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에 있는 첼시마켓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예쁜 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중엔 잡지에 소개된 유명한 집도 꽤 있다.

주로 쿠키와 커피, , 해산물 요리 등을 파는 점포가 많은데, 어엿한 뉴욕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그곳의 여러 가게 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살아 있는 랍스터를 통째로 쪄서 파는 식당이었다.

랍스터의 크기도 다양해서 어떤 것은 서너 명이 나눠 먹어도 좋을 만하게 아주 컸다.

너무 큰 것은 살이 딱딱하고 고무를 씹는 것처럼 질기다고 해서,

우리는 혼자 먹기에 알맞은 1.5파운드 정도 되는 것으로 세 마리를 골랐다.

남편과 아들과 내가 각자 한 마리씩 차지하고 먹기로 했다.

뉴욕에서의 첫 가족외식이었다.


커다란 찜 솥에서 금방 쪄낸 것을 바로 먹으니 한결 더 맛있었다.

살이 연하고 단맛이 도는 것이 아주 별미였다.

거기에다 게살샌드위치와 시원한 탄산음료를 곁들이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는 데다 생선가시를 잘 발라먹는 나는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내 몫을 깨끗이 다 먹었다.

그리고는 남편과 아들이 대충 먹고 내놓은 대가리 속에 든 육즙과 내장까지 남김없이 싹싹 다 훑어먹었다.

내가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아들이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그렇게 맛있어요?”

 

유학 가서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뉴욕에서 직장을 잡은 아들이 어찌 사는지 보러 온 길이었다.

직장에 매인 남편은 열흘 남짓 있다가 대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겨우 시차적응을 하자마자 가는 것도 아깝고,

혼자 자취하는 아들 좀 거둬주고 싶어서 보름 정도 더 있다 가기로 했다.

갓 입사한 아들은 더 이상 쓸 수 있는 휴가도 없었다,


아들이 출근하고 나면,

나 혼자 지도를 보고 지하철 타고 다니며 구경했다.

센트럴파크, 하이라인파크, 브라이언파크 등 유명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푸드 트럭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도 먹어 보았다.

지하철과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뉴저지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의젓하게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흐뭇하고 좋았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내가 돌아갈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날은 집에서 부엌일을 하느라 온종일 바빴는데,

아들이 모처럼 밖에서 저녁먹자고 전화했다.

나는 단번에 싫다고 거절했다.

엄마 밥을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얼른 들어오라고 채근했다.

마침 아들이 좋아하는 국을 잔뜩 끓여서 나누어 얼리고,

밑반찬도 몇가지 해놓은 터라 저녁상을 차리기가 아주 수월했다.

퇴근시간이 되자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음료수 좀 빨리 시원해지게 냉동실에 넣어 놓으세요.’

아들은 보통 때보다 많이 늦게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첼시마켓의 랍스터 두 마리와 게살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사 온 것을 주섬주섬 꺼내 식탁에 풀어 놓으며 아들이 내 손을 잡아 당겼다.

엄마가 너무 잘 드시기에 한국으로 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더 사드리고 싶었어요.”


퇴근길에 집과는 반대 방향인 첼시마켓에 지하철을 타고 가서 줄서서 사가지고,

따끈할 때 먹게 하려고 막 뛰어온 모양이다.

아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깜짝 선물에 처음엔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니 첫술에 울컥 목이 메었다.

일부러 가서 사갖고 달려온 그 성의가 너무 고마워 감격했다.

매양 어린 막내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철이 들었구나.

한없이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 끝에 쉰아홉 살 내 나이가 씁쓸하게 얹혔다.

뜬금없이 10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충북 청원에 유명한 오리황토구이집이 있었다.

오리 뱃속에다 여러 가지 곡식과 약재를 채워 넣고,

헝겊으로 잘 싸고 토분에 담아 가마에서 천천히 구워내는 요리였다.

그렇게 구운 오리는 기름이 쫙 빠져서 담백하고 육질도 부드러워 씹기도 전에 그냥 술술 넘어갔다.

오리 뱃속에다 채워 넣은 곡식은 찰진 오곡밥이 되어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맛있고 든든했다.


내 입에 아주 맛있기에 친정엄마를 뵈러 갈 때 사들고 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청원 IC로 빠져나가서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을 찾았다.

행여 식을세라 담요에 둘둘 말아 가지고 엄마가 계신 인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칠순의 엄마는 나보다도 내가 들고 간 음식을 더 반기셨다.

특히 그 부드러운 식감을 아주 좋아하셨다.

어린아이처럼 두 손과 온 얼굴로 맛있게 드셨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서,

앞으로 친정에 올 때마다 사다 드려야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고작 서너 번 밖에 더 사다드리지 못했다.

내 일상이 너무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저 애틋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일흔 일곱 아쉬운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는 그 황토오리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따뜻할 때 잡수시라고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운전하고 온 딸의 정성을 무척 고마워 하셨다.

나도 오늘 아들이 사들고 온 첼시마켓의 랍스터 이야기를 두고두고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것 같다.

 

 

 

 

 

 

김 희재 : 계간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문우회, 한국문협, 국제PEN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