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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아픈 역사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전쟁 중에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편안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거저 된 일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덕분입니다.

호국보훈의 달 6,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떠난 순교자들을 생각합니다.

 

* 비겁하게 살지 않고 의롭게 죽은, 도복일 목사

아버지가 3.1운동으로 고문당하는 등 믿음의 집안에서 자란 도복일 목사는

1949년까지 당진교회를 비롯해 지역의 여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6.25사변이 터지자 부여로 피난했던 도목사는

"여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으니 비겁하게 살지 말고 차라리 의롭게 죽읍시다."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결국 도복일 목사는 9월 초에 가족을 이끌고 삽교 교회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교회를 돌보고 남은 교인들을 살피며 위로했다.

그러던 중에 유엔군의 활약으로 공산군이 물러났고,

후퇴하던 공산군은 남쪽 지도자들을 나포해 가면서 36세의 도목사도 체포해

삽교천 둑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195092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 공산당을 비판하다 불길에 휩싸인, 배영초 전도사

해방 후 공산주의 치하에서 교회사역이 힘들던 때,

스스로 목회지로 나가겠다고 자원한 젊은 목회자가 있었다.

농촌운동을 하며 공산주의의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알게 된 배영초 전도사였다.

19465,

배전도사는 공산당 정보 요원들에게 끌려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

, 진남포 유치장에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어차피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을 바에는 일선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며 저들과 맞서 싸우겠다.”며 사역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 당시엔 사상적 갈등으로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고,

폭력 앞에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분을 느낀 그는 목회 현장에서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50, 6.25사변이 일어나자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배영초는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해 10,

공산당은 패주하면서 형무소에 불을 질렀다.

배전도사도 43세의 나이로 불에 타서 순교했다.

  

* 예수 믿는 독한 놈, 임광호 전도사

6.25 동란 중에 공산당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던 임광호 전도사는

삼례 하리 바위 밑에서 순교했다.

그가 섬기던 하리 성결교회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로 나올 만큼 부흥되었다.

그러자 공산당은 그를 지서로 불러가서 조사하고 풀어주기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하며 협박했다.

1950710,

느닷없이 공산당들이 교회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런닝셔츠 차림으로 일하고 있던 임전도사를 다짜고짜 잡아다가 치안대 독방에 가두었다.

하지만 임전도사는 의연했다.

면회 온 아내에게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의 안부를 물었다.

며칠 후에 다시 면회를 가보니 임전도사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의 죄목은 예수 믿는 독한 놈이었다.

공산당은 이런 놈은 총알이 아까우니 몽둥이와 삽과 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고 협박하며

예수 안 믿고 공산당에 협조하면 당장 살려주겠다.”고 회유도 했다.

그러나 임전도사는 오히려 당신들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라.”

더 강하게 공산당들에게 전도하다가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임전도사를 죽인 공산당은 김복순 사모도 붙잡아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남편을 살려주겠다.”며 거짓말로 협박했다.

그러나 사모는 굴하지 않고 외려 전도했다.

그녀의 눈을 가리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목에 총을 들이대고 3일 동안 위협했지만,

사모는 끝까지 견디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순교한 남편을 대신하여 하리교회를 맡아 2-3년 동안 목회를 이어나갔다.

  

이분들 외에도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민족의 풍파와 가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만 믿고 살다 가신 순교자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킨 분들을 본받아

우리도 믿음의 허리띠를 바짝 동여매야겠습니다.

 

                                                                                                         김 희재 권사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