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워낙 생각이 많은 옥규가
더더구나 생각에 푹 빠지게 되지나 않았는지?
너의 글을 읽다보니 바로 우리의 이웃 이야기 아니겠니.
밤새 안녕이라 했다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나이탓인가봐.
화림언니랑 명옥언닌 살맛 나는 것 같아요.
옥규야~
오랫만에 들어왔네.
"언니~ 나 잘 있어." 하는 것 같구나.
할머니의 이야기 잘 쓴 한편의 꽁트네.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다.
역시~ 니가 가끔 들어오면 활력소가 되는거 모르지?.
광숙아~
벌써 낙옆이 떨어지는 곳이 있더라.
어젠 노을 사진 찍으러 6시에 호수공원 나갔는데도 오는 길에 금방 해가 져 버리더라.
노란 가로등에 반사된 단풍 든 나무를 보는데 왠지 울컥 감정이 복받치고 슬퍼졌어.
60넘으니 세월이 정말 너무 빨리 가는거 같아.
가는 세월 슬퍼하지말고 .
"노란 가로등에 반사된 단풍 든 나무를 보는데 왠지 울컥 감정이 복받치고 슬퍼졌어"
이럴수 있는 감정을 가진 걸 감사하자꾸나.
며칠 전에 우연히 테레비에서 문희를 보았다.
이미 60이 넘었다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미모는 빛이 났다.
나이는 정말로 숫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의 기준에다 굳이 우리를 우겨 넣을 필요가 없다.
감성이 살아있는한 우린 늙은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세월을 우리 속에 보태는 것일 뿐이다.
오오바(大場)목재소 옆집 감나무에 주렁 주렁 열린 감이 녹익어 간다.
거길 지날 때마다 ' 왜 안 따 먹지, 나더러 따서 반씩 갈라 먹자고,
아냐 그냥 나더러 따 달라고만 해도 내가 재미있어 하며 따 줄텐데.
그렇다고 담밖까지 뻗힌 감 가장귀를 휘잡아 따먹는 애녀석 하나 없다 보니
그냥 녹익어 떨어져 길바닥을 더럽히고 얼룩 덜룩.
그런데 어제 지나다 보니까 택배차를 주차하고 잠깐 배달간 그 사이 차 앞 유리창에
녹익은 감이 떨어져 퍼-억
그 운전기사 엄청 짜증 나겠구나.
내가 전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감나무 주인이 따지 못하면 (노인만 사는 집이 많으니까) 이웃의 감 딸 수 있는 사람에게
따 먹으라든지, 따서 나누자든지 하면 길도 더럽히지 않고 좀 좋으냐,
느그는 왜 그런 머리가 안 도냐?
그러지 않는 이유는
만의 하나 ( '萬의 一(망가이치)'는 이나라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걸림돌이기도 하다)
나무에 올라 갔다 (사다리를 놓거나) 떨어져 다치거나 가지라도 부러뜨리면
피차 불편한 사이가 되는데 그냥 놔두면 아무일이 없을걸 괜히 그런 짓(?)을 해서
탈이 날 소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네.
그리고 관상수는 어디까지나 관상수니까 감이 열리고, 익고, 떨어져 쓸어 내는걸(요건 좀) 즐기는 걸로 만족이라더구만.
에구 ~ 내 나라에는 닭도 기르다 잡아 묵고, 개도 기르다 잡아 묵는 사람도 쌨는데.
찬정아~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 매달려서 따고 싶쟈?
요즘 여기서도 작대기로 따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더만
괜시리 다칠라.
참고 바라보는 걸로 끝내줘.
그곳 날씬?
여긴 어제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강한 바람이 불어서
곳곳에 유리가 깨지고
공사현장의 포클레인이 넘어지기까지 했단다.
감기 조심하고 항상 건강해~
따끈한 커피 한잔 보낼게.
눈이 침침해서 돋보기를 사용한지 어언 3년.
처음엔 面팔려서 돋보기를 아무데서나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예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도록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돋보기 처음 사용할 때에는 돋수가 아주 깊지 않아서 나름대로 돋보기를 쓰면
남들 보기에 눈이 내 원래 눈보다 좀 더 커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다.
그때는 아예 돋보기 이지만 그냥 일반적으로 끼고 다녔었다. 예뻐졌단 소리 한두번 듣는 재미로.
먼데 볼 때 좀 어지러웠지만 꾹 참고.
지금은 서너번의 돋수 변화로 돋보기를 쓰면 언젠가 인일제에서 후배들이 콩뜨 할때 꼈던
(안경에 왕눈이 만하게 눈을 그려 붙인 것)안경 속의 눈 처럼, 영국 코미디언인 미스터 빈의 눈 처럼... 흑~~흑. 왕때롱 눈.
게다가 더 싫은 것은,
생전 안경 낄 일이 없다가 돋보기를 쓰니, 안경을 끼고 산 사람들의 고충도 알 수 있는데.
눈과 눈 사이의 안경 코걸이 때문에 가뜩이나 낮은 콧대의 양쪽 side에 검게 자리 잡은 안경 걸이 자국 때문에... 정말 싫다.
그래서 안경을 낄 때에는 휴지를 작게 접어서 코 위에 얹어 놓고 안경을 쓰면 그나마 다 쓴 다음에 안경 자리가 남지 않아서 좋다.
언젠가 플룻 연습 하러 갔다가 나의 그 모습에 공인순 언니가 어찌나 웃으시던지.... ,
다음 부터 공공 장소 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오래 된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내 속에 숨어있던 감성과 추억들을 들추어내는 일인가 보다.
사랑과 우정 사이.
노래 제목이다.
새삼 그 분명치 않은 경계역을 생각하게 한다.
노래가 끝나면 그냥 사라지고 마는 생각들.
이미 노래가 바뀌었다.
