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운영하는 서점에 초등학교 오 학년쯤 되는 아이가 와서 사랑에 관한 책을 찾았다.
너무 막연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원하는가 물었더니 그냥 사랑에 관한 책을 달라는 것이다.
나는 책을 고르며 좋아하는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네’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별로 예쁘지 않은 아이는 몹시 들떠 있었다.
막 사랑에 눈 떠가는 아이를 보면서 저 아이도 언젠가는 사랑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롭거나 황홀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십을 눈앞에 둔 나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사랑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마냥 희생과 아픔이 동반되는 두렵기만 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모 신문의 만화 스토리로 썼던 적이 있다.

그 작품이 나가고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까페에서 항의를 많이 받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과 힘을 가진 신비로운 사랑을 어둡게만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이면에 파괴와 고통을 갖고 있는 아주 이중적인 것이다.
단지 사랑 하나 얻기 위해 부모도 제물도 권좌까지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마귀같은 곤충은 단 한 번의 사랑을 하고 기꺼이 암컷에게 잡혀 먹히기까지 한다.

젊은 날 나를 들뜨게 했던 소설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었다.
거기에서 주인공 소년이 동네 노인에게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다.
노인은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며 대답한다.
소년은 다시 한 번 되묻는다.
그러자 노인은 말한다.
이 세상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라고….

얼마 전에 베스트 샐러였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의 작가는 물을 가지고 희안한 실험을 한다.
물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또 반대로 욕을 하고 변화하는 물의 결정체를 사진으로 찍어 놓은 책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놀랍게도 물의 결정체는 맑고 아름답게 변하고 욕을 했을 때는 탁하고 어둡게 변했다.
사람의 몸은 70프로가 물로 되어 있으니 세상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어쩜 당연한 진리인지 모른다.

내가 영화에서 본 가장 아름답고 숨막히고 참혹한 사랑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영국인 환자)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한참까지, 아니 지금까지 영국인 환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파국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어쩔 수 없는 사랑이다.
영화는 사랑의 고통을 화상을 당하고 사막 한 복판에서 누워 죽어가고 있는 영국인 환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환희와 고통이 함께 자라고 있다.
환희가 클수록 고통도 크다.
사랑은 꽃처럼 반드시 지고 만다는 속성을 가졌다.
혹자는 내 만화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항변할 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권태에 의해 서서히 변질이 되기 때문이다.
권태는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일상 한 모퉁이에 녹같이 끼어 번식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