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볕이 제법 따갑다.

모자를 썼는데도 눈이 부시다.

주말이라 그런지 드넓은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다.

어디서 단체로 왔는지 목에 명찰을 건 사람들이 떼 지어 걷는다.

다들 손에 꽃을 한 다발씩 들고 있다.

절대로 시들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다.

그들은 포장이 된 도로를 따라 걷고,

나는 숲속으로 길을 낸 보훈 둘레길로 들어선다.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대전 현충원이다.

숲길엔 솔잎이 지천으로 폭신하게 깔려있다.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나무 사이로 들어가면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 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을 나만의 속도로 혼자 걷는다.


  소나무숲을 지나면 곧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대숲에 들어서면 솔숲과는 확연히 바람소리가 다르다.

소리뿐 아니라 느낌도 다르다.

이 구간은 특별히 청백리의 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역사 속에서 찾아 낸 청렴한 선비들의 일화를 만화로 그려 전시해 놓았다.

 

대숲을 빠져나와 한 굽이를 도니

무수히 많은 비석들이 가지런히 대오를 맞추고 뜨거운 햇볕 아래 하얗게 빛나고 있다.

알록달록 화려한 꽃밭에 당당한 기운이 가득하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숲속 산책길을 벗어나 묘역으로 들어가 묘비를 찬찬히 살핀다.


여기는 순국하신 분들이 고운 재가 되어 항아리 속에 담겨 묻혀있는 곳이다.

우직하게 국가를 위해 살다가 가신 분들의 유택에 작은 화병이 한 개씩 놓여있다.

화병마다 꽃이 담겼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소박한 비석 앞면엔 계급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두어 줄 짤막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망자의 삶을 요약해 놓았다.

비슷하면서도 겹치지 않는 사연들이 대하드라마보다 더 방대하게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중엔 겨우 스무 살 남짓한 나이로 돌아가신 분도 많다.

묘비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사람들이 들고 오는 시들지 않는 꽃다발 덕분에 현충원은 겨울에도 알록달록한 꽃동산이다.

묘역을 찾는 이들의 사연은 제각각 다르지만 꽃을 드리는 마음은 다 비슷하다.

간절히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화병에 꽂는 순간,

그건 더 이상 플라스틱 꽃이 아니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눈물겹게 아름다운 진짜 꽃이 된다.


결코 시들지 않는 건 그리움, 사랑인가 보다.

 

 

카이로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은 파라오 투탕카멘의 전시관이었다.

전시관에는 그 유명한 황금마스크를 비롯하여 황금으로 된 유물이 가득했다.

황금마스크의 주인이기도 한 투탕카멘은

아홉 살에 파라오가 되어서 열여덟 살에 비명횡사를 한 비운의 왕이었다.


그는 동갑내기 아내와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전시되어 있는 그림 속의 모습이 요즘 연인들 못지않게 다정했다.

젊은 파라오 부부는 수 천 년 전에 이미 커플샌들을 한 짝씩 나누어 신고 각별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죽은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는

위대한 왕들이 생전에 공들여 준비한 거대한 피라미드에 치어 세간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어서 도굴범들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어린 왕의 피라미드는 잘 봉해진 채로 기나긴 세월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는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의 집념어린 오랜 노력 끝에 발견되었다.

나이도 어린데다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제대로 왕의 위엄을 갖추지도 못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너무도 찬란하고 귀한 유물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보물의 출현에 발굴단은 물론 온 세계가 모두 깜짝 놀랐다.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 관 뚜껑을 처음 연 하워드 박사는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황금빛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보다 더 울림이 크고 아름다운 부장품이 나온 것이다.

 

진한 초콜릿 색깔의 꽃다발이었다.

투탕카멘의 관 주변에 다 말라비틀어진 작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무덤을 밀봉해 둔 덕분에 삼천 삼백년이란 긴 시간을 잘 견디고 꽃모양도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그 꽃다발은 너무도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야 했던 어린 왕비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수천 년 세월 탓에 비록 윤기는 사라졌지만,

꽃다발에 담긴 애틋한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에 돌아온 마른 꽃다발은 투탕카멘 전시관 가장 안쪽 자리, 유리 상자에 담겨 있었다.

시들지 않은 사랑을 보려고 많은 관람객들이 촘촘히 빙 둘러섰다.

나도 관람객 틈에 끼어서 꽃을 한참 들여다보는데,

알 수 없는 감동이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카이로 박물관에 다녀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 황금마스크는 물론 방안에 즐비했던 값비싼 황금유물들을 본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쓰레기나 다름없던 꽃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싹 마른 꽃다발을 보며 울컥 했던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어제 일처럼.


정말로 귀한 것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김희재 : 수필가. 계간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문우회, 한국문협, 국제PEN 회원.

                미국 플로리다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역임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 외 공동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