머무름의 의미는 떠나기전에 일종의 쉼이라고 생각될때가 종종 있다.
그럼 떠난다의 의미도 어디로엔가로 간다는 의미만은 아닐게다.
간다, 갔다온다, 아주갔다....
온다, 왔다간다, 아주왔다....
치매방지를 위해서 머리를 쓰거나 손쓰는 놀이가 좋다는데,
지금 나는 두가지를 동시에 하니 확실히 좋은 방법이리라^^
지난 일요일 동네 테니스 단체전 대회가 있어서 꼽싸리꼈는데
박상(朴樣)이 죽 쑤는 바람에 졌단 소린 안 들을려고 너무 맹렬히 했더니
생전 안 아프던 허리가 다 아프네.
사실은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죽었다.
' 올해는 왜 이렇게 젊은애들이 많이 나온거야. 쪽 팔리는거 아닌가 모르것네. 조 1위를
해야 오후의 토너먼트로 가는데 점심도 못 먹고 집에 가야하나부다. '
우째 우째 해서 점심은 먹고 오후까지 있게 됐다. ( 조 1위는 했단야그)
오후에 한 게임한 걸 끝으로 우리팀은 각자 집에 갔다.
맨 나중까지 남은 팀은 따로 있으니 즈들끼리 우승 준우승 갈라 묵윽것지.
그저깨 내가 노는 날이라 허리도 시원찮고 집에서 쉴까 했더니
남편이 아침에 출근하면서 ' 그래도 나가서 뛰고 움직이는 게 나을껄 '
우리 남편은 어깨가 아파도, 감기에 걸렸어도, 설사병이 났어도 나가서 뛰어 놀면 다 낫는다고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어려서 그랬다고 우리 아이 어릴 적에도 같은 처방을 대물림했다.
돌팔이 처방이거나 말거나 아이는 ' 오늘은 아프니까 학원 빼먹고 숙제도 하지 말고 나가서 놀아라 ' 하면
쫄 쫄 흘리던 콧물도 어느결에 뚝.
그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에 몰두하면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고 굳게 믿는
남편의 처방이 좀 무지몽매하긴해도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듯.
아주 옛날 나의 결혼조건 세가지가 참 황당한 건 줄 알았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아주 아주 합리적인 거라고 사료되는 것과 같군요.ㅎㅎㅎ
cbs fm에서 흘러나오는 양희은님의 " 사랑 그 쓸쓸함에 ..."노래를 들으며
한국과 오스트리아공간 뛰어넘는 느낌에
자연스레 내생각의 시간과 공간초월도 따라서 일어납니다
그리운 님들이여~~한 이름씩 불러봅니다.
내 맘속에 살아납니다.
아~!님들이여 내손을 한번만 잡아주시구려...
그 따뜻함이 사무치게 그리운 지금입니다.
노란가을의 단풍이 땅에 떨어져 짙누렇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눈이오면 모든 것이 가려지고 백지가 될 그때를 눈을 감고 그려봅니다.
맘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오늘따라 더욱 더 사무치는 그리움을 삭입니다.
옥인 선배님도 그 노래를 들으셨군요.
저도 지금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서 듣고 있었는데.....
저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녁시간 내내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옥인 선배님이 곁에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차라도 한잔 같이 하실까요?
그 곳에 가면 언제나 책상 그득히 맛있는 간식이 놓여있다.
물이 졸졸 흐르는 가습기도 있고 여기저기 악보가 쌓여있고 멀리 앞산이 보여 계절의 변화를 느낄수도 있다.
깔끔하게 정돈되 있지 않아서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주인장의 넉넉함이 ~ 그리고 음악에의 소박한 열정이 어우러져 모두의 정신적 피안이 되고 있는것 같다.
풀륫이 되던 안되던 삑삑대고 불다가 (그건 내 경우이고 다른 사람은 제법 선율이 아름답다)
점심 식사 후에는 차도 마시고 두런두런 지나온 삶도 얘기하고 학창시절의 선생님들 얘기도 한다.
한 30분 정도의 그 휴식 시간도 삶의 재미를 더해준다.
2부는 합창시간이다.
녹음한거 들어보니까 잘부르지는 않더구만 연습하는 그 순간은 제멋에 겨워서 아주 잘 부르는줄 알았다.
노래하는 순간은 더 행복하다.
노래 가사에 따라서 이런 저런 추억을 떠 올리며 아릿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은 정말 밥만 먹고 살지는 못하나보다.
뭔가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을 나는 금요일에 풀고 있다.
혜숙 샘 ~ 복 받을껴~~
3동에 놀러갔다가 옛날 이야기가 나와서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느끼게 된 사건 2.
일본하고는 상관이 없던 우리 막내는 어릴 적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젖었다"며 화를 내곤 했다
지가 뭘 안다고.ㅎㅎㅎㅎㅎ
<첫번 째는 곰솥 이야기>
대형 곰솥을 하나 동네 식기점에서 구입했다.
서양식 큰 시튜냄비다.
우리나라야 집집마다 다 있지만 일본사람들은 그리 큰 그릇을 사는 집이 별로 없다.
우리도 사놓고는 몇 달동안 한번도 쓰지를 못하고 있던 차에,
길에서 그 점포 여주인을 만났는데 우리집에 찾아가려고 했다면서 말인즉슨:
도매상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뭐가 잘못되서 불량판정 받은 솥 하나가 나갔는데 공장에서 조사를 하니까 그게 자기집으로 온거였다고!
자기집에서 그 냄비를 4개 팔았는데 그 중 3개는 확인을 했다고 한다
모두 이상이 없었으니 마지막 우리집에 간 게 필시 불량일꺼라고 쓰면서 이상을 못느꼈느냐고 한다..
