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렁길

 

                                                                             김 희 재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살아온 나의 모든 날이 다 여행이었다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모르는 나그네의 절박한 여정이었다

언제든 부르시면 다 놓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쥘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심정으로 살았다.

 

이번에도 아무런 일정을 짜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여수 향일암 아래 바닷가에 숙소를 잡았다

비수기여서 그런지 작은 숙박 시설이 몰려 있는 동네에 인적이 드물었다.

마치 바다 위에 띄워 놓은 배처럼 느껴지는 방이었다

커다란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발밑에서 파도가 찰싹거렸다

방에 앉아서도 일출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집이었다.

 

유순해 보이는 주인장은 은퇴한 공무원 같은데

장사 때가 묻지 않아 더 호감이 갔다

근처 맛집 몇 군데와 관광지를 추천해 주면서 금오도 비렁길은 꼭 가 보라고 권했다

현재 5코스까지 완성되었고

일정이 여의치 않으면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3코스만 갔다 와도 괜찮다고 했다

아침 일찍 여수 신기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산책을 충분히 즐기고 오후에 나올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비렁길 3코스를 계족산 황톳길처럼 판판하고 잘 다듬어진 산책로일 것이라고 내 맘대로 상상했다.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항까지는 20분 남짓 걸렸다

작은 배가 오가는 한산한 선착장엔 택시 몇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님이 3코스 출발점으로 가는 내내 관광 가이드처럼 섬 소개를 해주었다

금오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기사님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었다

이렇게 촉박하게 당일치기로 오지 말고

다음에는 섬에다 숙소를 잡아 놓고 며칠 묵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가오리 모양이라는 금오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땅도 비옥해 보였다.

 

비렁벼랑의 전라도 사투리다

그렇다면 비렁길은 벼랑길이란 말인데

낭떠러지 위에서 어떻게 산책을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3코스는 야트막한 산 입구에서 시작되었다

초입에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에 들어서니 하늘이 보이지 않게 빽빽했다

제법 가파른 언덕을 가로지르는 길은 내가 기대했던 잘 닦인 산책로가 아니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돌멩이가 뒤엉켜서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판판하고 잘 다듬어지기는커녕 호락호락 품을 내주지 않는 까칠한 등산로였다.


미끄럽고 경사진 비탈길을 등산화도 못 갖춰 신고 오르려니 벅차고 힘들었다

간신히 정상에 오르자 해안선이 나왔다

바다로 곧장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이었다

멀리서 보면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에 아름다운 산책길이 숨어 있었다

둘이 나란히 걷기에는 비좁은 길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비렁길이었다.

 

비렁 끝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아찔하게 매혹적이었다

죽음보다 짜릿한 마지막 키스를 나누는 연인의 심정을 발끝으로 느꼈다

동해처럼 확 터진 느낌은 없지만

크고 작은 섬을 품은 바다와 하늘이 전부 다 에메랄드색으로 빛났다

바다가 마치 커다란 호수 같았다.

 

문득 그레이트 바이칼 트레일(Great Baikal Trail)’의 풍광이 오버 랩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바이칼호를 끼고 걷는 그 길과 금오도 비렁길은 

사뭇 다른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느낌이 아주 비슷했다

둘 다 모두 물가에 바짝 붙어있고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는 길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물에 빠져버릴까 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길이라는 것도 닮았다.

 

나무로 잘 만들어 놓은 계단길이 너무 가팔라서 숨이 턱에 닿았다

계단 끝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니

걸어오면서 보았던 모든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비렁길도 그 풍광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뜬금없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고생스럽던 순간들이 좌르르 떠올랐다

울컥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중년 이후까지 크고 작은 병고(病苦)를 많이 치렀다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며 죽음을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제부터 내게 주어지는 시간은 모두 덤이라고 생각하며 산 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힘들고 위태로운 순간들을 용케 잘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낭떠러지 아래에서 호수 같은 연녹색 바다가 내게 

이렇게 살아내는 오늘이 곧 기적이고 은총이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무심히 지나가던 바람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릿결을 다독여 주었다

사람에게서 받아볼 수 없는 포근한 위로였다

덤으로 받은 시간의 꾸러미 속에 이런 순간이 선물로 들어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이 섬에 묵으면서 비렁길 다섯 코스를 모두 걸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