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방지거 신부님과의 인연 /신금재


지난 주말 우리 성당에서는 특별한 피정이 있었다. 

"성령세미나"라 불리는 이 피정은 지난 목요일 저녁에 시작되어 주일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밴쿠버, 미국 등에서 여러 분들이 봉사자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셨고 많은 분들이 기쁨과 감동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특별히 신씨내티에서 오신 한 형제님을 통해서 나의 인생의 "라이프 가이드"였던 방지거 신부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더욱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국 미네소타에서 태어나신 방지거 신부님은 메리놀회 소속 신부님으로 청빈과 순명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은퇴하신 지금도 신씨내티에서 한인신자들을 돌보고 계신다. 

처음에 한국에 오셨을 때, 신부님은 작은 주택을 하나 빌려 공소를 시작했고, 본당 건물과 교육관을 신축 한 후에는 다른 본당으로 떠나셨다. 

처음 신부님을 만난 것은 병원에서였다. 
여고 2학년 때, 대장에 문제가 생겨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집안 친척 되시는 분이 기도를 해주기 위해 신부님과 함께 방문을 하신 것이었다. 

신부님의 방문 이후, 기도의 힘이었는지 (의술의 효능이었는지) 병세가 점차 호전되어 갔고 아버지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지켜 본 신부님은 겸손이 몸에 배이셔서 어느 누구에게도 존대말을 하셨다. 
때로는 한국말 발음이 잘 안되어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시고

학생들 모임에도 참석하셔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시고 좋은 이야기도 해주시곤 하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생산적인 사람" 이야기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소모적인 사람이 되지말고 생산적인 사람이 되라고

어느 날 저녁에는 모임이 끝나고 간식을 함께 하였는데 신부님께서 잡수신 사과를 보고 우리 모두 너무 놀라고 말았다. 
우리들이 먹은 사과는 씨방을 중심으로 아직도 하얀 살이 많이 붙어있는데 신부님의 사과는 거의 그 형체가 없이 가느다란 줄기 하나만 남아있었다. 

신부님이 입으시던 양복은 얼마나 오래 입으셨던지 팔끔치등 많이 닿는 부분은 반들반들 빛이 나고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게 되었고 몇 년 후, 신부님은 우리의 혼인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나의 삶을 이끌어 주셨던 분이신데

언제던가 
신문에서 신부님의 고희 잔치 소식을 보고 전화를 한 번 드린적이 있었다. 
반가운 목소리로 얼른 알아보시고는 가족들 하나하나 안부를 물으셨다. 

방지거 신부님. 
신부님 계시는 그 곳, 씬씨내티에도 따스한 봄이 오고 있겠지요. 
제가 사는 이 곳 캘거리, 로키산의 싱그러운 바람을 보내드리며 
주님 사랑 안에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