그동안 한번도 안썼다고 하고 함께 집에 가서 조사를 해 봐도 별로 이상이 없었는데
둘이서 한참 보니까 손잡이 부근에 아주 작은 금이 보였다.
이 큰 냄비에는 뜨거운 것이 담길텐데 만에 하나 부서지면 대형사고가 난다고 너무 다행이라면서 곧장 회수해갔다.
불량을 회수하는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도 철저하게 판 곳을 추적해가는 시스템에는 감동!
<두번째는 목걸이 이야기>
이건 내가 겪은 건 아니고 옆에서 본 실화다.
이웃에 아주 친한 일본부인이 있었는데(아이들이 친구) 그 분은 요것저것 부업으로 화장품도 팔고 부탁받은 물건을
대신 사다주기도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 온 유학생부인 (나하고는 모르는 사인데 그분들이 또 잘 알더라구요)이
한국에 일시귀국할 때 선물한다고 귀여운 목걸이를 몇 개 부탁해서 가지고 갔는데
나중에 보니 목걸이줄 도금이 벗겨지더랍니다 (일본에서 중간에 사준 엄마가 발견).
이 분이 당장 그 목걸이 판 사람에게가서
나라망신을 시켜도 되느냐. 일부러 한 건 아니지만 새 걸로 다시보내라고 야단을 쳐서
모두 새걸로 다시 보냈다는 이야기! (우송료가 목걸이값만큼 든 걸로 알고있음)
이 대목에서 그 분이 한 말 : "손해봐야 이득을 볼 수있다"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더라구요.
일본상인의 저력이 느껴지는 부분이었지요.
마무리!
제가 살면서 언제나 노력하려고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실수를 안할 수는 없지요.
문제는 그 실수를 어떻게 마무리 하느냐에 따라 실수가 정리되고
때로는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는걸 모르는 분들도 있네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마무리는 하지않고 슬그머니 외면하는 미숙함은 그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더라구요.
모르지만 다른 선진사회도 같을꺼라는 생각입니다.
노일전쟁시 일본의 사령관이었던 노기장군은 명치천황이 몹씨도 아끼던 인물이었는데
이 분의 전기를 읽으면 특이하게도 이 분은 성공보다는 실패를 많이한 군인이었다네요.
그런데 이 분이 실패를 할 때마다 오히려 천황의 신임이 점점 깊어졌다고 합니다.
그 실패의 책임을 철저하게 자기에게 돌리는 그 군인다움에 명치천황이 몹씨 감동했다고!!!!
우리가 살면서 사소한거라고 느껴지는 어떤 의견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쓰다 달다 아무런 멘트도 없이 슬적 넘어가고 딴소리만 할 때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상당히 불쾌하지요.
그런 감정은 곧 그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해서 두고두고 토론문화의 미숙으로 치부하는 서글픔을 낳게도 하더군요.
어제 캄보디아에서 전화가 왔다.
재작년에 결혼식을 했던 사므디였다.
그 사이 아들을 낳아 벌써 8개월이나 되었단다.
이제 서른살밖에 안되었는데 아들도 낳고 장군도 된 청년.
너무 일찍 많은 것을 이루어서 조금 걱정이 된다.
앞으로 남은 긴 세월을 무엇을 향해 달려야 지루하지 않을꼬.
인생이란 것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 때 살 맛도 나는 것인데 말이다.
맞아~ 춘선아~ 공감이 간다.
꿈이 있는 한 인생의 정년은 없다고 했어.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꿈 꾸기를 멈추는것이 아니라 꿈꾸기를 멈추는 순간부터 나이가 드는 것이래.
그렇게 빨리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라면 아마 비범한 사람일꺼고 계속 자기의 꿈에 투자할꺼야.
나는 아직도 꿈이 있다.
대형면허를 따서 사랑하는이 들을 싣고
우리나라 구석구석 훑어다니는 꿈.
일주일 내내 면허시험장엘 가야 한다는데
고노무 일주일 내내가 걸려 못따고 있다.
시험을 봤다하믄 철커덕 붙을 자신은 있는데.......!
(ㅎㅎ꿈도 야무지지? 꿈꾸는데 세금 내는거 아니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는
더러워진 걸레를 빠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바닥을 닦는 것보다 걸레 빠는 것이 힘들어 청소를 기피하는 편이다.
특히 신발을 신고 다니는 현관이나
묵은 먼지가 잔뜩 쌓인 구석을 닦아내고 난 것은 만지기조차 겁나기에
되도록이면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닦는다.
그래서 요즘은 빨아서 쓸 수도 있는 짱짱한 종이타월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에 홈쇼핑에서 걸레를 하나 새로 샀다.
대만에서 발명했다는 이 봉걸레는 극세사로 만들어서 잘 닦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손을 대지 않고 간편하게 빨아서 쓸 수 있는 제품이다.
걸레를 통에 넣고 발로 돌려 원심력으로 물기도 짜고 때도 빼고 하는 과학적인 발명품이다,
나처럼 걸레 빨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사는 바람에
물건이 없어서 못팔 지경으로 대박이 났다.
오늘 시험삼아 써보니 정말 좋다.
닦는 것보다 걸레 빠는게 힘들었는데
그저 서서 발로 페달만 밟으면 깨끗해지니 완전히 거저 먹기다.
옥규야 ~
니가 쓰려고 했던 청소도구 변천사에 크게 한획을 그을 수 있는 물건을 내가 만났다.
물에다 세제와 왁스를 겸한 용액(MOP & GLO)을 풀어가지고 닦으니
힘은 하나도 안 들고
바닥의 때는 쏙 벗겨지고
마루의 나뭇결은 윤기가 반들반들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나처럼 청소문제로 고민하시던 분들께 강추 ~
(참... 쓸데없는 고민거리도 많았다. ㅋ)
옥규 곤히 단잠 자고 있을테니...
