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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꼬리 부분에 좁쌀만 한 것이 빨갛게 돋았기에 손톱으로 잡아 뜯은 것이 화근이었다.

저녁에 세수하면서 보니 수수쌀만큼 굵어진 하얀 수포가 입 주변에 다닥다닥 붙었고 목에 토시도 생겼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랍에 굴러다니는 연고를 대충 발랐는데 아침에 보니 낫기는커녕  수포가 더 번지고 온 입주변이 다 욱신거린다.

게다가 턱 밑에 도독한 토시를 건드려 보니 제법 아프다.

할 수 없이 동네 피부과를 찾았다.

단순포진입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신 거죠.

스트레스를 좀 받으셨나 봐요.

당분간 푹 쉬면서 약 챙겨 드시면 괜찮을 겁니다.

절대로 손으로 쥐어뜯거나 짜면 안 됩니다.”

의사는 먹는 약 5일분과 바르는 연고를 처방해 주며 친절히 당부하였다.

스트레스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에 또 울적해진다.

엊그제 다녀온 병문안의 후유증인가 보다

   

 

그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작년 여름이었다.

아이는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아 몇 년 헤매던 끝에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업에 소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간신히 버티다가 일 년도 못 넘기고 그만두었다.

그 사이, 한 살 아래인 동생은 대학 졸업 전에 자기 모교의 홍보실 직원으로 채용되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외가 쪽 사촌들도 하나같이 다 번듯하게 잘 풀렸다

 

아무개는 이번에 의사가 되었단다.

누구는 경찰 시험에 붙었다는구나.

거시기는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연봉이 어마어마하다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공무원이 최고여.

정년 보장되지, 연금도 있지.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하려고만 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어릴 때 너보다 못하던 애들도 열심히 하니까 저렇게들 되잖아?

엄마가 밀어줄 테니까 너도 한번 독하게 맘먹고 열심히 해 봐.

 

아이 엄마는 아들의 백수 생활이 길어질까 봐 애가 닳았다.

결국, 아이는 짐 싸들고 상경하여 노량진역 근처에다 방을 얻고 학원에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그날은 아이 아버지 생일이었는데 마침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왕 가는 김에 아들과 저녁이나 먹으려고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았다.

아이 동생에게 찾아가 보라고 했다.

번호로 문은 열었지만 안쪽에 걸쇠가 걸려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요란하게 코고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암만 불러도 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형이 며칠 동안 밤을 새우고 깊이 잠든 모양이라는 전화를 받고, 아이 엄마는 어서 경찰에 신고하라고 소리 질렀다.

엄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경찰관 입회하에 119를 불러 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술병과 약병이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는 방 안에 역한 가스냄새가 진동했다.

타다 남은 번개탄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급히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온몸이 불덩어리인데다 의식이 전혀 없었다.

동공도 거의 다 풀려 있었다.

서둘러 목에 구멍을 뚫어 튜브를 꽂고 인공호흡기도 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MRI 촬영 결과 뇌 손상이 상당히 심했다.

 

워낙 건강했던 아이라 그런지 보름 정도가 지나자 몸의 열이 잡히고, 내부 장기들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러나 뇌 기능은 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눈만 멀뚱히 뜨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가까운 가족들만 알고 동동거리던 이 소식을 나는 카카오 톡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건강하던 아이가 의식불명이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는 말에 놀랐고,

취업 스트레스와 열등감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너무 참담하고 기가 막혔다.

하필 제 아버지 생일날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엔 배신감마저 들고 화가 났다.

가족들이 여전히 쉬쉬하는 터라 병문안은커녕 알고 있다는 내색조차 못하고,

나 혼자 불에 덴 사람처럼 며칠을 푸덕거렸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햇살이 유난히 환하다.

갑자기 봄기운이 확 느껴진다.

이렇게 따스한 햇살을 두고 들어가기 아까운 생각이 들어 잠시 걷는다.

아파트 정원의 잔디는 아직도 죽은 것처럼 누렇다.

그런데, 지하 주차장 입구에 있는 커다란 바위 주변에 초록색 이파리가 뾰족뾰족 올라오고 있었다.

얼른 뛰어 가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우와, 수선화다.

 

작년 봄이었다.

내가 수선화를 좋아한다고 하자 거제도에 사는 후배가  자기네 마당에서 캔 수선화 뿌리를 한 박스 보내주었다.

덕분에 우리 베란다는 함초롬하고 조신해 보이는 황금빛 수선화로 가득 찼다.

정말 환상적으로 곱던 그 꽃이 가버리자 잎줄기가 힘없이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손을 넣어 만져보니 뿌리도 물컹했다.

화분에다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기에 다 뽑아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들고 나갔다.

우리 집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바위 옆에 자리를 보아 두고,

경비실에서 큰 삽을 빌려다가 겁도 없이 잔디밭을 팠다.

축축 처진 잎줄기를 잘 추슬러 세워 나란히 심어 주며, 정성껏 흙을 도닥도닥 해줬다.

하지만 수선화는 얼마 가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은 줄 알고 못내 서운했다.

 

그랬었는데, 살아 있었던 거야?

나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납작 엎드려 그 뾰족한 이파리 끝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키는 작지만 작년에 내다심을 때보다 훨씬 색도 진하고 꼿꼿해 보인다.

이건 그냥 수선화가 아니다.

 

  

아이는 그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중환자실은 두 달 이상 장기 입원할 수가 없어서, 의식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두 달에 한번 씩 옮겨 다녔다.

아이 엄마는 모든 일상을 다 팽개치고 서울로 올라와 오로지 아들의 간병에만 매달렸다.

다 큰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뒤척이고 주물러주며,

제 힘으로 숨 쉬고 먹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아이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깨워 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제 손으로 제 목숨 끊으려 한 사실은 다 잊고, 이렇게라도 생명을 부지하고 버텨 준 것에 감사했다.

장남에게 걸었던 각별한 기대와 부질없는 욕심도 다 내려놓고, 더 이상 아이의 일을 쉬쉬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서히 기적이 일어났다.

회생할 가망이 없다던 아이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사람을 알아보고, 튜브 대신 제 입으로 음식을 먹었다.

어눌하게나마 말도 하게 되었다.

엄마의 지극정성 덕분에 아이는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올라오게 되었다.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지만, 재활 전문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치료하면 다시 걷게 될 거라고 엄마는 확신했다.

여태 기저귀를 못 떼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반드시 스물아홉 살 청년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 굳게 믿고, 1년 가까이 새우잠 자며 아들 곁을 지켰다.

 

엊그제 문병 갔을 때, 나는 아이를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알던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아니었다.

이만큼이라도 회복된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너무 아깝고 속상해서 눈물이 절로 났다.

게다가 가장의 정년퇴직이 코앞에 닥친 어중간한 나이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것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아이 엄마는 애써 밝게 웃으며 희망을 말했지만 그럴수록 더 안쓰럽고 짠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의사는 내게 잘 먹고, 푹 쉬고,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했다.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처방이다.

사실, 생명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 지레 겁먹거나 너무 앞당겨서 걱정하는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번번이 헛심을 쓰느라 욕본다.

이 수선화처럼 그냥 묻어두고 기다리면 될 것인데 말이다.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부질없는 오지랖 그만 떨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햇살이 참 따스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머잖아 황금빛 수선화 꽃구경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