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와 아버지는 천생연분이었던 것 같다.
두 분은 얼굴도 못 본 상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육이오가 났다.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입대를 하고 스물 둘의 엄마는
얼굴도 익히지 않은 시댁 식구들을 쫓아 여기저기 피난을 다녔다.
엄마가 과부 팔자가 아니어서인지 소위로 맨 앞에 서서 싸웠던 아버지는
살아 돌아와 다시 대학을 다녔다.

엄마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나왔다.
반면 아버지는 서울대학을 나와 동기 중 출세가 가장 빨랐다.
몸이 아파 늘 골골하던 엄마가 아버지에게 못 미치는 것 같아
젊은 날 나는 늘 마음을 조아렸다.
다감한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때는 만일 아버지가 엄마를 배반하더라도 아버지를 용서하리라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나 자신도 많이 배우고 근사한 엄마를 갖은 애들을 부러워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엄마를 배반하지 않았다.
남자가 첩을 두어도 큰 허물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여준 사랑이 화제가 되고 있다.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거의 24시간 엄마와 함께 지냈다.
두 분이서 함께 밥을 끓여 드시고 종일 같이 앉아 텔리비젼 보셨다.
꼭 소꼽장난 하는 것같았다.
그러다 심심할 때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옛날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당신이 김포에서 제일 똑똑하고 제일 열심히 일했어. 당신만큼 훌륭한 사람은 김포에 없어."

아내로부터 완벽한 믿음을 받던 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외출했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애들이 엄마 찾듯
언제나 큰 소리로 여보! 하고 불렀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몸이 아플 때는 엄마를 종일 힘들게 했다.
그리고는 제 정신이 들 때면 내가 몸이 아파 그러니 당신이 이해해 줘.
하며 사과했다고 한다.

" 당신이 애들 잘 키워주고 나를 평생 밥 해 주어서 고마워.
나 죽으면 당신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거 다 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

가시기 직전까지 혼자 남아 당황할 엄마 걱정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아파트 한 채와 거액이 든 예금통장을 남겼다.
이자만 가지고도 평생 살 수 있게끔 해 놨던 것이다.

아버지가 영안실에 안치되던 날 엄마는 충격으로 그 병원 3층에 입원을 했다.
영안실에 조문 왔던 친지들은 엄마의 입원실을 들렀다.
사람들은 엄마의 손금을 보기도 하고 관상을 보기도 하면서
미망인이 된 엄마를 위로하기도 하고
졸부가 된 엄마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제 엄마가 퇴원을 했다.
아들네로 가시겠다더니 번복했다.
당분간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에 들어서며 엄마는 말했다.

" 아버지가 저 방에 주무시고 있는 것 같애.
느이 아버진 돈을 달라면 한없이 줬어.
저녁이면 자리가 따뜻한 지 꼭 와서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곤 했었지.
무정한 양반 날 버리고 혼자만 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