밤을 낮삼아 사는 이선옥 나왔다 오바
남편한테 간간히 내가 하는 말...
나~~ 먼지없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어~~~
깨끗한 화장실 살고 싶어~~~
진짜 진짜 소원이라구 ㅋㅋㅋ
근데 나는 걸레질 하면 손목 아퍼 ....
어쩌다 술잔뜩 마시고온게 미안할 듯한 담 날은
퇴근한 내게 묻는거야, 뭐 달라진 곳 없어??? 하면서 ㅎㅎㅎ
나는 어디? 어디?? 하며 못 알아 채구 ㅎㅎㅎ
그럼 으쓱대며 앞장서 보여주는 곳이 깨끗해져 있는거야 ㅎㅎㅎㅎ
때론 씽크대 도어들, 때론 작은 방, 현관, 뒷베란다, 책꽂이...
물론 전날 하신 짓이 미안한 다음날 선물이지 ㅎㅎㅎ
춘선이가 말하는 그 걸레가 좋아보여 쏠랑 주문했지
보송보송 깨끗한 우리집을 기대하면서ㅎㅎㅎ
새 걸레에 재미들인 남편은 틈나는대로 페달 밟아 걸레짜고 들락날락....
집안 바닥보며 내 맴이 아주 좋아요 ㅎㅎㅎ
집 완전 깨끔해 지는 건, 이젠 꿈이 아니야
근데 페달 그렇게 밟아대다 언제 부서질것만 같아요 ㅋㅋㅋ
나는 청소하는 동안 시원한 매운탕 끓이며 청소감독하며 따라다녀~~~
와~~ 깨끗하다~~~
이거 원래 남자용 맞네... 이러고 ㅎㅎㅎㅎ
요즘같은 발걸음 가벼운 날이 올 줄 내 어찌 알았으리
지금 병원이예용..
집중해서 만들 자료 있어서 주말 밤샘 중 잠시 break.
춘선의 청소걸레 소식 반가워 한자락 쓰고 가요
bye 친구야 ~~
어머 ~ 얘들아~
이런 반가운 소식이~
정말 걸레 빨기 징해~
나두 진공 청소기로 해도 걸레로 한바탕 닦아야 속이 시원하거든.
어느 홈쇼핑에서 산건지 빨리 자세히 쓰렸다.
나도 그거 홈쇼핑에서 보고 주문했더니 뭐 물량이 달려서 2주 이상 기다려야한다고 해서 그냥 취소했어.
페달 밟는게 편리해보여서 나중에라도 꼭 사야겠어.
화림아 어제 니네들 다 간다음에 유정이와 신나게 연주했어.
함께 하는 게 행복할 정도로 유정이의 소리가 돌아왔단다.
난 전보다 실력이 좋아진 줄 알았더니 혜숙이 말로는 그게 진짜 유정이 소리랜다.
예술에서의 음악은 감성과 지각과 철학을 소리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의 숙련과 번뇌와 고통과 희열의 반복은 인내의 고행이다.
누가 이 고행을 달가히 즐겁게 하느냐에 따라 듣는이의 심금을 울릴 수있는 것이리라.
최고의 극치는 스스로의 만족감이나,
이 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
아쉬움과 더불어 음악인은 앞으로 정진할 수있는 것이 아닐까?
순간예술에서의 찰나적 희열을 위해 그 얼마나 업을 쌓아야 하는걸까.
어제의 소리, 오늘의 소리가 내일의 소리로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한결같음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나는 요즘 위에 열거한 여러상념없이
듣고싶거나 연주하고 싶은 음악과 더불을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러기까지 오랜세월이 지났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육체의 노화와 더불어 생기는 정신적인 완숙함!
오랜세월이 지나야만 생기는 참 맛!
초로의 할머니(71세) 나루세 선생은 올해도 헌운동화를 모아 들인다. 그의 차 트렁크에는 매일 수거한
헌 신발보따리가 늘 실려 있고 어떤 근사한 자리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헌 신 이야기 부터 꺼낸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선생의 모교는 나가노현의 ㅇㅇ 사립고교인데 그 학교의 행사중 하나가 라오스에
헌 운동화 모아 보내는 일이라데.
해마다하는 그 일은 재학생과 동창회가 협력해서 벌이는 " 지구촌 사랑 나누기 "
(정식 타이틀은 모름)
요즘 한국이고 일본이고 어디나 할 것 없이 받는것만을 당연히 여기는 애들과 돈으로나
남 돕는 걸로 아는 어른, 그리고 입시에만 열 올리는 학교 교육에 피폐해지는 인성에서
' 눈 돌려 남의 딱한사정 돌아보기 ' 이라면 참 좋은 발상이다.
' 안 신는 운동화 있으면 주세요. 사이즈도 상관없고, 더러운것, 끈이 해진것도 괜찮아요.
아직 신을만 하면 됩니다 (야구. 축구 스파이크는 환영, 하이힐은 사양)'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한치건너 사람, 생판 모르는 사람의 것까지 모아들인 운동화를
학교로 보내면 재학생들이 더러운 건 빨고 해진 끈은 메이커에서 헙찬받은 끈으로 갈아
끼워 라오스의 낙후된 마을로 간다. 포장된 길은 고사하고 하수시설도 따로 없는 진창길
에 신이 없어 맨발로 다니다 다치고 그 상처로 균이 감염되어 다리마저 절단해야 하는
사람이 수 없이 나오는 가엾은 아이들에게로.
나의 모교도 그런 비슷한 일을 도모해 보면 어떨까.
우리끼리 옛이야기나 하면서 재밌게 놀자는 것도 나쁠거야 없지만.
