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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가 고향이신 우리 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많은 토지와 가족을 모두 북에 두고

맨몸으로 피난 오신 슬픈 실향민이셨습니다.

남쪽에서 다시 가정을 꾸리시긴 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계셨습니다.

경제적 기반도 없고 장사 수완도 없는 아버지가

걸핏하면 술에 취해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부르며 우시는 바람에

우리 집은 불화가 잦고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같았습니다.

남한에서도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았지만 아버지에겐 북한에 있는 자녀들이 진짜였고,

길만 뚫리면 언제든지 달려갈 태세였습니다.

술이 깨면 다시 술을 찾던 아버지에겐 안정적인 직장도 없었습니다.

풍족하지도 화목하지도 않은 집안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사춘기 때 저는 늘 우울했고

가끔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제 삶에 변화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던 제가 삶의 기쁨과 희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너무 갈급했던 저는 밤낮없이 기도하고, 말씀도 읽고,

은혜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성경공부,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상기도, 부흥집회 등...

그런 저를 식구들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친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는 교회로 인도하였는데,

아버지에겐 감히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거칠고 강한 분이시라 본인 주먹을 믿을지언정

예수 따위는 절대로 믿지 않으실 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입니다.

제 눈에는 아버지가 골리앗보다 더 크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습적으로 덜컥 병석에 누우셨습니다.

피난 후 고생하실 때 망가진 폐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받기를 권했습니다.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세례를 받으시고,

수줍은 얼굴로 본인이 좋아하는 찬송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저는 아버지 입에서 이 찬송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북에 있는 우리 고향집은 마당이 아주 넓었어.

내가 어릴 적에 어느 선교사님이 우리 마을에다 교회를 짓고 싶어 하셨는데,

우리 오마니가 마당 끝을 내어 드렸지.

그래서 우리 집이랑 교회가 붙어 있었단다.

덕분에 나는 가끔 교회종도 치고, 교회마당도 자주 쓸었지.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제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고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아프신 아버지를 두고 저는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하여 미국으로 갔습니다.

제가 미국에 간 지 반년 쯤 지난 19853월에 아버지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임종은커녕 장례조차 모시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 형편에다 기저귀 차는 어린 아기 둘을 데리고 오는 것은 무리라고,

식구들이 제게는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한 성품이라 가족들 속에서도 늘 외톨이셨는데,

생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부흥회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성가대석 맨 앞줄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열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하얀 옷자락과 그 뒤로 아름다운 천성이 보였습니다.

감히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눈부시게 흰옷을 입은 분께

우리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한번만 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영화 속의 화면이 돌아가듯 어느 담 모퉁이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땅에 엎드려서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아버지께 직접 해드리지 못했던 말들이 눈물과 함께 계속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눈물콧물을 다 쏟으며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실컷 하고나니

말할 수 없이 속이 후련하고 평안해졌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아버지의 겉모습은 완악하고 강퍅하게 변했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따스한 분이셨음도 성령께서 기도 중에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 진작 그 마음 알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김 희 재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