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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망설임 없이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남은 손으로는 의사봉을 집어 들고 상을 땅땅 두들겼다.

사진기자처럼 둘러서서 핸드폰을 들이대던 사람들 모두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아기도 무엇을 아는 것처럼 싱긋이 웃으며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기 옆에 앉아서 웃고 있던 나탈리아의 입 꼬리가 실룩이더니 울음보가 또 터졌다.

그 모습에 다들 마음이 짠해져 눈물을 질금거리며 덕담 한마디씩 해 주었다.

"하이고 그 녀석, 판검사가 되려나 보네."

"아니야, 마이크 잡고 두드리는 걸 보니 국회의장이 되겠는 걸."

"나탈리아 좋겠네. 지금은 좀 힘들지만 이담에 아들 덕 톡톡히 보게 생겼어요."

 

 

하얀 피부에 금발머리, 키 크고 날씬한 서른세 살 나탈리아.

그녀는 우크라이나 출신 결혼 이주 여성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사람이다.

대전 김 씨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러 가서 서류에 김 나탈리아라고 썼더니

담당자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기에 서슴없이

“내가 지금 대전에 살고 있으니 대전 김씨”'라고 했단다.

그것이 한 가문의 시조가 되는 것인 줄이나 알고 그랬을까?

아무튼 나이도 어린 사람이 당차다.

객지에 살면서도 주눅 든 구석이 없이 밝아 보여 그녀에게 호감이 간다.

 

 

박 권사네 집에서 교우들 몇 명이 모여 백김치 담그던 날, 그녀를 처음 만났다.

다문화 가정을 돕고 있는 교우 한 분이 김치 담그는 법 배우라고 데리고 왔다.

그녀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밤낮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서 제 아기를 보육원에 보내 놓은 여자였다.

다행히 지금은 주변의 도움으로 많이 회복되어 일상생활로 돌아왔고,

며칠 후면 아기도 도로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치껏 싹싹하게 일을 잘 했다.

한국어도 꽤 잘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우리와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그녀는 집 주인에게 다짜고짜 아기 돌 사진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 독립해 나가고 부부만 남은 집에 무슨 돌 사진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박 권사는 기꺼이 창고를 뒤져 서른두 살 난 아들의 빛바랜 첫돌 기념 액자를 찾아내 왔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돌잔치는 못 해주고

그저 한복 입혀서 사진만 찍은 것이라고  부끄러워하며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래도 나보다 낫다,

내게는 그런 액자조차 없다.

마침 갓난아기 데리고 미국에 가서 가난한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라 요즘 같은 첫돌잔치는 꿈도 못 꾸었다.

내 손으로 케이크 하나 구워 놓고,  음식 몇 가지 장만해 상을 차린 후에

돌쟁이 한복 입혀 사진 몇 장 찍어 준 것이 전부다.

 

나탈리아는 액자를 어루만지며 자기 아들도 이렇게 한복 입혀서 사진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2주 후면 아기 돌인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수없이 되풀이했다.

약간 뻔뻔해 보이는 돌출행동이 어이없긴 하지만,

그녀 눈빛이 너무 간절하고 애틋했다.

설령 나중에 형편이 좋아진다 해도 돌잔치는 소급해서 해줄 수가 없다.

이미 겪어 봐서 잘 안다.

게다가 젊은 여자 혼자서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타국에서 비틀거리며 사는 것도 딱했다.

친정엄마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기의 돌상을 우리 손으로 차려주기로 했다.

파티 장소로는 정원도 있고 널찍한 박 권사 집이 제격이었다.

 

 

박 권사와 나는 적은 예산 가지고 제대로 차리려고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대전역 근처 한복거리에 가서 아기 한복 일습과 모자와 염낭까지 다 사고,

파티용품 전문점에서 벽에 장식할 배너와 풍선, 돌잡이 용품 등을 샀다.

 

하루 전날엔 떡집과 과일가게, 제과점 등을 다니며 쓸 것을 미리 주문해 놓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풍선을 불었다.

생일 축하 배너를 벽에 붙이고, 풍선도 색깔 맞춰 달았다.

사진이 잘 나오게 이리저리 맞춰 보며 가구 배치도 다시 했다.

응접 테이블에 흰색 보를 깔고

무지개떡과 수수팥떡, 삼색 송편, 바나나, 파인애플, 꽃바구니, 케이크 등을 올려 돌상을 꾸몄다.