누가 원해서든 아니든 같은 학교 교문을 나섰어도 어쩔 수 없이 골이 생겨 버린 인일 동문회
그런일로 동창회 윗세대나 젊은 세대나 재학생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차세대인 젊은 동문들 (3, 40대) 이 발 벗고 나서주고 그게 모티브가 되어서 동기끼리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동문 모임터인 홈페이지를 열어볼 연결고리가 된다면
그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저녁 나절 인일 홈페이지를 보다가
'영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글 ' 이란 문구를 본 후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어떤 글을 말하는 걸까?
어떻게 쓰면 영혼이 아름답게 느껴질까?
- 미사여구만을 나란히 늘어 논 글은 아닐 것 같고,
- 자갈밭 발길에 걷어채이는 돌맹이 처럼 진부하긴 해도 솔직한 글?
- 남이야 뭐라든 제 감정에 도취해서 읊어대는 건 좀?
- 보는 눈을 의식한 잘 포장된 글?
- 진솔한 글이 다는 아닌 것 같고 ?
글 써서 밥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지만
동문 홈페이지에서 기분 내키면 ' 나 잘 있소' 조로 몇 줄 쓰는 것 조차도
자신 없고 참 조심스러워진다. 그런 글은 죽는 날까지도 못 쓸 것 같고.
아이구 찬정이에게도 드디어 올 것이 왔나보다.
신종풀루보다도 더 확실하게 누구나 다 걸리는 홈피병!
빨리 앓고 털고 일어나라!
명옥언니와 찬정이가 日本 이야기를 가끔 올려 주는데, 일본 가수 노래도 한곡 들어 보실래요?
얼마 전(10월 17일)에 자살을 한 일본 포크가수 加藤和彦(가토 가즈히코)의 <임진강>이란 노래입니다.
임진강"(박세영 작사/고종한 작곡)은 남북분단의 슬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노래로 일본에서는 1968년
The Folk Crusaders(가토 가즈히코外)가 번역해 발매했으나 금지곡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영화 '박치기'(2004년작)에 나오는 곡으로, 남북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라 합니다.
영화 내용은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일본학생들과의 대립이야기? 청춘영화? 라는데 한번 봐야겠습니다.
1960년대 일본학생운동 절정기 때 데모 노래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고 하네요.
<The Folk Crusaders>
북한 시인 박세영의 글도 올려 봅니다.
림진강(臨津江)
-박세영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아름다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극히 개인적인 기준의 단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라거니 눈에 콩깍지가 꼈다거니 하는 것이겠지.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그 기준도 달라진다.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가치 기준도, 행복의 조건도, 성공 여부도 다 다르다.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마음도 그렇다.
어제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해서 눈물이 났는데
오늘은 너무나도 지겹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소외된 느낌에 눈물이 난다.
상황에 따라 휙휙 달라지는 마음을 들여다 보다 멀미가 날 때도 있다.
이 작은 마음 속에서 늘 가마솥 팥죽이 끓는다.
사람에 대한 감정도 그렇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요즘 나오는 어느 광고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래도 사는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급히 은행갈일이 생겨 집에서 입었던 옷에 코트만 걸치고 부랴뷰랴 집을나섰다.
근데, 은행문이 이미 닫혀있었다.
조금만 서둘러 나왔어도... 아쉬움을 가지고 도로집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왕 집나온 김에 진눈깨비내리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 보았다.
몇번 가보았던 카페로 들어가 앉는다.
일하는 사람이 그동안 바뀌어서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다.
가만히 잡지들을 뒤적이며 창밖을 쳐다보고 다시 잡지보고 그냥 시간에 몸을 맡겨본다.
근처 대학교의 학생들이 흘낏거리며 쳐다본다.
동양여자가 창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게 걱정스러운듯...
종업원이 닥아와서는 나를 여행자로 생각하고 영어로 주문받는다.
내속에 꿈틀거리는 장난끼를 누르지 않고 발산해본다.
여행자인냥 나도 영어로 주문한다.
아~~! 이럴때 해방감에 기쁘다.
내가 사는 곳에서 다시 여행자로 돌아가는 기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신선감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도 한참~~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돌아간다.
나도 이곳을 떠나 다시 진눈깨비내리는 거리로 나온다.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음악 디스크 파는 가게가 보인다.
들어간다.손님이 하나도 없다.
잠깐 가게를 돌아 보는데,
주인이 또 영어로 나에게 이것저것 소개한다.
아무말도 안하고Erik Satie CD를 찾아 집고
적혀있는 가격을 말없이 지불한 후 사가지고 그곳을 나온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 마다 나를 여행자로 생각하는 것이, 나를 생동감있게 한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Satie의 minimal music 을 들으며 기분좋게 무념상태로 돌입한다.
나는 한 때 크리스탈과 본차이나 그릇에 미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잘한 소품 주방기구와 예쁜 장식품에도 미쳐서
시장에만 가면 그것들을 구경하고 사들이느라 주머니를 탈탈 털리곤 했었다.
한 때는 또 예쁜 레이스와 고운 꽃무니 헝겊으로 집안을 꾸미는 것에 몰두하기도 했다.
온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레이스로 덮거나 두르고
커튼을 칠 수 있는 창문은 물론이거니와 벽에도 장식 커튼을 침대보와 세트로 해서 달고
탁자는 물론 의자, 소파까지도 색을 맞추어 천으로 씌우느라 분주했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늘 주머니가 달랑달랑해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싸게 살 수 있는지 궁리를 하고
발품은 물론 눈품, 귀품까지 팔기를 주저하지 않고 쇼핑을 다니곤 했다.
아이들 장난감이나 옷을 아주 싸게 사게 되면
무슨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환호를 지르기도 하고
당장 필요 없는 물건도 많이 깎아주기만 하면 무조건 사 놓고 쓰임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 소용이 없으면 남에게 주기도 하고.....
어제 대만 학생 집에 갔다.
곧 졸업할 학생이라 가기 전에 가정방문 겸 사는 얘기도 하러 갔다.
