희같은 소외감은 느낄 수 없었단다
나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친구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단지 내가 고2학년 4월초부터 알 수 없는 병에 시름시름 빠져들어가
그때부터 나는 정상인들과는 다른 이방인으로 늘 양호실이나 옥상이나 탁구대나 도서관을 헤메며 다녔단다
친구들도 바뀌게 되었다
공부 잘하던 친구들이 아닌 공부보다는 삶에 흥미를 느끼는 친구들하고 놀게 되었다
그 친구들이 여전히 보고싶네
상위권에서 맴돌던 나는 그때부터 나락으로 떨어져 졸업할 때는 4??등이었단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꼴지를 했어야하는데 그 영광의 자리를 놓쳐서 늘 맘이 개운치 않지
그 후 난 고독한 투병 생활을 했고 친구들이 다 대학으로 간 그 외로운 광장에서 보스톤 대학 유학을 추진했지
그 시절엔 진짜 유학은 만만치 않았지
그래도 울 친정어머님 병약한 내가 다시 털고 일어나 유학간다니 기쁜 맘으로 여러가지로 돌보아 주셨단다
내가 인일 여고 졸업 몇년 뒤- 졸업증명서를 비롯한 성적 증명서땜시리 다시 인일교정에 들어 갔을 때 분수대가 날 잊지않고 반겨주고 있더라
그리고 날 담임해주셨던 김 선생님께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로 열심히 공부해서 휼륭한 사회인이 되라고 권면해주셨지
허나 최종 비자가 나오질 않아 못가게 되었고 결국 문학 공부는 나이를 먹어서야 할 수 있었다
무식한채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게 내게는 넘 어렵더라
실은 그리 되어야하는데.....
모든 문자들을 나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하는데 그게 참으로 어렵네
명희야!
너는 참으로 휼륭하다
너 스스로의 세계를 창작해 들어가 반듯한 문자의 세계를 일궈 낸 네가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그리고 인천여중생이 아님에도 인일여고로 널 인도해준 하늘의 섭리에 감사드리네
네가 인일여고로 안왔음 내가 너를 어찌 알게 될꼬? ㅋㅋㅋ
강작가~^^
인일인보다 더 인일인스런 강작가^^
지금 아들네 집에 와서 노인네들 새벽잠 없듯이 5시에 눈이 떠져 멀뚱대다가
컴퓨터 방에 들어와 몇자 남기며 옛날을 더듬어보네.
온힘을 다해 먹고 살겠다고 본능적으로 모유를 빨고있는손자를 보며
그 녀석이 앞으로 헤쳐갈 미래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는 이 새벽은
나름대로 희망을 떠올려본단다.
총동홈피 컬럼란을 만들어 놓고 이 곳을 어떤 필진의 글로 채우나 고심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훌쩍 10년이 지났구나.
옛날 이야기를 하는거 보면 나도 할미가 되었고 나이를 들긴 들었나보다 (선배님들께 죄송 ^^)
컬럼란 필진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인터뷰하러 다니기도 했고
이메일로 내용을 건네 받아 대신 게시판에 올려주곤 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레벨있는 글들로 채워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네.
인일 홈피 메뉴 중 가장 반듯한 공간이라고 봐도 될거야.
강명희, 유순애, 안명옥, 최순자, 김순호, 조영희 .... 임경선, 최예문, 한효순, 문정희 동문 선후배님들
초창기 컬럼란을 채워주시며 뿌리를 내리도록 동참해주신 분들이 떠오르는 새벽이구나.
시작을 함께 하며 주옥같은 컬럼을 올려주던 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는 것은 너의 소설집 출간 소식을 접하며였어.
너와 나의 만남과 인일홈피 태동은 오알지였지만 산고를 이겨내며 뿌리를 내린 것은 오알쩜케이알이 였다는 사실을
그 때는 미처 몰랐던 거야.
그러나 당시 분명한 신념들이 있었지
너나 나나 사이버의 미래, 인터넷을 힘을 다른 사람들보다 일찌감치 깨닫고
그 엄청난 세계로 풍덩 빠지며 온갖 역경을 헤치며 의기투합했던 거 정말 대단한 스릴이었고 모험이었어.
10년 지나 지금 돌아다 보니 우리는 사이버 한 구석에서 날밤세우기를 밥먹듯하며 수소폭탄제조를 했던거더구나.
거기엔 광희도 함께 동참했었지.
예견했던 것 이상으로
인일쩜 오알쩜 케이알이라는 사이버는 성장을 했고
우리도 더불어 세월을 보듬어 옛날 이야기를 할 수있으니
그래서 더 고맙고
그래서 더 기쁘단다.
길치인 나는 네비가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백운호수에서 아들네 집을 올 때도 이리저리 헤메다가 왔어.
낯선 곳을 가는 것은 내게 항상 긴장된단다.
김포에서 어린 나이에 인천으로 유학을 올 때 너의 마음이 얼마나 긴장되었을까 ...
언젠가도 일부 친구들이 인천여중 나오지 않은 동기들을 이야기 할 때
타교생타교생 꼬리표를 달아 대화하는 것을 들은 적 있어.
어느 나이가 되면 배운N도 못배운 N도 다 똑같더라...라는 인터넷 유머도 있는데도 말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보란듯이 타교생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하게
인일인보다 더 인일인스런 모습으로 우뚝 우리들 앞에 섰네.
자랑스럽구나 친구!!
더욱 건필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