장난감 청진기, 마이크, 의사봉, 마우스, 연필, 실타래, 지폐 등은 쟁반에 따로 담아 돌잡힐 수 있게 했다.

각자 나누어서 장만해 가지고 온 잔치음식들도 식탁 위에 볼품 있게 차려 놓았다.

게다가 꽃이 풍성한 정원의 풍경까지 더하니

요즘 흔히들 밖에서 하는 돌잔치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품위 있는 파티 분위기가 되었다.

 

시간이 되자 그녀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거실에 차려진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더니 돌아서서 비죽비죽 울었다.

준비한 한복을 아기에게 입히고,

그녀에게는 박 권사 한복을 빌려주었다.

한복을 입으며 그녀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자기 인생에 이렇게 좋은 날이 올 줄 몰랐단다.

그렇게 명랑하고 당당하던 그녀가 내 어깨에 고개를 박고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옷고름을 매 주려던 나도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같이 울었다.

좋은 일 앞에서 울음이 터진다는 건 속에 맺힌 것이 많다는 증거인데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돌잡이에 기념 촬영에 식사까지 다 마치고 설거지 하는 사이,

주인공 노릇하느라 피곤했는지 아기가 잠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나탈리아가 살아 온 이야기를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12년 전에 한국에 와서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으며,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낳았다.

열한 살 난 딸은 첫 남편 본가에서 홀시아버지와 살고,

그녀는 지금 다세대주택 원룸에서 돌쟁이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산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처음 잡은 일은 서울 근교 카페에서 술심부름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노래 잘하고 머리가 긴 남자를 만나 딸을 낳고 살았다.

하지만 남편이 주사가 심해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딸을 남편에게 주고 갈라섰다.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를 대전에 사는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고 재혼했다.

그런데, 막상 이혼하고 나니 시댁과의 관계가 오히려 좋아졌다.

덕분에 그녀는 전 시아버지를 의지하여 딸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대전에 와서 식당을 전전하며 서빙 일을 하던 중 그녀는 육류 정형하는 남자를 만나 재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혼 과정도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해서 결혼이 어렵게 되자,

둘이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임신하여 억지로 결혼했다.

그렇게 힘들여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 지독한 마마보이였다.

수입에 비해 씀씀이가 크고 헤픈 데다 빚도 많았다.

생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고 걸핏하면 자기 엄마 집에 가서 지내곤 하는 남자랑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뱃속에 든 아기를 낳기도 전에 또 이혼했다.

결국 그녀 혼자서 산고를 겪고 아들을 낳았다.

양육비는커녕, 남편은 여태 아기 한번 제대로 보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아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없다.

아기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달이 정부에서 나오는 육아 수당 20만 원과 구청 생활보조금 50만 원을 가지고

월세 27만 원짜리 집에서 산다.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빠듯하게 사는 것도 싫고,

무책임한 남자들이 미워 견딜 수가 없다.

아기 재워 놓고 혼자서 밥을 챙겨 먹는 것이 서러워 술만 마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보육원에 보내게 되었고,

절망과 우울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자기 인생엔 더 이상 기쁜 일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기적을 보았다고 했다.

자기 아들이 이렇게 멋진 돌잔치를 하게 된 것은 기적이 분명하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상기된 얼굴에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한참 이야기하고 나더니

갑자기 허기진 듯이 남은 음식을 덜어다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제 속을 다 풀어내고 나니 후련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이제 겨우 서른 셋.

남들은 한 번도 안 갈 나이에 그녀는 시집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아기를 데리고 혼자 산다기에 겪은 일이 많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기구한 사연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하고 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녀는 그런 사람들만 골랐을까.

왜 그렇게 제 손으로 제 발등 찍는 짓만 골라 했느냐고 나무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듣는 내 속이 이리 아픈데 겪은 제 심정은 오죽하랴 싶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 위에 남은 음식들을 골고루 챙겨 그녀 손에 들려주었다.

 

나탈리아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스물한 살 난 아가씨가 막연히 동경하며 꿈꾸던 세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생소한 문화 속에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녀는  온 몸으로 부딪쳤고 가끔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당당한 한국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대전 김씨라고 칭하니 대견하고 고맙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를 더욱 깊이 박고 튼실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던 다윈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