그녀는 나를 보자 다짜고짜 방으로 끌고 들어가 쌓아 놓은 박스들을 보여 주었다.
이삿짐으로 보낼 물건들을 산 것이라고 했다.
일일이 박스를 풀어 보여주는 그녀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여기서는 흔한 필수품들이었다.
홈쇼핑에서 사기도 하고
마트에 가서 사기도 하고
길에 서는 장에서 사기도 했단다.
값으로 치면 별것도 아닌 그것들을 소유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엔 그녀가 사들인 것들은 하나도 부럽지가 않고 달뜬 그녀의 표정이 더 부러웠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문득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살림살이를 사들이거나 집 치장을 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게 늙었다는 반증인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애써도 늙어 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잡함.
서글픔.
초라함.....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 간신히 편승하고 있는 니의 약함을 보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은 무엇에 미쳐서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이제는 무엇에 쉬 미쳐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 아침마당을 후반부만 잠시봤더니 대신증권의 본부장이라는 분이 나와서
주식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그 비유가 재미있었다.
주식투자는 풍선불기에 비유하고(욕심부리면 꽝 터진다고)
또 그 주식의 상승과 하락에 따른 심리 상태를 재미있게 표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시작할 때는 "어느정도만 모이면 그만할 꺼다 "라고 하는데 절대로 지키지못하는 이유.
배고플 때 떡을 먹는 것과 비슷해서 처음 한 개는 무척이나 맛있지만 배가 점점 불러갈수록 그 기분이 사라진다고 한다.
돈이니까 절대로 질리는 일은 없지만 처음 천만원을 벌었을 때의 감격의 농도가
두번째 천만원으로는 그보다 훨씬 못하다고.
처음과 같은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액수를 벌어야하기 때문에 어느정도에서 손을 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행복지수라는 걸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어제 뉴스에서는 두산그룹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고.........................................
가진 재산이 많지않아 감사한 하루였다.
ㅎㅎ 춘선 너도 그 걸레 샀구나~!
내가 탁선희 땜시 홈쇼핑 전화를 많이 하게 돠어서말야.
각 방송마다 이름 다르게 걸레를 팔더라구
한 곳에 전화해서 왔어 사무실청소 하려고 갖다 두었는대
뭐가 바쁜지 손도 안대고 있었어.
근데 양순이가 전화해서 좋냐고~ 자기 강의하는 학원에 사려고 한대
아직 안썼다니까 팔래~. 안된다고 하고 가져갈까봐 지금 청소했당~!!!
우리 막내는 정말 연구 대상이다.
매번 택배로 요상하고 새로운 물건이 배달된다.
어제는 한복이 왔다. 오늘 외국애들하고 파티가 있는데
빌렸댄다. 요즘 외국학생들 도와주는 동아리를 하는데
그 일땜에 학교를 가는 것같다. 하여간 신기한 아이다.
못보는 친구들을 위해 폰사진 찍어 전송하고 어떠냐고 묻는다.
얼마나 재미있겠냐는 큰애의 부러운 목소리도 들린다. ㅎㅎ
기다리던 단비가 아주 조금 오고 그쳐버렸다.
일기예보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전국에~~~~~~~~~~~~"
여기에 부산이 속한 적이 거의 없다.
서울 대전 대구까지 오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아마 6.25 때 점령당하지 않은 곳이라 특별대우 하나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년중 제일 썰렁하던 11월에 올 해는 무슨 행사가 이리 많은지 쉴 틈이 없다.
애들이 올 때까지 치우고 준비할 게 많은데 마음 뿐이지 도무지 힘이 딸려서리 ................................................
10대 아들이 어머니와 누나를 청부방화살인했다는 뉴스로 저녁 내 테레비가 시끄럽다.
엄마 명의로 들어 놓은 보험금 3억을 갖고 싶어서 그랬단다.
돈이 뭐길래.....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녀석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 되었다.
영혼을 돈에 팔아버린 괴물.....
나는 끝까지 사람으로 살다 죽어야겠다.
돈에 팔려 괴물로 변하지 않게 눈 부릅뜨고 정신 차리며 살아야겠다.
1편 - 다시 나갈 생각으로 자전거를 주차장 입구에 세워 두었는데
그 새에 소나기가 내려 안장이 홈빡 젖었다.
닦을 타올을 가지러 다시 들어가기도 구찮고,
남의 자전거 가고를 끼웃거려 뉘 자전거 가고에 들어있던 타올로 안장을 닦는김에
핸들도 닦고 나니 쭐적 젖어버렸다. 도로 넣어 두려다가 켕겨서 내 자전거에 넣어
갖고 갔다 오자마자 빨아 말려 다음날 신새벽 남 안볼때 그 자전거 가고에
재빨리 넣어두고 돌아서는데 간이 쫄렸다.
왜 남의 걸 쓰고 이런 맘 고생을 하는고 ~
사십여년전 노가리를 망각했었던가.
2편 - 내가 초등 삼학년때 우리가 사는 일본식 사택의 방한칸엔
황해도 출신의 미혼 여선생님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입이 심심할 적이면 싸리나무가지에 꿰인 노가리를 찢어 우물거렸다.
