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재미있고 좋은 글이 5편이나 더 있는데 복사가 안되어 아쉬웠다.

모처럼 더위가 가신 비오는 주말에 커피 한 잔 놓고 영한이의 글을 읽으며 모아서 옮겨 봤는데

영한이한테 혼이나 안날런지?



     우리 아버지

                        글쓴이 : 김영한


우리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술을 많이 좋아 하셨다.

우리들 모두 주변의 누구 하나쯤은 너무 좋아하는 술 때문에

골치 아파 하던 기억이 있을 듯하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도 남편도 너무도 그 '알콜'의 사랑을 떨치지 못하니

질투(?)를 해 봐도, 먹는 이에게 잔소리를 해 봐도 쇠귀에 경 읽기다.

아마 앞으로는 아들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 예감에 정말 걱정이 된다.


아버지는 작년 이맘때부터는 밥 보다 소주를 더 많이 드시는 것 같았고

칠 년 전에 위암으로 위를 반 이상 잘라 내었다는 것도 아무도

기억하고 살지 않을 만큼 밥도 술도 다 잘 (?) 드셨다.

나이가  칠십 중반을 넘어 자식도, 아무도 아버지가 돈 벌이 하는 것을

기대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직업(한의원)을 계속 하지 않으면

엄마나 다른 아이들 (막내 까지 다 출가 했는데도)이 굶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면 집 유지도, 체면 유지도 못하고 살 것처럼  걱정을 하며 사셨다.

아버지가 부평 추모의 집으로 이사하신지 오늘로 아흐레가 되었다.

외우기 좋게(큰딸은 벌써 건망증이 심하니까) 제사날도 음력으로

크리스마스 날로 정해서 가시기 전에 정리를 잘 해놓고 가셨다.

그 날 낮에는 아들과 목욕하시고 평소 끼고 계시던 시계와  반지는

빼놓고, 불편하다고 잘 안 끼고 계시던 틀이는 다 맞추어 끼시고

(그래서 염할 때 보니까 얼굴이 반듯했다) 서류 정리 다 해놓고...


우리 자매들은 추모의집 (뼈 항아리를 10년간 보관해 주는 집)을 나서며

또 주책(?)들을 떨었다.

'아버지 옆집 들어있는 사람 누굴까? 혹시 예쁜 할머니면 엄마 어떡할 꺼야?'

'엄마 재취 아니냐고 하더니  이제 과부 소리도 들어보게 생겼네'

'야! 아버지 밤나들이 하러 나오시면 이 동네 술집, 김밥 집 별별 집 다 있어 좋겠다'

아버지 앞에서 하던 짓 안 계셔도 계속이다.(참 콩가루 집안이다)


난 이제 처음이다. 아직도 세분이 남아계시다.  다음 번호는 지금 잘 못 걸으시는

시아버님이시지만 사람의 운명은 꼭 나이순으로 가는 건 아니니 알 수 없다.

우리 친구들 댁에 갑신년 새해는 집안 모두 좋은 일 넘치고 어르신들도

순서 어기지 않으시고 건강하고 품위 있게 사시다가 편안히 가시기를 기원한다.





         군대 간 아들에게서 메일이 왔다

                                          글쓴이 : 김영한


상병이 되었다더니 이제는 컴퓨터, 인터넷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이다.

입대 초기에 제 메일에 엄마의 위문편지를 보냈더니

(메일은 당연히 못 받을 것 알았지만 그걸 프린트해서 편지로 보냈다)

내무반 친구들이 '니 네 엄마 멋지다'를 연발 했다고.

통신병이라 특별히 가능한 것은 아닐 테고 역시 세상은 조금씩은 변하나보다


내가 강원도에서 군대 있을 때(?)- 10년 전- 는 군인 가족의 개인 편지도

검열 되어 사는 곳, 찾아오는 길, 주변 경치들을 적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도 중간에 행방이 묘연해지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운전 중인 사모님에게 헌병이 얼굴 알아보고 인사하던 때이긴 했지만

지금은 전방에서도 컴퓨터 안 쓰고 살긴 힘들 테니 많이 달라졌겠다.


