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던 해 태어난 고모는 이십대 젊은 날을 눈물 속에서 자랐다.
고모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오빠들 밥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시골에 내려오면 할아버지에게 학교 보내달라고 울었다.
쌀을 팔아 남자들 공부시키는 것도 허리가 휘는데
여자를 공부시킨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고모는 시골 고등학교만 나온 5급 말단 공무원과 결혼을 했다. 
신혼 살림은 방이 두 개인 9평 아파트, 거기서 방 하나를 빌려 차렸다.
연탄 화덕과 신발장이 있는 곳에 부엌 살림을 놓고
공동 화장실과 공동 세탁장을 이용했다.  
그 후 주택 방 한칸으로,
더 형편이 나아졌을 때는 주택 이층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 둘을 낳았다.
아이들 키우며 야쿠르트 배달을 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아모레 화장품 수레를 끌고 다니며 
아파트 집집을 두두리며 화장품을 팔았다.
처녀 때 우리는 고모에게 화장품을 사 썼다.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500명 중 100등을 한 성적표를 받아왔다.
고모는 깜짝 놀랐다.
잘 먹고 잘 사는 아이들 틈에서 그만큼 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고모는 성적표를 들고 다니며 자랑했다.
아들은 70등을 하고 50등을 하며 점점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우리는 성적표를 가지고 다니며 자랑하던 고모를 기억한다.
이상하게 두 아들들 성적이 끝없이 올랐다.
큰 아들은 연대를 작은 아들은 서울대를 들어갔다.
지금 큰 아들은 kbs 간판 pd가 되었다. 
같은 대학에서 열열히 연애를 하여 결혼을 한 며느리는 MBC 유명 엥커가 되었다.
서울대 나온 작은 아들 역시 서울대 약대 나온 아가씨와 결혼을 하여
미국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다.
고모는 연대 나온 큰 아들 내외와 서울대 나온 작은 아들 내외를 거느리며 행복하게 사신다.

고모의 신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소파 수술을 하면 아파트 우선 분양권을 주었다.
고모는 두 아이 낳고 수술을 했다.
그렇게 장만한 집을 세를 주고 그 전세금으로 13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고모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13평 아파트에 살았다. 
30년이 지난 후 지금까지 고모는 소파 수술하여 분양받은 그 집에 살고 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싯가 20억이 넘는 60평 짜리로 변했다.
마치 고모의 인생이 지금같이 변한 것처럼...


고모를 보며 생각해 본다.
작달막한 키에 이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고모.
오빠들 뒷바라지 하며 
자짓하면 집안에 천덕꾸러기가 되었을 고모의 삶의 무기는 무엇인가. 
노력이었다.
첫째도 노력이고, 
둘째도 노력이었다. 

고모는 우리 집안의 신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