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보기드문 늦가을 화창한 날이였읍니다.

 오전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는 행복한 마음이 그득했었지요.

 

전날 손주녀석 보낼 어린이집 날짜도 확정되어서 여유로워지고

앞으로는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갈 계획도 짜 보면 좋겠지 싶은것이

종합예술......칠순에 연극무대는 또 어떨가........그래 모노드라마 한판 만들어 굿판도 벌려보고

삼사년뒤에 일을 계획하며 즐거워서 밤새 뒤척이며  거창하게 꿈을 꾸었지요

그리곤  늦으막하게  일어나서는 창문넘어 멀리 보이는

뒤늦게 마지막으로   조롱조롱 달려있는 쳥양고추 생각이나서

"멸치볶음 만들어야겄다  서리맞으면 그나마도 구경못하는데"  혼자소리를 하면서 고추밭을

설렁설렁 들어섰었지요

우리집 채마밭에는 소로록 피여있는 고추꽃들뿐만 아니라

밭 가상사리 울타리에 아직도 호박꽃이 그득하게 피여있어 노란색을 뿌려놓은듯 했었답니다.

야채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애호박값도 만만치않다는데 둘러보니  역시나 기대한데로

애호박 서너개

반지르르 윤기를 내면서 달려있구요

호박꽃사이로 애호박 하나 따들자 무언가 나에게 달려드는게 있네요.

물론 몇걸음인가 뒷걸음쳤읍니다.

둥근막대 쌓아놓은걸 밟고 다리는 비틀리고

..........넘어지고  그리고 긴박한 시간들이 지나고

졸지간에   한달 보름여를  환자가 되어 병원 병실신세를 지게 되었답니다.

입원기간중 이십여일은 혼자 병실을 쓰다가 간병인이 돌봐주는 다인병실로 옮겨서 지내면서

한달여 기간동안  환우 할머니들과 함께 지낸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보려합니다.

 


  .........귀여운 도둑 할머니.........

 
 

항상 옆방 903호실에서는 끊임없이 다투는 소리로 시끌법석이다

"이놈의 할망구 기여코 그 세수대야 쌔비갔네그랴"

무언가 그릇 내던져지는 소리가 나고 "내그가 어느거시라를 후무치었다느가"

목소리는 얄망구진데 발음은 이빠져 새는 소리로 확실치가 않다.

뉴 XX병원은 말 그래로 새로 지어진 소도시 병원이지만 제법 시설이 잘 되어있어서

환자들 대부분 불편없이 치료를 받고 의료진들도 친절하다.

병원이라지만 이렇게 소란스럽고 자질구레한 사건이 종종 벌어져도

간호사라든가 간병인들도 큰 동요를 받지않는걸 보면서

이곳이 병원인가 하고 갸웃둥 고개를 젓게도 된다.

난 한동안은 904호 한층 아래 811호 2인실 특실을 얻어 간병인 없이 부부가 함께 쓰면서

결혼생활 40년만에  부부중에 한사람은 환자노릇에 또 한사람은 간병인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병원신세를 지게되었다.

 이 8층 병동의 병실은 

응접세트에 4인용 식탁도 놓여있고 중형 냉장고에 침대에 화장대겸한 세수간

샤워실겸한 화장실 또 부엌살림까지 할수있는 싱크대까지 설치해 놓은것이

요즈음 흔한 원룸아파트 꾸밈새랑 얼추 같아보여 크게 병원이란 느낌이 들지않을정도였다.

그렇게 이십여일을 이럭저럭 지내다 간병인 노릇을 하던 산이할아버지 드디어

감기몸살로 두손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일정을 간병인 병실을 찾아서 옮긴곳이

이 9병동 904호였다.

8병동에서 있으면서 가깝게 지내던 우리방 청소담당 아주머니는

 내 짐을 청소수레에 싣고 옮겨주면서 못내 아쉬워하신다.

인천만석동에선가 새벽 다섯시에 출근한다던 그 아주머니는 작은 체구에 항상

허리가 아프다면서도 그 힘든 청소일을 놓지를 못하나 그래도 자기는 아직도

일하는곳이 있어 행복하다고 누누히 이야기를 하곤한다.

산이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그 병실에 있는 일주일동안 틈틈이 혼자인 나를 도와주면서

이런저런 사사로운 이야기도 나누어서 그런가 나 자신도 먼곳으로 나가는것도 아닌데 웬지 섭섭하다.

또 다른 병실에 많은 환자들과의 만남도 걱정스럽고 두렵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층 올라오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면서 길기도 했으니말이다.

휠체어을 타고 엘리베이터문이 열리고 처음 본 9층의 광경은 전반적인 병원생활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순간이였다.

조용하다못해 괴괴했던 8병동에 고요함에서 벼란간 시장터에 옮겨진듯한

부산한 사람들의 바쁜모습과 부딪히는 순간을 생각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