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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볕, 그 따사로움에 놀랐다.

1월 초순,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중턱이면 추워서 움츠리는 것이 당연한데

이번 여행길에 만난 햇살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절기상으로는 한겨울인데 겨울 볕이 아니었다. 

지독한 독감 끝에 남은 기침을 달고다닌 내게  따스한 그 햇살은 더 반갑고 고마웠다.

이번 여행은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관광 일정을 짜지도 않았고, 무엇을 어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의논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맞은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동차 핸들을 꺾는 자유로움은 보너스로 받았다.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투신했다는 촉석루를 찾아 무작정 진주로 향했다.

진주 시내에 있는 진주성은 정갈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인적도 드문 진주성 앞으로 흐르는 남강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강물 위에 유등을 환히 밝히고 관광객을 끌어들였던 흔적조차 없다.

논개가 떨어졌던 의암만이 여전히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내가 논개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의연한 결기에 다시금 옷깃을 여몄다.


거제 장은 반나절만 서는 장이라 오전에만 열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물메기가  미끄덩한 허연 진액을 온몸에 바르며 퍼덕거리고 있었다.

제철 맞아 알을 잔뜩 품은 대구는 두말 필요없이 싱싱하고,

반 건조한 가자미, 서대, 민어, 능성어 등도 물이 좋았다.

마른 가루를 조금 묻혀서 기름 살짝 두르고 프라이팬에 구워 먹으면 맛있는 반 건조 생선을

종류대로 잔뜩 사가지고 숙소에서 구워 먹었다.

슴슴하고 담백한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다들 정신없이 먹었다. 

집에 있는 식구들 줄 것은 각자 따로 사서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


지심도는 동백섬이다.

장승포항에서 배로 15분 밖에 걸리지 않는 그 섬엔 동백나무가 가득했다.

12월도 되기 전에 이미 꽃잎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흰동백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홑동백도 있고 겹동백도 있었다.

동백나무 이파리는 해풍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모양이다.

짙은 초록색에 윤기를 더한 것이 아주 실하게 보인다.

동백꽃이 피를 토하듯이 붉은 색으로 만발하고 있을 때에도

먼발치에서 보면 초록색만 보일만큼 잎사귀가 실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뿌리는 얼마나 튼실할까.

문득, 꽃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손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맹종죽 테마파크는 처음 가 본 곳이다.

울창한 대나무숲이다.

산을 휘감아 오르며 걷기 좋게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대숲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얼핏 들으면 두런거리는 사람소리 같다.

어느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이었는지 금방 떠오르진 않지만

내가 그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대나무 사이로 다도해가 보인다.

크고 작은 섬이 점점이 박힌 그 바다엔 사람들의 일터가 있다.

양식장에 가지런히 놓인 부표에서 누군가의 땀과 눈물이 느껴진다.


공곶이는  최근에 조성된 수선화 동산이다.

아직 수선화 철이 아니라 비어있지만 머잖아 이 동산에 노란색이 가득할 게다.

좁은 산책로에  대나무도 많고,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돌이 많은 이 언덕을 일군 강씨 할아버지 내외분의 수고가 느껴지는 산책로가 가파르다.

지금도 끊임없이 수선화 뿌리를 캐고 심으며 동산을 다듬는 중인데,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걸어가기도 힘든 가파른 길에 계단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공유하고자 애쓴 그 분은 선구자다.

동백터널 계단을 따라 내려간 바닷가엔 항아리 누름돌로 쓰면 딱 좋은 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맨들맨들한 돌멩이 사이로 파도가 스며든다.

느낌표 모양의 섬과 마침표 같은 섬을 지나 온 물결이 바닷가 돌멩이를 다듬는다.

오목한 해변까지 따라온 따스한 겨울 햇살은 우리를 무장해제 시켰다.

와글다글한 돌맹이 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사진을 찍는다.

따사로움이 온 얼굴에 번진다. 


거제 방앗간에다 호박고지를 갖다 주기만 하면

찹쌀과 팥고물은 알아서 넣고 떡을 해 준다.

거제댁이 직접 기르고 토방 햇살에 정성껏 말린 늙은 호박고지를 갖다 주고 떡을 맞췄다.

여정을 끝내고 돌아갈 때 싸가지고 가라는 속 깊은 배려까지 담긴 떡이다.

따끈하고 말랑한 시루 팥찰떡에 노란 호박이 숭숭 박혀 있다.

늙은 호박 말린 것이 달큰하고 유난히 쫀득하다.

햇살 같은 따사로움이 마음까지 다 채운다.

이런 추억을 간직하게 해 준 모든 정성이 다 고맙다.


구례 사성암은 화엄사의 말사란다.

기암 절벽 위에 세워진 조그마한 암자를 찾아 허위허위 달려갔다.

섬진강이 어찌 흐르는지 환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은 소원을 빈다.

천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서 바위에 묶어 놓으며 빈다.

돌 틈에 백원 짜리 동전을 평평히 꽂아 놓고 그 위에 잔돌을 쌓으며 빈다.

불전함에 돈을 넣고 소원지에 소원을 써서 매달아 놓으며 빈다.

적어도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는 영험한  곳이라는 안내문을 읽은 터라 나도 잠시 고민한다.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무엇을 빌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작품 하나 건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스친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이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이 짙푸른 색에 눈이 시리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완만한 능선이 오늘 따라 유난히 평안해 보인다.


기왕 내친 김에 화엄사로 길을 집았다.

오래된 큰 절의 풍모가 의젓하고 당당하다.

요란한 칠을 입히지 않은 각황전의 지붕에 위엄이 서려있다.

채색되지 않은 나무색이 담담하면서도 어디다 비길 수 없이 아름답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버텨낸 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색감이다.

각황전 옆 겨울 나무 끝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앙상한 가지 끝에 꽃눈이 달린 것이다.

색이 너무 붉어서 흑매라고도 보르는 홍매화가 조만간 피어날 것이다.

내 목덜미에 감기는 겨울볕이 유난히 따사롭다.

나도 두툼한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나무 흉내를 내 본다.

일기예보에서는 다음 주부터 다시 추워진다고 했지만 겁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있는 정갈한 찻집에서 따끈한 차를 마시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절기상으로는 엄동설한이 분명한데 우리들 마음 속에는 이미 봄기운이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