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한복판, 뉴욕 공립도서관 옆 작은 정원에 노천카페 같은 휴게공간이 있다.

잔디밭 위에 철제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제법 많이 놓여있다.

큰길가 모퉁이라 어디서든 잘 보인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샌드위치를 먹거나,

전화기에 대고 떠들거나,

이어폰을 끼고 태블릿PC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다들 혼자인데 바쁘다.

나도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노트와 볼펜을 꺼내 들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메모를 하며 거리구경을 시작했다.

 

내 자리 바로 옆 테이블에 뚱뚱한 중년 남자가 와서 앉았다.

앉자마자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온 것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한지 먹는 속도가 일정하고 빠르다.


중년 남자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도서관 벽을 등지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는 나랑 마주보고 있다.

뿔테 안경을 쓰고 검은 비니를 푹 뒤집어썼다.

유대교 랍비처럼 수염을 길게 길렀고, 청바지를 입었다.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위에 가방까지 얹어서 옆에 세워 놓았다.

그도 나처럼 맨해튼 한복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고 싶은 자유여행객이라고 내 맘대로 단정한다.

문득,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스토리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아직도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점심시간이 되자 비둘기가 먼저 알고 몰려든다.

참새들도 떼 지어 날아온다.

아주 오랜만에 본 작은 녀석들이 겁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내 발밑 사이를 맴돈다.

예전엔 동네 어귀 전깃줄 위에 참새가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이 흔했는데, 요즘은 통 보기가 힘들다.

그게 다 고층건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찬 맨해튼 한복판에서 참새를 보게 될 줄 몰랐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 몸짓이 참 귀엽다.

참새들은 이 삭막한 빌딩숲 어디에다 집을 지었을까

 

이층으로 된 시티투어 버스가 연신 내 앞을 지나간다.

천천히 달리는 버스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저들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그들을 올려다본다.

버스 지붕에 앉은 사람들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손을 흔들어 준다.

관광객인 내가 관광지의 일부가 된 셈이다.

나는 그들처럼 적극적으로 인사하지 않고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한다.

버스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금세 다른 버스가 또 다가온다

 

실은 나도 며칠 전에 저 버스를 타고 맨해튼 관광을 했다.

센트럴 파크에서 출발하여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리저리 건물 사이를 비집으며 달렸다.

이층 버스의 위 칸은 지붕도 유리창도 없이 의자만 달랑 있어서,

빌딩숲이 만들어내는 골바람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야 했다.

나는 스카프로 목과 얼굴을 다 가리고 눈만 빠끔 내 놓은 채

빌딩은 물론이고 노천카페에 앉은 사람들 모습까지 카메라에 다 담았다.

가다가 멋진 풍경이 보이면 서슴없이 찍고 또 찍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일이다.


움직이는 햇볕을 따라 나도 두어 번 자리를 옮겼다.

11월 중순, 아직은 가을이 분명한데 빌딩 사이 그늘진 곳에서 부는 바람이 아주 차게 느껴진다.

음식점에서 먹을 것을 사갖고 나와 앉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근처에 있는 브라이언파크에 자리가 없는 모양이다.

뉴요커들은 식당종업원에게 줄 팁을 아끼고 햇볕도 쐴 겸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장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음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풍경은 우습기도 하고 정말 낯설다.


멀찌감치 앉아서 혼자 책을 읽던 그 남자는 이젠 아예 대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긴 수염 때문에 그가 몇 살이나 먹었는지 가늠하기가 정말 힘들다.

체형이나 앉음새로 봐서는 그렇게 나이가 많을 것 같지 않다.

그의 눈에 나는 몇 살이나 먹어 보일까?

이왕이면 실제보다 많이 어려 보였으면 좋겠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거리 구경을 하는 척하며 나를 관찰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글을 쓰는 척하며 그를 훔쳐보고 있다.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썸 타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의식하며 시간을 보낸다.

덕분에 시간이 심심하지 않게 잘 흐른다.


늦가을 해가 지나가다 바로 앞에 있는 높은 빌딩에 걸렸다.

그 바람에 내 자리는 햇살을 통째로 다 잃어버렸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메모하는 것도 싫증이 난다.

펜을 노트 사이에 끼워 놓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삼삼오오 바삐 걸어간다.

하나같이 배가 불룩하다.

셔츠가 터질 것 같다.

저러다 단추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시 스친다.

도서관 입구에서 깡마른 청소부가 느릿느릿 낙엽을 쓰는 시늉을 한다.

비질을 하는 척만 하며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건물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봉지를 빼 들고 주변을 살핀다.

큰 봉지가 아주 헐렁하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흑인인데 나이가 꽤 들었다.

의욕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저 시간만 때우면 돈을 받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괜히 밉살스럽다.


숨었던 햇살이 빌딩 사이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관찰하던 그 남자는 내가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가고 없다.

내 상상은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고 끝났다.

짐짓 급한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부산하게 가방을 꾸려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식, 웃음이 난다.

 

도서관 정문 앞에서는

그룹 여행을 온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마치 훈련을 받은 것처럼 거의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악수도 한다.

어떤 사람은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뒤로 확 꺾인다.

한참을 그러다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도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약속시간에 늦은 것처럼 부지런히 들어와서는 그저 아래 위층 건물만 한 바퀴 휙 돌아보고는 그냥 나왔다.

나를 따라 들어갔던 햇살이 어느새 먼저 나와 따스한 품을 열고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든다.

눈이 시리게 고맙다.

 

 

 

 

김 희재 : 계간 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문우회, 한국문협, 국제PEN클럽 회원.

미국 플로리다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역임

육군대학교, 한남대학교 한국어 강사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외 공동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