너도 나도 같이 우물 우물 그 선생님은 황해도 사투리를 써가며 우리 엄마와 수다떨기에 자주 시간을 보냈고 그럴때면 나나 우리 언니에게는 그녀의 방에 가서 놀라고 쫓아 보내서 그 방에 깔린 처네이불속에 다리를 묻고 '여성동아'의 연재소설을 읽곤했다. 그방 앉은뱅이 책상 밑에 보니 삐들 삐들 마른 노가리 포가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넣고 우물 우물 그 선생님은 말이 자취이지 밥만 끓여서는 우리 두레반상에 낑겨서 반찬은 그냥 우리꺼 같이 먹는 생활이라 그 노가리가 ' 남의 꺼'라는 생각이 없었던가 보다. 이날입때까지 가슴에 징처럼 박힌 그 일은 노가리를 먹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제 방에 쥐가 드나드는가봐요? " "아니 왜?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수? " "책상 밑에 있던 노가리가 없어졌으니 쥐가 물어갔나 해서요?" 난 못 들은 척 시침 뚝 뗄 수도 있었는데 "그거 제가 먹었어요." "아유 ! 그러면 다행이지. 난 쥐가 드나드는 줄 알고, 큰일났다 싶었지요. " 대수롭지 않은 일로 끝난 줄 알았더니 그날 저녁밥을 하던 우리 엄마가 나를 부엌으로 불러 " 왜 그걸 먹었니 ? " " 난 우리 자식들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 남의꺼' 에는 손도 대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구나 " 초등 삼학년 열살짜리 내 어린 소견에도 그 말이 얼마나 민망하고 챙피했던지, 오늘까지도 마음에 채찍처럼 알고 살아 왔는데 남의 자전거 바구니에 든 그까짓 후즐근한 수건에 손이 가다니. 각성. 대오 각성. 3편 - 그렇다고 내가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 앞이나 신호등앞 담배자판기나 음료수 자판기 아래 동전이 떨어져 있는 일이 종 종 있다해서 자판기 앞은 지날 적이면 자동적으로 눈이 바닥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요즘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공중전화를 걸고도 동전이 고스란히 다시 나와 '아이고 이게 웬떡이냐'하고 냉큼 챙긴 흥분도 잊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짜잘한 착복이 내 정직성에 똥칠을 한다고는 생각 조차 안한다. 그저 반백년 이리 저리 부딪히며 살다보니 서슬퍼렀던 각(角)이 마모된것일 뿐이라고 벅 벅 우기고 있으니 우리 엄마가 눈 감아 주는 수 밖에 없네. 백골이 진토된 우리 엄마가.
맞아.
공중전화 걸고 동전 도로 나오면 우째 그리 횡재한 느낌이던지.
대학시절 합창단 반주할 때다.
이대입구에서 버스타고 홍대앞 극동방송국에 가야하는데
그날따라 친구랑 둘이 탔는데 차장이 버스값 받으러 오질 않는다.
둘이서 킥킥대며 두고 보자고 했는데 끝내 오지 않았다.
정류장에 내려 차장이 눈치챌세라 막 뛰어가서는 뒤에서오는 테너파트 연대생에게 돈 안냈다고 자랑까지 했다
이 분 지금은 유명한 테너로 연세대교수가 된 최승태씨.
"의이구 참 내!
돈을 안 받긴 왜 받아. 누군가가 냈으니까 그렇지!
난 그래두 내릴 때 돈 내겠지 하고 지켜봤더니만 뭐가 그리 신난다구?"
그 분이 뒷좌석에서 우리꺼까지 내준거였단다................................................
아이 창피해~~~~~~~~~~~~~~~~~~~~~~~~~~~~~~~~~~~~~~~~~~~~~~~~~~~~~~~~~~
호호호~ 무지 재미있다.
진솔하기까지~
나두 아주 오래전에 괴기간에 괴기를 끊으러 갔다.ㅎㅎ
반근을 샀는데 (신혼때 인듯) 우리집 거의 다 왔는데 돈을 안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야 하는데 귀찮기도 했지만 슬그머니 합리화를 시키게 됬다.
나도 돈내고 물건 안 가져올때도 있는데 그냥 말아버려도 일부러 한 짓이 아니니 그렇게 큰 죄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 집 앞을 지날때 약간 캥기기는 했지만 그냥 저냥 일주일쯤 지났을때 그 고기값의 3배의 돈을 손해봤다.
정말로어떤 물건을 샀는데 돈만 내고 안가져 왔다.
가서 얘기하는데 왠지 내가 한 짓이 있어 못돌려 받을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인이 펄쩍 뛰어 그냥 돌아왔는데 그때 아~ 이게 바로 인과 응보구나 가슴이 저렸다.
그 다음 부턴 한푼이라도 뭐가 거저 들어오면 얼른 갖다준다.
한번은 생선을 사고 돈을 잊어버리고 안주고 왔는데 다음 장에 가서 주니까 주인이
당신같은 사람 첨 봤다며 콜라를 한병 사주더니 마시고 가란다.
전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난 상점이나 특히 노점상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다 주는데
마트처럼 큰 곳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지도 않지만 있어도 안 돌려준다.
노점상 할머니가 거스름돈을 너무 많이 주셨길래 밤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싶어서
다음날 일부러 먼 시장인데도 가서 돌려드렸더니 전혀 모르고 계셨다.
나이가 드셔서 계산도 잘 못하시더라구.
또 한 번 동래시장(동네가 아니고 고유명사임) 에서 거스름돈이 한 500원 더 왔길래 다시 올라가서
"저 계산이 좀 잘못됬던데요" 하고 말을 꺼내려는데 탁 막으며
"그런 걸 이제와서 이야기 하면 어떻게해요. 우린 몰라요!"
좀 밉살스러워서 그냥 가려다가 "500원이 더 왔던데......" 했더니 자기도 좀 머쓱한지 탁 잡아채서 가져가더라.
돌려주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그런가봐. ㅎㅎㅎㅎㅎ
고교 동기들이 며칠전 천둥 번개와 장대비를 뚫고
운길산 산행을 하고 와서
올린 사진을 보노라니
이런 글이 올라와있더군요.
갈림길 표지판에 오롯하게 매달려 있는 나무판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네요.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런 글을 베껴서 홈페이지에 올려도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내 어릴 적 기억의 한편과 많이 닮은 재미있는 글이라서 옮겨 봅니다.
지우라면 지우지요. 그까짓꺼 못 지울까봐.(주현미 노래?)
