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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볕, 그 따사로움에 놀랐다.

정유년 1월 초순이다.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면 추워서 움츠리는 것이 당연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년과는 많이 다른 이상난동 현상이다.

절기상으로는 한겨울인데 결코 겨울 날씨가 아니었다.

지독한 독감 끝에 남은 기침을 달고 다닌 내게는 그 따사로운 햇볕이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길동무였다.

 이번 여행은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관광 일정을 짜지도 않았고, 무엇을 어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의논도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함께 거제도에 사는 친구를 찾아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지심도는 동백섬이다.

장승포항에서 배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그 섬엔 동백나무가 가득했다.

12월도 되기 전부터 꽃잎이 열리기 시작하여 양지 바른 곳에선 이미 꽃이 지고 있었다.

뭍에서는 보기 드문 흰 동백꽃도 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흰 동백꽃을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홑 동백도 있고 겹 동백도 있다.

동백나무 이파리는 삭풍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모양이다.

짙은 초록색에 윤기를 더한 것이 아주 실하게 보인다.

붉은 동백꽃이 제법 많이 피어 있는데도 먼발치에서 보면 초록색만 보일만큼 잎사귀가 무성하다.

잎사귀가 그렇게 보이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는 얼마나 튼실해야 할까.

문득, 사람들은 화려한 꽃을 보며 열광하지만 그것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손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맹종죽 테마파크는 최근에 조성된 울창한 대나무 숲 놀이터다.

산을 휘감아 오르며 걷기 좋게 산책로를 다듬어 놓았다.

대숲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얼핏 두런거리는 사람소리 같다.

그 소리를 들으면 내가 소설에 나오는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초록색 대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광활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다도해다.

크고 작은 섬이 점점이 박힌 그 바다에는 누군가의 땀도 녹아 있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놓인 양식장의 하얀 부표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공곶이는 개인 소유의 땅에 조성한 수선화 동산이다.

아직 수선화 철이 아니라 꽃은 보지 못했지만 머잖아 이 동산에 노란색이 가득할 게다.

좁은 산책로에 대나무도 많고,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쓸모없는 돌밭이었던 이 언덕을 수선화 명소로 만든 강씨 할아버지 내외분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파른 비탈에 계단으로 된 산책로를 만드느라 잠시도 호미를 놓지 않으셨다.

지금도 끊임없이 수선화 뿌리를 캐고 심으며 동산을 다듬는 중인데,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남의 것도 내 것이라 우기는 탐욕이 판을 치는 요즘이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 가꾼 정원을 입장료 한 푼 받지 않고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소박한 강씨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이름 없는 농부가 아니다.

존경 받아야 할 이 시대의 진짜 어른이다

 

공곶이 언덕배기에서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를 만난다.

바닷가엔 항아리 누름돌로 쓰면 딱 좋을 큼직한 조약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동글납작한 돌멩이 사이로 파도가 스며든다.

길쭉한 느낌표 모양의 섬과 마침표 같은 동그란 섬을 지나 온 물결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멩이를 다듬는다.

온 바다에 햇살이 가득하다.

다들 철퍼덕 주저앉아 사진을 찍는다.

바람도 한 점 없이 따스한 겨울 볕이 온 얼굴을 감싼다.

예구마을 옆에 숨은 오목한 해변에서 우리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거제 장은 반나절장이라 오전에만 열린다.

장터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물메기가 지천이다.

게거품 같은 미끄덩한 진액을 온몸에 바르며 퍼드덕거리고 있다.

제철 맞아 알을 잔뜩 품은 거제 바다에서 잡은 대구는 두말 필요 없이 싱싱하다.

가자미, 서대, 민어, 능성어, 우럭 등도 금방 잡아서 물이 좋을 때 해풍에 꾸덕꾸덕하게 말려 놓았다.

반 건조 생선은 맨입에 먹어도 딱 좋게 심심하고 비리지 않다.

구워도 맛있고 쪄서 먹어도 일품이다.

맛있는 건 생선뿐만이 아니다.

거제 방앗간에다 호박고지를 갖다 주면 찹쌀과 팥고물을 넣어서 떡을 해 준다.

거제 댁이 텃밭에서 직접 기르고 정성껏 말린 늙은 호박고지를 방앗간에 갖다 주고 시루떡을 맞췄다.

금방 쪄 낸 따끈하고 말랑한 시루 팥 찰떡에 노란 호박이 숭숭 박혀 있다.

호박고지를 넉넉히 넣어서 그런지 단맛이 풍부하고 쫀득하다.

여행 중에 떡을 해 먹는 추억까지 만들어 준 그녀의 엽렵함에 다들 할 말을 잊었다.

친정 엄마 같다.


 

거제에서 올라오는 길에 구례 사성암을 찾아갔다.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조그마한 암자를 보러 가파른 산길을 자동차로 구불구불 올라갔다.

섬진강 물줄기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서 사람들은 너 나 없이 소원을 빈다.

 천 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서 바위에 묶어 놓으며 빈다.

돌 틈에 백 원짜리 동전을 평평히 꽂아 놓고, 그 위에 잔돌을 쌓으며 빈다.

불전함에 돈을 넣고 받은 소원지에 소원을 써서 매달아 놓으며 빈다.

암자 입구에 걸린 여기는 적어도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는 영험한 곳이라는 안내문 때문인가 보다.

그 문구에 나도 잠시 솔깃해진다.

소원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무엇을 빌까?

언뜻,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작품 하나 건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스쳤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이는 하늘에 계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얼른 고개를 번쩍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색이 내 마음을 꽉 채운다.

지리산의 완만한 능선도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숨을 깊이 들이쉰다.

따사로운 기운이 온 몸에 확 퍼진다.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기왕 예까지 온 김에 화엄사까지 가 보기로 했다.

오래된 큰 절의 풍모가 의젓하고 당당하다.

요란한 칠을 입히지 않은 각황전의 지붕에 위엄이 서려있다.

채색되지 않은 나무색이 담담하면서도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모든 질고를 버텨낸 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색감이다.

각황전 옆 겨울나무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홍매화나무 앙상한 가지 끝에 꽃눈이 달려 있다.

색이 너무 붉어서 흑매라고도 부르는 홍매화가 조만간 피어날 것 같다.

목덜미에 감기는 겨울 볕이 유난히 더 따뜻하다.

나는 두툼한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나무 흉내를 내 본다.

아이들처럼 우스꽝스런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웃는다.

일기예보에서는 다음 주부터 겨울답게 제대로 추워진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

마치 4월 중순 같이 따스한 한겨울 햇살에 기대어 호기롭게 가슴을 활짝 펴고 걷는다.

여정 내내 따라다니던 독감 끝에 남은 기침도 어느새 뚝 그쳤다.

 

 

 

김 희재 : 계간 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 문우회 회원.

                  미국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역임

                  육군대학교, 한남대학교 한국어 강사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외 공동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