남자들 셋만 모이면 군대 이야기 그리고 축구 이야기 한다고 하여

여자들이 제일 재미없어 하는 것이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라는데

그도 그럴 것이 군대라는 곳이 '내 머리'는 필요 없는 곳이고(명령에

의해 살아야하니까) 그 곳에서 하는 축구라는 것도 TV에 나오는 멋있는

축구가 아니고 '그저 공 따라 무식하게 뛰는' 부상을 무릅쓴 고행이니

여자들이 재미 없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모이면 열심히 그 이야기들을 한다.

'그 시절'을 함께 겪은 이들의 '몸(가슴이 아니고) 아팠던' 추억인가보다

이제 겨울도 지나고 전방 병사들은 지겨운 '눈 치우기'도 조금 덜어질

때가 되었다. 3월 5일은 경칩이라고. 아버지 49제 이기도 하다.

경칩에는 개구리도 뛰어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나도 맹꽁이처럼 슬슬

기어 나가서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야겠다.

그리고 옛날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 만나면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도

들어주어야겠다.





           돋보기를 쓰고

                                   글쓴이 : 김영한


일찍부터 책 읽기를 즐겼던 것은 젊은 시절에는 이성을 사귀는 데도 서툴렀고 다른 즐길 거리가 적어서이기도 하고

자잘하고 흥미 없는 집안 일거리에 무심하여서 이기도 했다.

매일 쓸고 닦고 밥과 찬을 만들고 빨아 널고 걷어 개어 넣는 일은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다 해주셨고 혼자 살 때가

되어서는 그저 살기위해 최소한으로 하여 사는 곳이 짐승우리를 면 하면 그 뿐, 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상대를 위해

그 일들을 즐겨서 한다지만 내 경우엔 그런 일도 그다지 힘쓰지 않고 그 시간들을 아껴 책을 들고 앉아 보냈던 젊은

시절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반백이 되어 머리도 녹슬고 눈도 어두워져 물건들이 하나로 보이다 둘로 겹쳐 보이기도 하고

흐린 날에는 책 페이지 위로도 안개가 몰려다니기도 한다.


견디다 못해 자존심 꺾고 돋보기를 두 개나 맞추어 하나는 가방 속에, 하나는 책상위에 놓고 쓴다.

어떤 때는 집 안에서도 간 곳마다 필요해서 찾아 헤매기를 여러 번 하니 이제는 몇 개 더 해서 컴퓨터 앞에도, 신문 보는

거실에도 하나씩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변소에는? 부엌에는? 아니 이러다가는 온 집 안에 돋보기만 늘어놓고

살겠구나!)하는 생각에 두 개로 만족하기로 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면 작은 글씨도 잘 보이고 사전 글씨도 천천히 읽을 수 있다.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재미난 것을 한 두 시간 읽는 것은 아직도 즐겁다.

그런 돋보기가 오늘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책을 받치고 보던 내 손을 보니 어쩌면 그리도 크고 두껍고 쭈글쭈글한 주름도 많고 검은 잡티와 굵은 마디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내 손을 만지며 곱고 부드럽다고 말하던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지금 좋은 눈으로 손을 들여다본다면 그 때

그 말을 모두 취소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얼른 돋보기를 벗고 다시 손을 보니 아직도 그만하면 그다지 흉하지는 않은 손인데...

아 ! 이렇게 덜 보이는 눈으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앞으로 거울 앞에선 절대로 돋보기안경은 쓰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눈 좋은 젊은이들에게는 함부로 손을 내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래도 가끔은 주름진 손이라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서 악수하고 손잡으며 살 수 있다면 훨씬 행복할 것 같다.



                      
                       밤나무의 꽃

                                   글쓴이 : 김영한


어제는 시댁이 있는 곳에 다녀왔다. 아버님이 고성근처 치매 병원에 계셔서

혼자 계시는 시어머님 뵙고 병원에도 들러서 오려고 떠난 길이니 마음이 소풍 가듯

할 수는 없는 길인데도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났는지 뻐스 타고 달리는 중에는 그

모든 것 다 잊고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 구경과 지나는 길의 새로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충청도 길을 지나가니 생물학적(?) 향기가 도로 가득했고 그 냄새는

근처에 보이는 곳 마다 피어 있는 밤나무 꽃에서 오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에 아는 이들과 함께 이맘때 쯤 교외로 나갔는데 문제의 그 밤나무 꽃이

잔뜩 피어 있는 곳을 지나며 산책을 하게 되었다. 난 그 때 까지도 참 멍청하여

그 냄새가 무엇과 비슷한지 전혀 몰랐고 그래서 일행들의 교활(?)한 질문에

바보처럼 대답을 해서 한동안 놀림감이 되고 말았었다.


