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아버지는 젊은 날 땅 한 뺌 없는 소작농이셨다.
일제 시대에는 열 말의 수확이 있으면 지주에게 일곱말을 가져다 주는 3.7제였다.
후에 반반씩 똑같이 나누는 병작제가 되었고
지금은 지방마다 다르지만 김포는 4가마니 나면 한가마니를 지주에게 준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연명을 하는 정도였다.
배 골아 죽기도 하는 세상에 그래도 소작할 땅을 얻을 수만 있으면 입에 풀칠을 하며 연명은 할 수 있었다.
소작인들은 땅을 얻기위해 지주 눈치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많은 땅을 소작하셨다.
할아버지가 지주에게 땅을 얻는 방법은 간단했다.
비료도 없는세상에서 여름에 퇴비를 많이 만들었다.
이듬해 퇴비를 써서 농사를 지으면 수확이 많이 났다.
할아버지는 수확한 것을 지주와 약속한 대로 정직하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지주는 할아버지가 힘이 닿는 데까지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여섯 딸 둘을 두셨다.
걷기 시작하면 논으로 밭으로 나가 놀았다.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들로 나가 열심히 일 했다.
자식들은 모두 훌륭한 일군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벌판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작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이 세워졌다.
이북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공산당 방식으로 토지개혁이 된다.
남한는 경자유전의 원칙아래 무상몰수가 아니라 유상몰수였다.
그때 몇몇 지주의 땅이었던 벌판이 약간의 토지값을 지불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졌다.
태백산맥을 읽어보면  지주들이 땅을 나누어주지 않으려고 온갖 불법을 쓰는 것이 나온다.
그러한 이유로 역사학자들은 토지개혁을 실패한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이 불법이든 그렇지 않든 농민들의 소유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 벌판에서 토지개혁의 최대 수혜자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사십 대 후반에 대농이 된다.

할아버지는 공부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꼴 한짐(풀 한 지게)베어  와야지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책가방을 메고 밭으로 가 일을 했다고 했다.
일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책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아버지 형제들은 할아버지 몰래몰래 공부를 해 가뭄에 콩나듯이 대학생이 드문 벌판에서
모두 대학을 그것도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을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놀이가 따로 없었다.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며 놀았다.
모를 내고 밭을 매고 볏단을 날랐다.
식구들이 힘이 닿는 데까지 힘껏 일했다.
가을이면 마당가에 집채만한 노적가리(벼를 저장하는 창고)가 만들어졌다.
봄이면 그것을 헐어 방아를 찧었다.
가을보다 봄은 쌀값이 더 많이 비쌌다.
반면 대학 등록금철이면 싼값에 좋은 땅이 많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쌀 판 돈을 허리춤에 차고 땅을 사러 다녔다.
한 때는 할아버지가 벌판 땅 다 살 거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할아버지는 벌판에 신화가 되었다.

나는 몇년 전 인터넷 다음 컬럼에 김포식 교육이라는 글을 연재했었다.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이라는  것이 내 컬럼의 주제였다.
할아버지와 고모와 사촌들의 교육방식을 예로 들었다.
머리가 결코 좋는 것도 아닌 집안에서,
갖은 것이 있지도 않았던 집안에서,
도시로 흘러들어와 뿌리내려 살며 교육 시키던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 집안의 특유의 교육방식을 나는 김포식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