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솔바람 소리

                                                                                                                                                                         박찬정

 

    교실 안은 서먹한 분위기다. 제 옆의 짝보다 같은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더 가깝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중학교 동창을 찾아 다른 반으로 원정을 가서 회포를 푸는 아이들도 있다. 복도에서 서로 맞잡은 두 손, 눈물 없는 상봉 모습도 흔히 보는 풍경이다. 둘째 줄 내 자리 주변 아이들의 출신 중학교는 전부 다르다. 내 짝은 영화여중, 앞자리 둘 중 한명은 인성여중, 한명은 군산에서 유학 왔다. 뒤의 두 명은 각각 인화여중과 소사(부천의 옛이름) 중학교 출신이다. 반 전체 구성원이 다 그렇다. 낯이 설 듯 타이 매는 것도, 검은 쉐타에 흰 데토론 깃을 다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그 해 서울과 부산은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추첨제로 바뀌었다. 서울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던 지방 수재들이 인천으로 대거 몰려왔다. 안양, 수원, 의정부 등 경기 일원은 물론 홍성과 군산, 상주에서도 왔다. 다 기억조차 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에서 전교 1,2등 하던 공부의 신이었다. 어차피 대학 진학은 서울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울 가까운 인천 명문고에 온 것으로 짐작한다. 혼자 자취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교 가까이에서 하숙을 하거나 친척집에 있거나 형제가 같이 있기도 하고, 할머니가 손주들 밥데기로 올라 온 경우도 많았다.


    경희는 군산에서 올라와 언니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경희네 집은 군산 근처 옥구군의 대농가라고 했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격인데다가 우리에겐 낯 설은 전북지방 사투리를 써서 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 했다. 곡창지대 대농가에서 객지에 나가 공부하는 딸들에게 쌀을 감질나게 보낼 리 없는데 사흘이 멀다 하고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왔다. 아침밥도 굶었다고 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 한 이유는 늦잠을 잤거나 연탄불이 꺼졌거나 둘 중 하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연탄불이 꺼져서 밥을 지을 수 없었단다. 경희는 그런 날이면 매점에서 <커플> 빵 두 개를 사다가 먹으며 하루 허기를 때웠다. <커플>은 식빵 두 장 사이에 딸기잼이 찔끔 발라진 샌드위치 빵이다.

    이 나이 먹어 돌이켜보니 그때 도시락 나눠 먹을 생각을 왜 안 했는지 후회된다. 지금 같으면 절반을 덜어주거나 도시락과 빵을 바꿔 먹기도 할텐데, 그때는 왜 모른 체 했을까. 인정머리가 없었던가. 모두들 도시락 하나로 온종일 버텨야 하니 앞자리 아이의 배고픔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나 보다. 지렁이 갈비뼈도 씹어 먹을 열여섯 살 나이 아닌가. 경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다시 인연이 닿으면 그때 나누지 못한 밥 인심을 마음껏 나누고 싶다.


    진숙이는 의정부에서 통학했다. 새벽 다섯 시 의정부 가능동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의정부 터미널에서 종로5가까지 오는 버스로 갈아탄다. 종로 5가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로, 서울역에서 동인천까지 경인선 기차를 탄다.   매일 왕복 여섯 시간 차를 타는 원거리 통학길이다. 1 여름방학(1974815)때 지하철 1호선과 전철이 개통되었다. 2학기부터는 갈아타는 횟수와 시간이 조금 줄었지만 학교 오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다. 종점에서 타고 종점에서 내리는 버스와 전철이 진숙이에게는 달리는 공부방이었다. 그때 통학길 흔들리는 차 안에서 공부한 것이 밑천 되어 교육 현장의 수장으로 현역이다.


    인일여고 수업 열기는 중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뜨거웠다. 수학 시간이면 나는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문제를 들고 와 선생님을 당황시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수업 마치고 나가는 선생님을 뒤쫓아 가서 미처 못 푼 문제를 묻곤 했다. 두세 명이 몰려가 제 문제를 들이미는 바람에 선생님이 복도에서 쉬는 시간을 다 보낼 때도 있었다. 3때 바짝 공부해서 겨우 들어 온 나와는 공부하는 범위가 달랐다. 중학교 때는 중상(中上)이던 등수가 고등학교에서는 중하(中下)에서 맴돌았다. 웬수같은 시험은 왜 그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다른 학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보면 되는데 인일여고는 매달 시험을 친다. 게다가 느슨해진 마음 졸라매게 하려고 소풍이나 수학여행 다녀오면 곧바로 시험, 합창대회 끝나면 바로 시험이다. 십대 아직 피지도 못한 청춘이 시험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시험 치고 나면 얼마간은 마음 느긋하다. 노래 잘 하는 친구가 앞에 나가 노래를 가르치면 우리는 따라 불렀다. 명가수는 반마다 장르별로 있었다. 지금도 흥얼흥얼 따라하는 올드팝은 그때 다 익힌 것이다. 막간을 이용해서 하는 선생님이나 남학교 인기투표는 우리가 잠깐씩 웃고 즐기는 오락 중 하나다.   그런 시간은 감질나게 짧았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시험 일자를 발표하면 우리는 매달 있는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빵빵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시험 날짜가 발표되면 공부를 하든 놀든 엎드려 자든 뇌 해마는 시험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수업이 끝나도 도서관으로 향하거나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한다. 창밖은 어둠이 짙어지고, 수학 문제는 짜증나게 안 풀리고, 뱃구레에서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 통일동산 솔바람 소리는 왜 그리 을씨년스럽게 들리는지. 나는 지금도 솔바람 소리가 한가한 신선놀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어두운 창밖과 시험 공부의 지겨움과 그 시간쯤의 허기와 졸음이 겹쳐서 각인된 탓이다.


    졸업 30년 홈커밍데이를 마친 다음날 모교 방문 일정이 있었다. 나는 중, 고등학교 6년을 그 교정에서 보냈다. 나 혼자였다면 기억 속에 있는 곳곳을 꼼꼼히 둘러 보았을텐데 우루루 몰려다니느라 그리움을 다 더듬어 보지 못 했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흘렀다. 버스를 타고 동인천에서 내려 눈 감고도 갈 수 있던 길인데 지금은 단박에 인일 교정을 찾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입학 기념으로 심은 해당화는 아직 있을까. 등굣길, 숨이 깔딱 넘어가게 올라야 하는 무수한 계단. 그 아래 모퉁이에서 가끔은 우리의 후레아 치마 속을 힐끔거렸을 후박나무는 어찌되었을까. 동산 솔바람 소리는 여전한지. 그리움이 꼬리를 문다.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난 지금 너무 멀리 와 있다. 오늘밤 꿈결에 더듬더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