- 이 발 - (베낌)
아버지의 인생은 반토막 인생이었다.
담배개비도 두번으로 나누어 피웠고, 막걸리도 늘 반되를 받아다 드셨다.
초등학교 1학년 어느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나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징징거렸다.
그날은 학교에서 두발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동네 공용 바리캉을 빌려다가 우리 형제들의 머리를 손수 깎아 주었는데
때가 모내기철이라 내 머리 깎아 줄 엄두를 못 내셨다.
" 이 정신없는 시국에 무슨 애기들 머리통 검사시래냐? 오늘은 그냥 가고 돌아오는 공일날
해 준다니게 그런다. "
급기야 나는 눈물을 훔치며 집을 나섰다. 나는 마을을 돌아다닌 끝에 친구의 집에서
공용 바리캉을 빌려왔다.
바리캉을 들고 나타나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기름을 둘렀는대도 바리캉이 머리카락을 뜯다시피해서 나는 눈물을 질금거렸다.
온동네를 돌아 다니는 기계이다 보니 그럴만도 했다.
내 머리를 똑바로 세우는 아버지의 손길도 짜증으로 평소 보다 매웠다.
오른편 귀밑머리부터 정수리까지 머리를 반이나 깎았을때였다.
머리가 통째로 뽑히는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일어섰다.
" 안되것다. 일단 학교에 댕게 와라. 기계 고쳐서 이따 저넉에 마저 해 줄거구마. "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 보았다. 어머니가 옆에 섰다가 거들었다.
" 그라지 말고 이발관으로 보내시오. 저 머리로 으띃게 죙일 교실에 앉거서 공부가 되것소."
아버지는 떨더름한 얼굴로 내 손에 동전 200원을 쥐어 주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다시 쳐다 보았다.
" 오백원 인디라. "
" 긍게 시방 이백원을 안 주드냐? "
" 어린이 이발비가 오백원 이랑게요? "
" 아따 자석 ! 반은 깎었잖냐? "
아버지는 100원을 더 쥐어 주었다.
" 그거 깎아주고 제 값을 다 받으면 고것이 이발사간? 도둑놈이제. "
나는 울상이 되어 동전 세개를 쥐고 면거리로 넘어갔다.
나는 어른 두엇이 앉은 이발관 앞에서 추리닝 상의를 둘러쓰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버지의 억지대로 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이발사가 선행을 베풀어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스러졌다.
이발사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발을 한 다음에 돈을 내밀까? 잠깐 그런 궁리도 해 보았다. 그러자 얼굴이
홧 홧 달아 올랐다.
어른 손님이 물러간 뒤 나는 조용히 이발관 문을 밀었다.
바보같이 나는 손아귀를 펴 300원을 이발사에게 보여주었다.
" 아가, 나가 니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이. 니도 생각해 봐라. 대머리 깎아 주는디
면적 따져 돈을 받더냐? 뭔 말인중 알것제? 느그 아부지한테 나가 그러드라고
역부러 말해라이 . "
나는 이발관 의자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이발사는 돈도 돈이었겠지만 집에서 손수 이발을 해주는 촌사람이 얄미웠을 것이다.
나는 추리닝을 다시 덮어쓰고 교실에 앉았다.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머리에 둘러쓴
옷을 강제로 벗겨냈다. 교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고, 나는 아이답지 않게
오랫동안 통곡했다.
저녁에 아버지는 귓등에 꽂은 꽁초를 뽑아 말없이 태우셨다.
어린 자식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고 여기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일년에 쌀 한말씩을 주기로 하고 단골이발관을 잡았다.
우리 형제들은 그 이발관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언제든지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 베낀 글은 여기까지 ~
머리를 깎으러 가는 동생의 보호자로 울 엄마는 나를 딸려 보냈다.
이발을 할 놈이나 보호자로 따라 온 그 누이나 어리긴 마찬가지지만
우리 엄마는 이발을 잘 해줬는지 요리 조리 살펴보고난 후 돈을 치루라고 나에게
이십원을 꼭 꼭 접어서 주었다.
근데 이발비는 삼십원이었다.
돈이 모자란다고 그냥 돌려 보냈으면 어땠을지 몰라도 이십원어치만 깎아준다면서
대충 썩둑 썩둑 쥐뜯어 몰골을 우습게 해놨다.
알량한 보호자인 나는 돈을 모자라게 냈으니 당연한 결과로 알고 집에 오니
아이구 ~ 우리 엄마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 아니 ! 그놈의 이발사 못 쓰겠구나. 제대로 깎아놓고 '십원이 모자라니 나중에 가져 오너라' 고 했으면
어련히 갖다 줄 것인데 애들을 못 믿고 이런 짓을 해 보내다니. "
그 후 우리 식구는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그 이발소를 지나
다른 곳으로 머리를 깎으러 다녔다.
두사람(?) 머릴 깎이다 보니 쫌 길어졌어요.
나이드는 티내는것중 하나가 한 소리 또 하고 장황하게 늘어지는 거라해서
긴 글은 경계하느라 올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
찬정아~
잘 올렸어.
재미있게 읽었어.
가슴이 찡하기도 하고 ~
옛날에 비하면 우리 지금 엄청 잘 사는거다 그치?
근데 일본 음식점 왜 그렇게 반찬 인심이 야박하니~
샤브샤브를 먹었는데 건질거 다 건져먹고 국수까지 건져먹고 차라리 밥을 주지 말던지 입가심 하려고
밥 한숟갈 뜨려하니 반찬이라고는 달랑 하나 배추 절인것 아주 잘게 썰은것 한 젓가락~
그나마 밥이 안넘어가서 김차좀 더 달라니까 돈 더내야 한다네~
치사해서 그냥 밥 안먹었어.
우리나라는 음식 인심이 정말 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