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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뉴스 시간이었다.

울먹이면서도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흑인들의 차분한 모습과

넋이 나간 듯 멍한 백인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란히 잡혔다.

투사를 자처했던 백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자기를 용서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에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흑인들의 눈빛은 달랐다.

온유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모습은 뉴스 시간마다 계속 방영되었다.

유족들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백인뿐만이 아니었다.

    

2015617.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있는 유서 깊은 흑인 교회에 낯선 백인 청년이 찾아들었다.

그는 임마누엘 아프리카 감리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 후에는 성경 공부 그룹을 따라 가 뒷줄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청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총을 뽑아 들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총격사건으로 인해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목사를 포함하여 9명의 성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은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범인은 21살 난 인종 차별주의자 딜런 로프였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딜런은 자기 손으로 인종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몇 달 동안 범행을 준비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잡혀 와서도 그는 죄책감은커녕 어처구니없는 궤변만 계속 늘어놓았다.

흑인은 다 무식하고 더러운 성범죄자들이라며

모든 백인이 대동단결하여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놀람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하여 온갖 추측도 난무했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렸다.

미국 사회 전체가 술렁거렸다.

자칫하면 흑백 간의 인종갈등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그는 연설을 하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선창했다.

대통령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는 간절함을 담은 고백이었다.

참석자들이 하나 둘 따라 부르면서 자연스레 합창이 되었다.

함께 찬양을 부르는 사이, 슬픔과 분노로 들끓던 마음들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용의자 딜런 로프의 보석을 심사하는 재판이 공개법정에서 열렸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관례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울먹이면서 범인을 향해 <용서>하겠다고 했다.

유족들 중 누구도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범인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했다.

희생자 타이완사 샌더스의 어머니 펠리시아 샌더스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다.

총격을 받았을 때,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서 죽은 척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기 목숨은 부지했지만 아들이 죽는 광경을 가까이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당신을 성경공부 모임에 받아들였다.

그런데,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였다.

내 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다 아파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겠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 라는 말이 있다.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깊은 원수라는 뜻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도 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복수보다도 강하고 차원 높은 응징은 용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상대를 더 매섭게 제압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원수를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용서를 택할 수는 없다.

그런 의도를 갖고 하는 건 이미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용서란 상대방이 지은 죄를 완전히 잊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자기 속에다 먼저 지옥 불을 지피게 마련이다.

그 불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타올라서 제 몸부터 태우게 된다.

분노와 원한은 치명적인 독이 되어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아프게 하고, 결국엔 죽게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도 하셨다.

이 모두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살리기 위한 처방이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실천하기 힘든 가르침이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족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기 부모와 자식을 죽인 원수에게 용서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성경에서 배운 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결코 증오와 복수심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온유하면서도 단호하게 복수의 악순환 고리를 만들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모습은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지켜낸 그들의 성숙한 태도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죽을 만큼 분노하고,

쉽게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불현 듯 떠오른다.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뜨거운 것이 목에서 울컥 넘어와 뺨 위로 주르륵 흘렀다.

TV 화면 속 흑인들의 얼굴은 해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김 희재 : <계간 수필>등단 (1998), <수필 문우회> 회원.

                 산문집 <죽변 기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