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답게

 

                                                                                                       김 희 재

 

    

 

그녀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하였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툭 튀어나온 문장이다.

발 디딜 짬 없이 가득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다 치우고 나니

비로소 네 활개를 쫙 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누울 자리를 보자 밀렸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나는 먼지 구덕에 꼬부리고 누워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우리는 26년 넘게 살던 도시를 떠나왔다.

뒤늦은 나이에 옮기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낯선 동네에다 이삿짐을 풀었다.

포장이사라 여럿이 달려들어 짐을 싸서 옮겨주어 이삿날은 수월했다.

하지만 익스프레스 직원들이 대충 쑤셔 넣은 살림살이를 죄다 끄집어내서 다시 자리를 잡아 주는 데

꼬박 열흘이 걸렸다.

예전 같았으면 길어야 사흘 안에 다 끝냈을 일이었다.


나는 스물여섯 살에 군인의 아내가 되었다.

청주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지 채 두 달이 안 되어 전라도 광주에 있는 보병학교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6개월 남짓 교육받으러 가는 남편을 따라 이삿짐 트럭 옆자리에 올라타고 광주로 간 것이

이사행군의 시작이었다.

광주에서는 세를 주기 위해 주택 옆에 간이 부엌과 함께 달아낸 상하 방에서 살았다.

거기서 난 임신을 했고,

교육을 마친 남편은 경북 영양 내륙부대의 중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산 첩첩 물 첩첩 한 영양에서는 몇 달 살지 못했다.

마땅한 집이 없어서 임시 거처에서 지내다가 겨우 세를 얻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삿짐도 다 풀기 전에 울진에 있는 해안 중대에서 총기사고가 났다.

하필 남편이 사고 난 부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차출되었다.

남편은 곧장 임지로 떠났고,

임신 8개월에 접어든 내가 혼자 이삿짐을 챙겨서 따라갔다.


해안부대 병사들은 밤낮없이 긴장하고 경계 근무하기 때문에,

교대로 예비대에 들어가 휴식하면서 부대를 정비했다.

예비대에는 중대장 관사가 있었다.

병력이 해안에 배치될 때는 가까운 민가에다 방 한 칸 세를 얻어야 했다.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나도 짐을 싸고 풀었다.

나중엔 아예 마을회관에다 짐을 맡겨 놓고,

당장 꼭 필요한 것만 들고 다니며 캠핑하듯 살았다.

중대장 하는 3년 동안에 10번도 넘게 이사했고,

그 와중에 아들 둘을 낳았다.


어쩌다 보니 한국 땅 안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돌아다녔다.

남편이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중대장 임기를 마치자마자 유학 가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석사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박사 과정에 또 도전하여 플로리다로 갔다.

덕분에 우리는 태평양을 넘나들며 미대륙의 서쪽 끝에서 남동쪽 끝까지 가로질러 다녔다.


공부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집을 옮겼다.

워낙 빠듯한 살림이라 집세가 싼 집이 나오면 서슴없이 이사했다.

아이들이 학령기에 접어든 후엔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를 수소문하고 발품도 팔았다.

남편은 위탁 장교 신분이라 기한이 차면 무조건 귀국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학위를 받기 위해 남편은 치열하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집안 살림은 모두 내 몫이었다.


박사가 되어 귀국한 남편은 신도안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신청한 군인아파트가 나올 때까지 대전에서 살기로 했다.

강보에 싸여 유학길에 동행했던 아가들은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이 되어 돌아왔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수월한 터라 학교생활 적응이 녹녹지 않았다.

큰아이가 더 힘들어했다.

미국에서 애써 익힌 한국어 실력으론 고학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문화적 이질감이 컸다.

걸핏하면 반 아이들이 미국놈이라고 놀리고 따돌렸다.

공부 못하는 것보다 모국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 더 속상한지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아이를 미국에 데리고 간 것이 후회스럽고, 정말 미안했다.

행여 아이가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자존감을 잃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1년여를 기다린 후에 군인아파트에 들어갈 차례가 되었지만 우린 신도안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많은 대덕연구단지 쪽으로 이사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새 동네에선 잘 적응했다.

두 아이 모두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전을 떠난 아이들은 그 길로 영영 내 품에서 나갔다.

재학 중에 군대에 다녀왔고, 졸업하고 곧장 취업했다.

둘 다 결혼하여 서울에서 정착했다.


나는 결혼 생활 40년 동안에 서른 번 넘게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어디에서도 진득하게 뿌리를 내릴 새가 없이 남편의 임지와 아이들 학교를 따라 옮겨 다녔다.

평생 객지에서 객지로 떠돌며,

네 식구가 꽉 껴안고 특공대처럼 살던 우리 집엔 늙어가는 부부만 남았다.

둘이 만나 넷이 되었다가 도로 둘이 된 것이다.

젠간 둘 중 하나만 남을 텐데 노년은 어디서 보내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아이들의 고향이 된 대전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늘그막엔 내 고향 가까이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어우러져 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 근처로 이사 오게 되었다.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더 기뻤는데, 몸은 그렇질 못했다.

거침없이 뚝딱 일을 해치우던 여전사는 이미 세월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장렬히 전사했다고 표현하는 건 엄살을 너무 많이 부린 것 같아 좀 남세스럽다.

머릿속에서 계속 뱅뱅 돌아다니던 그 문장은 이렇게 수정해야겠다.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기력이 소진되어 고전하던 그녀는 40년 베테랑답게 이내 전열을 가다듬었다.

능숙한 솜씨로 주변을 다 평정하고, 여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 김희재; 1956년생. 계간수필 천료 (1998).

              한국문협, 국제PEN한국본부. 수필문우회, 계수회, 한국수필 회원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러시아와 북유럽여행기 <끝난 게 아니다>,

                           4인수필집 <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