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처럼 거짓말처럼 아들이 돌아왔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간절히 그리워하던 일이 다 잊혀졌다.

지나고 보니 6년도 한순간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믿고 견뎌온 시간들이었다.


아들이 유학을 떠나던 2011년도는 내가 살아온 어떤 해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님이 고향집을 떠나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해였다.

나는 극심한 빈혈에다,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씰룩거리는 안면경련증이 심해서

강의할 때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날마다 직장에 다니면서 일주일이 멀다하고 김제에 계시는 어머님을 뵈러 다녀야 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이 미국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당시 아들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잘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생활기록부에 적힌 아들의 장래 희망은 변함없이 변호사였다

   

손에 쥐고 있던 현실을 다 접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아들이 떠났다.

그는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U.T 로스쿨에서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차근차근 인턴 경력도 쌓았다.

매 순간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다.

주일엔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성경공부도 착실히 했다.

그런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짠하여 한 순간도 내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빠듯하게 보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

내가 넉넉히 보낼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더 간절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들은 3년 만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맨해튼에 있는 PwC에 취업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라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

한해 두해 지날수록 어쩌면 아들이 미국에서 영영 눌러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곤 했다.

이 또한 자식을 향한 지독한 짝사랑 때문이라 여기고,

이런 마음도 그만 내려놓자고 스스로 다짐하게 되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영어예배를 드리러 교회 가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어쩌면 한국에 갈지도 몰라요.

휴가 다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휴가를 오려고?

휴가가 아니라 아예 돌아가고 싶어요.

나 혼자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가족들과 떨어져서 이렇게 사나 싶어요.

엄마 아빠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까이 살면서 서로 생일도 챙기고,

명절에도 식구들과 같이 지내고 싶어서요.


늙어가는 부모를 곁에서 지키며 살고 싶다는 아들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안정된 현실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온다는 것이 염려되어 나는 또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의 마음에 둔 소원이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길을 활짝 열어 주십사고 간청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고,

서울에 있는 유명 로펌에 스카우트 되었다.

아들은 서둘러 미국 생활을 정리했다.

뉴욕에서 쓰던 쓸 만한 물건들은 한인교회 유학생들에게 다 나눠주고,

새 희망과 의욕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들이 서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다 새로 장만했다.

업체에서 곧바로 배달해 줄 가구를 제외하고도 자잘한 이삿짐이 승용차 두 대를 꽉 채웠다.

저녁에 미리 짐을 실어놓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아들이 미국에서 들고 온 큰 가방들은 진작 큰아들 차에 실어서 서울로 보내두었다.

동생의 귀향을 누구보다도 반기는 형은 짐을 가지고 이사 들어갈 집으로 곧장 올 것이다.

마침 삼일절이라 직장인들이 시간 내기도 좋다.

기숙사에 들일 짐을 챙겨 서울로 대학을 보내던 것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새 자기 꿈을 이루어가는 녀석들이 대견하여 한없이 뿌듯하고 감사하다.

남편 차가 앞에서 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휴일인데도 고속도로가 붐비지 않고, 날씨도 청량하고 온화하다.

온 가족이 손을 보태니 순식간에 집안 정리가 다 끝났다.


이제,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만나러 갈 수 있는 거리에 내 자식들이 다 있다.

식구들이 식탁에 빙 둘러 앉아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시며 인도하신 하나님 덕분이다.

앞으로 더욱 감사하며 신실하게 살아야겠다.

 

 

                                                                                                  김 희재 권사 (노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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