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甲寺

 

                                                                                                                                                                                                                 김 희 재

 


주일예배를 마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푹해서 그런지 눈이 제법 탐스럽게 내리는데도 도로에는 쌓이는 것이 없다.

 ‘눈 오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는 옛말이 문득 생각났다.

산에 가도 춥지 않을 것 같다.

눈 내리는 갑사의 풍경을 찍으려면 오늘이 딱 제격인데....’

함박눈을 보자 내 마음이 겁도 없이 갑사로 향한다.

 눈 내린 계룡산의 모습을 내 마음의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부탁하시던 분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편에게 계룡산 쪽으로 가자고 했더니 그도 선선히 핸들을 꺾었다.

눈이 오는 날,

길 미끄럽다고 서둘러 집으로 가지 않고 일부러 길을 나서 본 것도 드문 일이다.


동학사 입구와 갈라지는 박정자 삼거리를 지나자 눈이 그쳤다.

눈 구경도 제대로 못할 텐데 괜히 나섰다 싶은 후회가 잠깐 스쳤다.

다행히 갑사 일주문 앞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화려했던 이파리들을 다 떨어내 버린 앙상한 가지 위에

폭신한 흰 목화솜이 한 꺼풀씩 덧입혀지는 광경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장관이다.

특히 지난봄에 왔을 때 그리 아름다운 노랑과 연두의 향연을 연출하던 황매화 가지 위에

눈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것이 반가웠다.

나도 나무가 된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눈을 맞았다.

도로 아홉 살 아이가 된 기분이다.


아침 내내 공들여 매만진 머리에 눈이 쌓이는데도 나는 우산을 찾거나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길옆에 늘어선 나무들 이름표까지 유심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동안 갑사를 많이 찾아왔지만 이렇게 함박눈을 맞으며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산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처럼 아무 장비 없이 산보하러 온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거의가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허위허위 올라가는데 그들은 부지런히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하기야 오후 세시가 넘었으니 겨울 산을 오를 시간은 아니다.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니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부산해 보인다.

우리도 금잔디고개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 대웅전 옆 계곡에 있는 전통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예 영업을 접은 것 같았다.

이 찻집은 조선의 마지막 왕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순종의 두 번째 부인)의 중부(둘째 큰아버지)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의 별장이었던 기와집을 개조한 것이다.

가게 운영은 절에서 직접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내에 있는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이 좋아서 나는 일부러 여길 찾아오곤 했었다.

특히 탁자에서 굵은 양초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제 몸을 불사르는 것이 좋았다.

촛불을 앞에 두고 감초향이 진한 한방차를 한 모금 마시면 따뜻한 기운이 온 몸과 마음에 확 퍼지고,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당하듯이 마음이 확 풀어지곤 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이곳을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많이 활용했다.

간혹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나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과 진솔한 대화가 필요할 때도 찾아왔다.

더러 마음이 몹시 울적한 날엔 혼자 오기도 했다,

어떤 마음으로 찾아오든 여일하게 반겨주는 찻집 주인과 계곡의 풍광이 편해서 정말 좋았다.


특히 창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가장 좋아했다.

창가에 앉아서 계곡을 내다보면 새, 다람쥐, 나비 같은 숲속 친구들을 보게 되고,

도시에서 만나기 힘든 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게 되어 좋았다

 

찻집주인은 꽁지머리를 길게 묶고 수염까지 부숭하게 기른 노총각이었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눈썰미가 있어서 단골손님의 취향도 잘 파악했다.

꽁지머리 총각은 내가 문에 딱 들어서면 얼른 일어나 창가자리로 안내하곤 했다.

주인장이 직접 끓여내는 차도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장사도 제법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왜 그만두었을까?

간판도 떼어버려 여기가 찻집이었다는 흔적조차 없다.

그저 작은 기와집 한 채가 쇠락한 모습으로 계곡에 버려져 있을 뿐이다.

단골찻집 없어진 것이 너무 서운해서 발길을 쉬 돌릴 수가 없다.

내 소중한 보물 하나를 잃은 것처럼 서운하다.

그곳에 남겨둔 내 젊은 날의 숱한 추억들이 완전히 소멸해버린 것만 같다.

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함박눈이 점점 더 굵어졌다.

 


찻집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휘돌아 가면 자그마한 선방이 나오고,

그 앞에는 원숭이도 기어오르다 떨어진다는 커다란 배롱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끈한 나무껍질을 손으로 쓸어보곤 했다.

워낙 나뭇결이 단단해서 마디게 자라는 나무가 이만큼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까.


사람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찌 보면 나무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저 한 시절 빠듯이 살고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하지만,

나무는 수없는 세월을 거뜬히 이긴다.

완전히 죽은 듯이 앙상해져 있다가도 봄이 되면 보란 듯이 회생하여 한 시절을 새로 사니 말이다.


선방에서 갑사의 보물인 철 당간 지주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능선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언덕 양옆에 도열해 터널을 이루었던 대숲 길도 예전 같지 않다.

대나무를 거의 다 베어내고 길을 넓혔다.

그래도 가파른 길이라 한달음에 내려가기는 버겁다.

눈발은 어느새 물기가 많은 싸라기로 변하여 갔다.

나는 행여 미끄러질세라 그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대나무 길을 내려왔다.

그의 언 손에 내 온기가 전해지니 오히려 내 마음에 훈기가 더 그득하다.

하산 길 내내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처음 잡았던 그때처럼.


집으로 오는 길엔 거짓말처럼 눈이 그쳤다.

말갛게 씻긴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차는 씽씽 잘 달리니 좋고, 내 마음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려서 좋다.

 

 

 

 

 

 

 

김희재 : 계간수필 천료 (1998). 계수회, 수필문우회, 한국문협, 국제PEN 회원.

미국 플로리다 탈라하시 한글학교 교장. 한남대학교, 육군대학교 한국어강사 역임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러시아와 북유럽여행기 <끝난 게 아니다>

4인수필집<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 외 공동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