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에서 인일로/신금재


제비뽑기에서 파란 알이 나왔다.

인화여중이란다.

제물포 바람부는 언덕에 썰렁하게 가건물로 지어진 학교란다.

아랫집 영자는 홍여문 지나서 우아하게 지어진 원형교사 인천 여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학교 안가겠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몇 달만 다니면 전학시켜준다고 하셨다.

게다가 반에서 십 등 안에 들면 세이코 손목시계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당시 엄마는 서해 간척지에 새로 생긴 동양화학 기숙사에 청소를 하러 다니셨고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내 가방을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주셨다.

입도 짧고 장이 안좋아 삐쩍 마른 나를 늘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콩나물 버스 6번 송도 버스가 꽉차서 버스 차장이 우리를 밀어내면 수인선 철길을 따라서 걸어서 학교에 갔다.

백장군이 세웠다는 선인재단은 인화여중 선화여중 선인중 등 여러 개 학교가 있었고 완성되지않은 건물 벽돌 틈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기도 하였다.

바람 들어오는 벽돌 위에는 우리의 신조 액자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정숙한 인화의 딸이다-----

마치 군사 작전 구호를 외치듯이

구호를 마치면 매일 아침 매일 고사를 치루었다

월요일에는 국어, 화요일에는 수학, 수요일에는 영어, 등

 

 

수업 시작 전 방과후에 선생님들이 노가다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선글라스를 쓴 백장군이라는 사람이 지휘봉을 든 모습도 보았다.

어느날 지각을 한 우리 여자애들 몇 명은 지프차에 태워주기도 하였다.

 

매일고사

요즘도 가끔 힘든 일이 생기면 꿈 속에서 매일고사를 본다.

수학 시험을 보고 미달 점수 때문에 다시 재시험을 보는 꿈을 꾼다.

다행히 어학 분야를 좋아했던 나는 국어 영어에서 평균 점수를 올렸다.

 

키가 작은 나는 난3반에서 1번을 하였다.

일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반에서 일 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버스정류장도 건너뛰고 수인선 철길을 따라 춤도 추다가 걷다가 신이나서 엄마가 일하는 기숙사까지 날아갔다.

 

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시계 약속을 다짐 받았다.

반에서 일 등을 하자 담임  윤필병 선생님은 행동발달상황에서 준법성만 빼고 모두 가를 주셨다.

아마도 나를 특수반에 보내려는 전략이었으리라.

 

이름하여 특수반

다른 이름으로는 인일여고 진학반

나는 학기초부터 바닥을 기었다.

수학에서는 거의 참패

그렇다고 다른 애들처럼 학원을 갈 처지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동네 언니가 참고서를 물려주었다.

 

엄마는 늘 그만 자라, 를 외치셨다.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는 날에는 엄마에게 안깨웠다고 짜증을 내었다.

그렇게 엄마를 괴롭히며 인일여고에 진학하였다.

 

특수반 모두를 인일여고로 대칭 이동시킨  담임 홍석천 선생님은 파격적으로 교장이 되었고

배꼽산 아래 황해도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우리 동네에서

나는 인일여고 간 신씨네 딸 금재가 되었다.

 

*요즈음 나는 로키로 크로스 컨트리 스키를 타러 다닌다.

어제는 좀 긴 코스--mountain view--를 도느라고 다섯 시간이나 스키를 즐겼다.

많이 힘들었지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여고 졸업반 카톡에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찬정이가 일 등 상을 주었다.

일 등이라는 그 말에 인화여중 그 시절로 돌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