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가 아직 열린다 1, 2003. 10. 4    아침 햇살 맞으며 찍음




텃밭에 나가 오이를 딴다.

오늘이 벌써 10월 4일, 한가을 아침 햇살은 너무나 강렬하고 들판의 풀잎새들 이미 아래밑둥부터 갈색으로 말라오르기 시작한지 오래고 밤나무 아름 들은 밤송이 툭툭 떨어져 내리기도 다 한지 한참이건만 아직도 오이는 열리고 여물어 내게 제 몸을 준다.
이미 말라 비틀어진 잎새들 사이를 헤집어 질긴 줄기 비비틀어 오이를 따내느라면 목욕탕에서 쉽게 마주치던 연세 많은 노인네들의 말라 축 늘어진 젖가슴새를 연상시켜 문득 미안하고 송구하다.

고추, 오이, 저녘 짓다 생각나면 쪼르르 ...달려나가 툭툭 하나씩 따가져와 찌개도 끓이고 뚜걱뚜걱 썰어 상에 내어 씹으면 그 맛이 얼마나 풋풋할꼬...생각만 해도 짜르르 하게 좋아서 작년 봄 고추모종들과 함께 오이 몇 포기를 심었었다.
흐뭇하니 오이 딸 생각에만 취해서 지켜보고 있자니 키가 하루가 다르게 커올라 바람불 때마다 설렁설렁... 안 되겠다 싶어 고춧대 박아주고....그러다가 1m 쯤 되는 고춧대 위로 넘실거리는 잎사귀, 넝쿨들에 깜짝 놀라 다시 대나무 뚜걱뚜걱 톱질해 기둥을 높여주었는데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 세 번째로 기둥 높여주는 작업을 하여야 했다.

밑에선 쉼 없이 풀 자라 올라오지, 좌우상하로는 오이덩쿨과 줄기가 정신없이 뻗어 출렁거리며 지들끼리 얽히고 설키는데 오이를 먹을 줄만 알았지, 한번도 열리는 것 본 적 없던 나는그저 심어두면 무릎 아래로 주렁주렁 열리겠지...방심하고 있다가, 나중엔 아예 좁게 벌려놓은 이랑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 수 조차도 없이 되었었다.
그렇게 쑥쑥 자라나는 뒤치닥꺼리에만도 허덕거려 첫해 농사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오이 자라듯 한다'는 옛말은 하나 틀린 거 없다는 한가지였다

올해는 모종 사다 심기는 남들보다 다소 늦은 5월 초이긴 했으나, 깊게 삽질한 흙은 떡쌀처럼 부드러이 부수어 퇴비도 넉넉하니 섞어두고 두 고랑 사이는 넓게 벌려 한 고랑에 6 모종씩을 줄 맞춰 심었다. 모종 심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사관 생도 의장대 사열하듯 멋지게 버팀대도 세워 만반의 준비를 갖췄었다.
그 후로는 가끔 풀 뽑아주고, 흘러내린 넝쿨이며 줄기, 위로 올려 버팀목에 걸쳐주고 한 것 밖엔 없는데 오이는 올여름 내내 푸르고 싱그런 오이를 쉼없이 우리에게 내주었다. 늘어지면 늘어진 대로 땅 위에 누운채로라도 열매는 자라고, 줄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서도 열매는 자라나 내게 말했다. '나를 따렴".

뚜걱 하나 잘라다 방울 토마토랑 접시 위에 올려 싱그러움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때로 송송 썰어 묵도 무치고 -오이 피클도 질리도록 해먹었다, 여기저기 병에 담아 선물도 하면서- 제때 못 따 노랗게 익기 시작한 오이는 아예 진한 소금물 푹푹 끓여 오이지도 담궈먹고...한여름을 장에서 오이 한번 안 사고 그렇게 잘 먹고 지냈는데 그 긴 비와 태풍을 지나 이 가을 한가운데 이르도록 아직도 열두 그루의 오이는 자기 몸을 내어 자꾸 나를 염치없게 만든다.

참, 그러고보니 올해 여든 하나 되신 내 어머니는 요즘도 전화를 하시면 여기 시골서 오두막히 사는 딸네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번 김장때도 와서 도와주겠노라 벼르신다. 늘 미덥지 않고 걱정만 끼쳐드리는 딸이다. 이제는 입장이 바뀔 때도 되었건만 내가 드리는 어머니의 안부는 건성이고, 어머니가 물으시는 내 안부엔 늘 어머니의 진심이 묻어나서 가슴이 메인다. 그럼에도 어쩌랴, 오이가 서운할 것 같아 그 마른 가슴패기에서 오늘도 오이를 비틀어 따고, 응석부리는 딸이 편안하시겠거니 싶어 여든 넘으신 어머니의 걱정을 자연스레 받는다. 그리곤 그저 '고마워...' 하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할 뿐이다.

오이야, 이제 그만 편히 쉬렴
올 여름내, 가을내 정말 애썼고 고맙다.
그리고
알아, 나 지금껏 살아도 내 힘으로 산게 아닌 걸...다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나누어주는 모두가 고맙고 감사해.


오이가 아직 열린다 2,  2003. 10. 4    아침 햇살 맞으며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