그런 외설스런 생각, 좀 쾌적하지 않은 냄새 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눈으로

꽃이 덮인 밤나무를 보면 참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푸른 나무가 겨울처럼 눈을 덮어쓰고 있는 듯 보이기도하고 가까이서 보면

나무 끝마다 별이 달린 듯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초여름 푸른 산에 군데군데 모여선 꽃 핀 밤나무들의 특별한 모습은 늘 즐거움을

그리고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한때 강원도 원통 산속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집 마당에 아주 큰 밤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밑에 평상에서 여름에 우리 집 남자와 옆집 남자가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며 "저 이들 도끼자루 썪는 것도 모를 것 같다는 옛 이야기 주인공들 같다"고

옆집 부인과 같이 웃었고, 봄 날 아침이면 청설모가 그 위에서 우리 집 강아지를

놀리며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다 가는 것도 즐기며 살았다.


가을 날 알알이 벌어진 밤이 양철지붕으로 떨어지면 "떽떼구르르르" 소리도

요란하여  아이들은 "밤 떨어졌다!!"하며 달려 나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바람 부는 밤이 지나 새벽에 나서면 마당 가득 밤송이가 떨어져있고 부지런한

새벽기도 다녀오던 옆집 부인은 "기도 잘 하면 일용할 양식은 주시네"하며

주은 밤을 까서 우리 집으로 가져와 나눠 먹곤 했다.


이제 시골집에 있는 밤나무 감나무는 주인이 누워 있으니 딸 사람도 없다.

어머님 혼자 그걸 다 딸 수도 없고 도시 나가 사는, 먹고 살기 바쁜 자식들이

어쩌다가서 하루쯤 가서 따 봐도 아버님 계실 때 같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나무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꽃을 피고 열매를 맺는다.

까치를 위해서 그리고 청설모나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서....





              가을 편지

                                글쓴이 : 김영한


아침 아홉시 반 동인천역 플랫트 홈 7-1 번 앞에 서면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트럼펫 소리가 들립니다. 철길 옆 옥탑 방이 보이고

그 방에 어떤 나팔수가 사는지 아침 그 시간이면 나지막한 트럼펫이 울립니다.

아마도 오늘 밤 어느 카페에서 아니면 어느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겠지요.

입술이 부르터 가며 얼마나 오랜 시간 연습했을까.

소리는 고르고 차분합니다. 감정의 분출도 사상의 선동도 없는

오직 그대로 나팔소리 만으로.


요가를 시작해 허리를 비틀고 척추를 뒤로 구부려 사지로 버티고

몸으로 시냇물이라도 건네어 줄 듯 한 다리를 만들고, 호흡을 고르며

창밖에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를 쳐다봅니다. 다행이 첫날부터

모든 동작이 가능해서 편안하게 몸을 쥐어짜고 비틀고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팔다리는 혹사당하는데도 머리는 즐거운 생각을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흙을 주무르며 놀러 다닙니다.

칠십 넘은 어머니도 함께.


어머니는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드시고 (항아리, 접시, 화병 등)

나는 쓸데없는 물건만 만듭니다.(풍경, 연적, 기타 조형물)


남편 말에 의하면 내가 산업 폐기물만 늘리지만 내가 만든 물건을

받아 주는 이 있어 고맙고, 주무를 수 있는 손이 즐겁고, 뭘 만들까


고민하는 머리가 행복 합니다


추석에 내게 문자 보내준 이에게 드리는 답장 입니다

모두들 편안하고 행복한 가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생명은 어김이 없고....

                                      글쓴이 : 김영한

지난 9월 초,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남 쪽 어느 곳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도요지를 돌고 양념으로 절도 한 두 군데 들렀지요.

