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이 상투적인 물음에도 그녀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저는 호박전을 좋아해요. 동글동글한 것이 예쁘고 맛있더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하고 많은 음식들 중에서 호박전을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다.

큰아들의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던진 질문과 그녀의 답이었다.


  사실 나도 호박전을 좋아한다.

아니, 모든 종류의 전을 다 잘 먹는다.

그래서 어떤 전이든 한입 베어 맛을 보면 반죽이 잘 되었는지, 기름은 적당히 둘렀는지,

불 조절은 잘 했는지 등을 금방 안다.

그런 내게 호박전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대답은 일단 낯선 아가씨에 대한 호감지수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 아가씨가 우리 식구가 될 것 같은 예감마저 스쳐갔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유난히 전을 잘 해먹었다.

황해도 사람인 아버지는 녹두빈대떡을 아주 좋아하셨고,

경상도 출신 어머니는 달달한 배추전을 즐겨 드셨다.

계절 따라 동태전이며 동그랑땡, 호박전, 버섯전, 누름적, 산적, 육전,

해물파전, 굴전, 깻잎전 등을 골고루 해먹었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시기여서 기름 냄새 풍기면 부유한 느낌이 들곤 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녹두빈대떡을 만들려면 꼬박 이틀 걸렸다.

녹두를 맷돌에 갈아 반으로 쪼갠 후에 밤새 물에 담가 놓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물에 뜬 껍질을 잘 골라 낸 후 물과 함께 맷돌에 곱게 갈아낸다.

현무암으로 된 맷돌을 나무 삼발이에 잘 앉혀 놓고,

둘이 맞잡아 호흡을 맞춰 돌려야 녹두가 곱게 갈려 나왔다.

맷돌질은 대개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가 딸들의 손을 감싸 쥐고 부지런히 녹두를 가는 사이,

어머니는 빈대떡에 넣을 재료를 준비하셨다.

잘 익은 배추김치 송송 썰고, 고사리는 대충 썰고,

돼지고기 굵은 채 썰어 양념하고, 숙주나물은 데쳐서 숭숭 썰어 넣었다.

경상도아내가 황해도남편에게 배워서 만드는 녹두 빈대떡은 최고의 명품이었다.

고소하고 바삭하고 아삭한 식감에 감칠맛까지 고루 갖췄다.


우리 집에서 명절에 전을 지지는 일은 그리 녹녹한 작업이 아니었다.

손이 크신 어머니가 준비하신 갖가지 재료들을 맛있게 노릇노릇 지져내려면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다.

처음 전을 부치기 시작할 땐 고만고만한 딸 넷이 모두 팔 걷어 부치고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따끈한 전 몇 개 집어먹고 나면 슬슬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내빼곤 했다.

끝까지 프라이팬 앞을 떠나지 못 한 건, 요령 없는 둘째 딸인 나와 총지휘자인 어머니뿐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다 보니 나도 곧잘 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에도 나는 전()을 자주 부쳤다.

생일이며 명절이며 손님 초대 등 큰상을 차릴 때면 손이 많이 간다고 전을 빼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름 냄새를 풍겨야 잔칫집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덕분에 우리 아들들도 나처럼 엄마 옆에서 전 부치는 걸 거들어 주며 자랐다.

전은 금방 지져낸 것을 뜨거울 때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도 내 말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변했다.

요즘은 집에서 전을 거의 부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박전을 좋아한다던 아가씨를 며느리로 들이고 난 후부터

명절에도 부침개판을 벌리지 않는다.

명절 쇠러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대전에 오려면 아이들은 길에서 이미 지친다.

집에 내려오기 직전까지 직장에서 종종걸음 치다가 오는 건 아들이나 며느리나 똑같은 입장이다.

그런 판에 전까지 부치라고 하면 힘들다고 며느리 입이 나올까 저어되었다.

그렇다고 며느리를 본 마당에 나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부치자니,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시어머니 심보가 터져 나올까 봐 염려되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고되고 힘들면,

마냥 너그러운 시어머니 노릇을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매스컴에서 떠드는 명절 스트레스 제 1위가 시댁에 가서 전 부치는 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과감히 명절에 집에서는 전을 부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깟 전을 부치느라

모처럼 집에 온 아이들과 얼굴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 따라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고속도로 귀성전쟁을 겪고서야 간신히 만난 식구들 아닌가.

 

 요즘은 매일 먹는 반찬도 적당히 남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풍조 때문인지 나도 점점 재료를 사다가 일일이 다듬어서 음식을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니 직장 다니며 살림하는 새아가는 오죽할까.

이참에 손 많이 가는 음식 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내 사고방식을 확 바꾸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새사람 핑계대고 나도 신세대들처럼

주방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을 보다 합리적으로 재분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침 우리 동네 상가엔 대전에서 가장 전을 맛있게 부치는 손맛 좋은 전문점들이 밀집해 경쟁하고 있다.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가게에다 미리 예약해 놓고,

명절 전날 식구들이 다 모일 시간에 맞춰 따끈한 것을 찾아다 놓으면

고부(姑婦)가 두루 평안할 것이다.


며느리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맞은 명절은 추석이었다.

토란국이며 나물이며 고기, 생선 등 명절음식준비를 대충 해 놓고는

오후에 며느리에게 단둘이 외출을 하자고 했다.

대나무로 만든 아담하고 예쁜 채반을 챙겨 들고 나서며 나는 가만히 속삭였다.


  “아가야, 지금 저어기서 우리 동서들이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 오자.

   네가 좋아하는 호박전은 특별히 많이 부쳐 놓으라고 부탁해 놓았단다.

   나랑 같이 가서 따뜻할 때 가져오자꾸나.”

  내 말뜻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며느리는 눈치로 알아차리고 발걸음 가볍게 따라나섰다.


  나는 부침개전문점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우리 동서들이라고 부른다.

명절에 큰집에 모여 분주하게 전을 부치는 여자들은 대개 시댁에 온 며느리들이고,

촌수 따져보면 서로에게 동서가 되던 내 젊은 시절의 기억 때문인가 보다.


여하튼 며느리와 함께 대나무 채반을 들고 가서

금방 지져낸 따끈한 전을 입맛대로 골라서 보기 좋게 담아 오면

우리 집 명절 음식 준비는 완벽하게 다 끝난다.

그 덕인지 며느리는 명절에 시댁에 오는 걸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 눈치인 것 같다.

 

 

 

김 희재 : 계간 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 문우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팬클럽 회원.

                 미국 플로리다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역임

                 육군대학교, 한남대학교 한국어 강사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외 공동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