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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 딴 섬

                                                                                                                                                                         ?


    병실 문은 늘 활짝 열려있다.

수시로 돌보는 이들이 드나든다.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머니와 같은 치매 노인들이다.

여기에 오시기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셨다.

다리 힘이 빠지지 않으려면 바깥바람을 쐬며 열심히 걸어야 한다고 간곡히 권했다.

하지만 추워서, 더워서, 바람이 불어서 등 어머니의 핑계는 나날이 늘어갔다. 

 종일 말벗할 사람 하나 없으니 오죽이나 따분하실까마는 자신의 집을 떠나면 큰 일이 나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나다니지 않자 친정 동기간들이 드나들더니 그마저 오래 이어지지는 못 했다.

같은 이야기를 연거푸 하는 어머니의 돌림노래가 듣기 지루했던가 보다.

정상적인 통화는 아니더라도 유선전화만이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이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인이라서 그러려니 여겼다.


    어머니는 눈에 띄게 총기를 잃어갔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하고, 공연히 욕설을 뱉고, 하소연도 하셨다.

버럭 화를 내셨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지고, 죽을 지경이라고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하셔서 놀라 허둥지둥 가보면 오히려 왜 왔냐고 멀뚱히 쳐다보셨다.

가족들과 감정의 교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앉으신 어머니는 별의별 엉뚱한 이야기를 다 꾸며 내셨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본 사람은 모두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치매를 걱정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어디가 어떻단 말이냐.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이대로 자유롭게 놔두라며 역정을 내셨다.

자식 집으로 가자고해도 동기간의 집으로 가자해도 한사코 마다 하셨다.

요양병원 말을 꺼냈던 시누이는 어머니의 역정에 쫓겨나다시피 돌아갔다.

어머니가 자신의 집에 살고자 고집하는 까닭을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에게 집은 살아온 흔적이고, 피붙이들이 모여드는 둥지며, 먼 길 떠나는 날 편히 머리 누일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 곳을 두고 이름조차 생소한 요양병원으로 내모는 자식들이 서운하고 노여웠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것을 고립된 외딴섬에 갇히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 연세에 낯선 것들과 부딪혀야 하는 것이 감당하기 싫고,

동기간이나 자식을 볼 수 없으리라는 단절된 외로움을 두려워 하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입원할 요양병원이 어머니가 사시는 이 도시에 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어머니에게 각인된 요양병원은 여전히 외딴섬에 있다.


    삼 년 전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집을 짓는 동안 여러 번 왔었지만 밤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창밖은 칠흑같이 어둡고, 바람이 마른 가지를 흔드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이전에 흔히 듣던 위층에서 물 내려오는 소리나 아이들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고요다.

멀리 보이는 간선도로로 뜸하게 오가는 차량의 불빛이 고립감을 잠깐씩 덜어 주었다.

달도 뜨고 별도 떴을 텐데 어둠이 낯설어 밖에 나가 볼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전깃불마저 없었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

남편과 나, 그리고 집 짓는 동안 톱밥 먼지를 뒤집어 쓴 작은 라디오가 사람 소리의 전부다.

그 외의 세상과 소통하는 문명의 기기는 아직 풀지 못한 이삿짐 속에 들어 있다.

밖의 어둠이 영영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을 잊으려고 이른 잠을 청했다.


    낮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아 세상과 단절된 것은 잊고 지냈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컨테이너 선박에 실려와 그 동안 박스째 쌓아 두었던 짐이 집안에 가득했다.

박스에 적힌 대로 각자의 짐을 분리해 놓고 하나씩 풀었다.

집 짓는 동안 많은 것을 꺼내어 썼어도 그의 박스에는 열 때마다 공구며 작은 기계들이 꼼꼼히 포장되어 들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런 것들을 사 모으며 은퇴하면 고향에 집을 짓고 살자고 했다.

남편에겐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이나 내게는 낯선 곳일 뿐이어서

나는 아이를 핑계 대며 한 해 두 해 그를 주저앉혔다.


   집터로 마련해 두었던 이곳은 그가 두 살 되던 해 떠났던 고향땅이다.

나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학교를 같이 다닌 동년배 친구는 없다.

고립무원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늘그막을 보내자고 그토록 성화를 했던가.

고향에 돌아왔고 집을 지은 것으로 꿈 한 가지는 이루었다.

아직도 열지 않은 박스 안에는 이제부터 이루고자 하는 그의 꿈이 들어 있다.

남편은 천천히 자신의 꿈을 이루겠지만 그 꿈이 세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알 수 없다. 

 세상과 연결되는 선은 아직 이어지지 않았다. 외딴섬에 갇힌 느낌이다.

사흘째 되는 날, 가슴에 통신회사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 서너 명이 오더니

접시형 안테나를 세우고 케이블을 이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젊은이들이 화면 가득하다.

이어서 전화와 인터넷이 개통되었다. 눈이 트이고 귀가 열렸다. 세상과 연결되는 숱한 선이 이어졌다.

비로소 외딴섬을 벗어나 왁자지껄한 문명의 세계로 돌아왔다.


지금 내가 사는 거제도를 외딴섬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뭍으로 통하는 다리가 양 갈래로 놓여 있어서 섬이라 말하기도 무색하다.

굴지의 조선소가 장평만과 옥포만에 들어선 후 외지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인구는 이십만 명을 넘는다.

외딴섬은 소통 없고 마음 둘 데 없었던 내가 둘러 친 비좁은 울타리 안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집 떠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이 병세는 점점 더 나빠졌다.

수차례에 걸친 설득과 선의의 거짓말까지 보태어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환자복으로 갈아 입혀놓고 돌아올 때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식사는 하셨을까, 가스 불을 켜 놓고 잊고 계신 것은 아닐까, 넘어져서 꼼짝도 못 하고 계신 건 아닌지

하는 걱정에서 놓여났을 뿐 어머니에게 나아진 것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안 하시던 이상한 행동까지 하며 일종의 시위를 하셨다.

아무나의 옷소매를 붙잡고 집에 데려다 달란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병원 측에서는 적응기간 동안 보통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랴.

나는 어머니 면회를 가면 일부러 호들갑을 떤다.

"아이쿠  우리 어머니 !  밥도 안 하시고, 빨래도 안 하시니 신수가 훤해지셨네.

어서어서 나으셔서 다음 달엔 집에 가십시다."

어머니의 얼굴에 어렴풋한 화색이 돈다.

하지만 그것이 빈말인 줄 아는  내 마음은 한없이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