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길에서


잉크빛 콩꽃이 피어납니다. 
일찍 나온 것은 푸른 실오라기 같은 콩꼬투리를 달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콩순 딸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매정하게 뚝뚝 따 줘야 가을에 콩이 잘 여문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요.

아침 산책길에 밭이 있습니다. 
완두콩이 익고 상추가 가득 퍼져 밭고랑까지 뒤덮었습니다. 
작년에 당신과 가꾸던 밭에서도 저f런 야채들이 자랐지요. 

당신이 가시고 난 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우리가 가꾸던 밭을 남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끼리 무언가 심을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당신 없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드리워주신 그늘이 너무 컸습니다. 
그늘이 사라지자 바로 뙤약볕이었습니다. 
한때는 안락한 당신의 그늘이 싫어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때도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 그늘의 안락함에 젖어 안일하게 오십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이 오십에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혼자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뙤약볕에 살이 붉게 타 들어가도, 
비바람에 온 몸이 젖어도, 
한파에 손과 발이 꽁꽁 얼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도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어야 할 때임을  느낍니다.

어머니가 동생집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물건들을 정리했습니다. 
물건 하나 하나에 배어있는 당신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엄마는 포도주를 찾았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포도주를 찾으시는 어머니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당신이 쓰시던 찻잔과 입으시던 코트와 카디건을 따로 모아놨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장만하여 오늘까지 쓴 접시가 있더군요. 
그것도 제 짐 속에 넣었습니다. 
그런 걸 가져다가 무엇에 쓰냐? 어머니가 물으셨습니다. 
시장에 가면 좋은 물건들이 많이 있는 거 알아요. 
허지만 이것은 아버지 생각하며 쓸 거예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나머지 물건들은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게끔 밖에다 내다 놓았습니다. 
당신의 몸은 이미 흙으로 변했고 당신이 쓰던 물건들도 뿔뿔이 흩어져 없어질 테죠. 
그렇지만 당신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어느 날 우리 모두는 당신을 닮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몸 속에 당신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가지 않으시었습니다. 
우리의 몸 속에서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가면 내 아이들의 몸 속에서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 몸속에서 
그렇게 당신은 영원히 사실 것입니다. 

어머니 이사 날을 월요일로 정했습니다. 
이제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그날 우리는 모이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계신 곳을 갔다가 올 작정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손수 가꾸시던 밭에 갈 것입니다. 
밭 둘레에 뽕나무가 있지요. 
오디를 따자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술을 담그자고요. 
당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에게로 달려 갈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오디주를 마실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나 함께 했던 그 많은 시간 중에 좋지 않았던 추억도 있으련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추억만이 한도 없이 피어오릅니다. 

지금 상추밭을 지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당신을 닮은 것입니다. 
가시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할 때면 눈시울을 붉히던 당신이었습니다. 
우리도 죽는 날까지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