전라도 어느 곳이었는데 처음 보는 신기한 꽃이 있었습니다.

한 두 송이가 아니고 무더기로 피어 늘어서 있는데


새빨간 색에 잎은 없고 초록색 굵은 줄기를 가진 매혹적인 꽃이었습니다.

산 나리꽃 보셨죠? 그런 모양에 색이 정말 빨갛고 수술이 엄청 긴 ...

말로 암만 떠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상사화라는군요


대가 올라와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그 때부터 잎이 나기 시작해

꽃과 잎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는....

그래서 가정에서는 집안 금실이 안 좋아 질까봐 키우지 않는다고 하네요.


내가 하도 좋아하며(뿅가서) 쳐다보니까 같이 간  남자분이 씩 웃고 지나가데요.

그러더니 뻐스가 떠날 때 슬그머니 손바닥에 뭘 올려놓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조그만 알뿌리 두개, (그리고  뻐스에서 "아이구!! 금실 같은 거 벌써 물 건너갔어,

꽃이 무슨 상관이야, 나 좋으면 기르는거지.) 들꽃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맞아요 나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심하게 말해 볼 까요 "아휴 이혼해도 좋겠어, 보상금 두둑히 준다면....ㅋㅋㅋ"

집사람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지만 그게 꽃하고는 별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걸 가져다 심었는데 영 소식이 없다가 두 달도 더 지나 싹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걸 준 이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아래와 같이. 봉창 뜯는 소리였습니다.



    -@^^*&  선생님께 -


갑자기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올 듯 기상대 예보관들은 겁을 줍니다.

남향으로 난 베란다에는 햇빛이 더 깊이 들어와 눈이 부신데...


죽은 줄 알았던 상사화의 잎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콩알만한 알뿌리를 진흙에 거름도 않고 심어 한 두 번 물만 주고

다른 화분 뒷 쪽에 숨겨 놓았더랬습니다.

정말 살아날까 하고.


철 없는 아이 같은 남편이 그 화분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못 참고

물주고 나서 윗 쪽의 흙을 조금 걷어내 보았더랍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싹이 나와 자랐다고 좋아 했구요.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 확실하고 양파 꼭지 같은 싹이 보이고 있습니다.

꽃 지고 난 다음의 잎이 나는 것이겠지요.


아홉 살 까지 소도 키웠다고 하고 아버님의 시달림(?)을 받으며 중학교 때까지 농사도

도왔다는 사람이 어떤 때는 화분 만지는 걸 보면 참 철부지 같습니다.

잘 자라는 단풍나무 가지를 터무니없이 잘라 놓기도 하고 흙을 꾹꾹 눌러 쓸데없이

다져 놓지를 않나 아무 때나 (땡볕 나는 한낮이나 장마 때도) 무차별로 물을 주기도하고...


젊은 시절에는 그런 걸로 많이도 싸우고 내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화분 만지며 사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농사(죄송...)는 지을 줄 몰라도 꽃은 잘 피워 내며 살았는데

그 사람은 왜 그리 화분을 가지고 아직도 일을 저지르며 사는지...


이제는 가지가 많은 나무나 키 큰 화초는 없고 바위에 붙어 자라는

콩란, 풍란, 바위솔, 바위취 들이 있습니다.-자를 일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좀 내 맘에 거슬리는 짓을 해도 "에구구 또 저질렀구나"하며

저 혼자 삭이고 마음 비우고 "화상아, 그건 좀 가만 내버려 둬라.

혼자 좀 자라게" 한마디 하고 잊어버립니다.


그 사람 관심권에 들어갔으니 상사화 싹도 이 겨울 지나 다음 여름 견뎌 꽃을 피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의 사랑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꽃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은행나무 같은 사랑도, 상사화 같은 사랑도, 소나무 같은 사랑도

모두 아름다운 삶이겠지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다면...




                 남쪽의 늦가을

                                      글쓴이 : 김영한

11월 초하루 아침 일찍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 무주~진주 고속도로는 산마다 가지각색 단풍으로

올해의 절정을 보여주고 진주~ 반성면 지방도로는

날리는 은행잎으로 황금 눈이 날리는듯했습니다.


한해에 두 번이나 염습하는 모습을 보며 경기도와 경남의

상례의 다름도 구경했고 요즈음 실제로 보기 쉽지 않은

상여 나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광목 치마 저고리 입고

들으니 상두꾼의 노래가 음반으로 들을 때와는 좀 다르기도 합디다.


옆집 아주머니가 "애들아~ 곡 해라" 할 때 까지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다들 코러스처럼 리듬 맞추어 "아이고 아이고" 하기도 했고

포크레인이 순식간에 파놓은 광중에 치마폭에 흙 담아 뿌릴 때는

정말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실감나기도 했습니다.


웬일인지 아무도 통곡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상이라는

말도 하는가 봅니다. 집 근처에 있는 절에 영정과 상복을 두고 와

저녁에는 집에서 형제 자매 며느리들 다 모여 술도 먹고

가진 우스개 소리 다하고 어머니를 웃기고 ...그랬습니다

간간이 어머님은 아버님 옷을 태우러 용대미 (집근처 계곡)위로

혼자 가셔서 울고 오시지만 아무도 따라가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구요.


일주일 만에 첫 재를 올린 후 자식들은 모두 뿔뿔이 제집으로 갔습니다.

혼자 남으신 어머님은 이제 병간호 안하셔도 되어 한가해 지셨지만

그래서 우리하고 같이 만의골 은행나무 보러 가자고 해도 안 오시고 혼자 남으셨습니다.

친정어머님만큼 시어머니도 늘 건강하셨으니까

잘 견뎌 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골 텃밭에는 채소도 많고 털복숭이

강아지도 있고 알 잘 낳는 갈색 닭도 있으니까요.




                      되기-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글쓴이 : 김영한


작년부터 내가 참여하고 모여서 노는 그룹에 노마디즘이라는 명칭이 붙은 모임이 있다.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사상"을 쓴 '천의고원'이라는 책을 우리나라 '이진경'씨가

자신의 강의로 묶은 책 이름이 '노마디즘'인데 그 책 노마디즘을 한 단원씩 함께 읽고

주제에 맞춰 토론(그냥 수다 떤다고 보면 됨)하고 끝나면 밥 먹고(이게 더 중요함) 그러는

모임인데 미술과 선생님 서 너명, 공연예술 담당공무원, 변호사, 화가 몇 명 등등이야.

난 거기서 "그냥 가정주부에요"를 늘 외우며 내 소개를 하지(신입회원이 올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랑스의 철학자들인데 "사상"에도 왜 유행이라는 것이 있잖아.


19세기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유행했고 그 핵심은 오이디프스 컴플랙스이고.

하지만 모든 정신의 "문제들"을 성의 욕구에서, 그것의 충족될 수 없음으로 인해

발생하고 그로 해석하는 상황을 이들은 반박하는 "안티 오이디프스"를 주장한 사상이지.

그러나 그 생각들을 펼쳐가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특색 있는" 언어와 개념이 나오고

그건 요즈음의 문학, 미술, 음악, 공연물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유행사상"인 셈이야.


그 생각들의 한 꼭지로 "되기"라고 번역한 개념 인데 어린이-되기, 여성 -되기, 쥐-되기

등등 인간이 머리로 가능한 모든 '되기'들을 이야기 하고 있지. 핵심은 더 나은 되기.

지금의 나 보다 내면으로, 외양으로 모두 더 나은 그리고 내가 정말로 욕망하는 내가 되기.


지난 육개월간 요가를 하면서 느낀건데 "낙지되기"를 하면 몸은 정말 유연하고


부드러워지겠지만 그 유연해진 몸으로 뭘 해 볼 건지....

부드러운 몸을 어디다 쓸 건지 그것이 이제는 문제가 되고 있구나.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아는 것 그걸 알고 난 후에 뭔가가 "되기"를 해야 쓸데없는

낙지가 되는 걸 면하겠어. 다리가 앉은 채 옆으로 일자를 만들어도, 머리대고 거꾸로

서서 오 분을 버틸 수 있게 되었어도 그게 내 행복에 관련이 없다면?

좀 생각해 보고 다시 쓸게



                          문화쎈터 풍경

                                                  글쓴이 : 김영한

며칠 빠지다가 오늘은 요가를 하러 갔더니 웬 스님들이 많이 차 마시고 있다.

알고 보니 동안거 해제 날이라 수원 용주사 스님들이 나들이 나와 우리 문화센터에 구경

왔단다.

사실은 이 절에 계신 만나보고 싶은 스님들도 뵙고 오랜만에 외박도 하는 소풍인 모양이다.

난 중도 아니고 신자도 아니라서 몰랐지만 그들은 아마도 유명한 스타급 스님들이었던

모양이다.


그중에는 참선 요가를 처음 보급하기 시작한 스님도 있었다.

우리를 가르치는 여자 보살(지도자)도 그 스님의 제자란다.

자신이 중 되기 전, 육체미 대회 선수였다던 그 스님은 그런데도

몸이 굳어 있어서 "중 시작하고 몇 년간은 죽기보다 어렵게 살던"

이야기를 들은 뒤에 우리는 평소처럼 엎드렸다, 뒤집었다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그 시간에는 수련생이 아니면 남에게 구경은 시키지 않는다.

스님들은 한동안 앉아서 구경하다가 끝나기 전에 모두 일어나 내려갔다.

원래 요가를 하는 중에는 호흡에만 전념하고 딴생각은 없어야 하는데

오늘은 머릿 속에서 온갖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나 뿐이 아니었나보다.

머리 깎은 남자들 (중이지만) 앞에서 움직이다가

요가 끝나고 나니 다들 한마디씩 한다.


"아휴 스님들 계셔 목소리 죽이느라구 혼났네"-평소 목소리 큰 선생.

"오늘 따라 왜 허리도 안 돌아 가는거야, 잘 되던 것도..."- 반장엄마

"스님들 구경하기 재밌었겠다. ㅋㅋ 배나온 엄마들 많아서"- 뚱보 아줌마

정경스님은 (개그 콘써트 안오봉 목소리로)

" 그게 뭐~니 ! 그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 나




                   [스크랩] 왜곡되지 않은 행복

                                                  글쓴이 : 김영한  

요즈음 약 6개월 동안 요가를 하러 다니고 있다.

처음 시작은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목적이었지.

지금보다 내 몸이 더 강해지고 아프지 않고 사지가 잘 돌아가게

만들고 싶어서. 처음 시작 할 때 보다 차츰 강도를 높여갔고 몸을 시험해 보며 발전해

갔지. 안 펴지던 팔다리도 펴지고 허리도 많이 비틀 수 있게 되고.

그런 것 들은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여기서도 자본주의 상업성이 유행을 타고 문제를 만들지.

분명 요가의 기원은 아슈람, 절 등의 수도처이고 그래서 그 활동은

세속의 섹시함이나 육체미와는 거리가 있는 활동인데 웰빙 바람을

타고 TV에 보이는 요가는 거의 포르노 수준의 그림이 되는구먼.


팔등신 모델이 얇은 선정적인 옷을 입고 야한 자세를 보이는 사진을

많이 보여주고 있더군.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회색 통바지 입고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수련을 위한 요가는

TV그림처럼 멋있지도 않고 지도자 없이 할 만큼 쉽지도 않은 것인데.


어떤 일이든 바른 목적과 목표가 필요 하지. 그리고 그 못지않게

수행해 가는 과정 자체가, 바르게 진행해 가는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도 많이 있어. 특별히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봉사, 공부, 예술, 인생자체의 많은 부분들이 그렇지.


"원룸에서 지내"하면 세련된 삶인 것 같고 "단간 방에서 산다"면

꽤 가난하고 모자란 듯 느껴지는 우리네 의식 속에서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있는 그대로 보일런지.......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삶은 왜곡되고 있어. 왜곡된 시각은 의식을 지배하고 그에

지배받아 휘둘리는 삶은 내 곁에 있는 행복을 제대로 누리기

어렵게 한다. 아주 가까이 있는 행복한 삶을.  



                   새우난과 할미꽃

                                   글쓴이 : 김영한

봄이 무르익었다.

사람의 삶도 세월 지나며 무르익어 가끔은 그 향기가 진하다.

예전에(나는 지금은 안한다) 함께 그림 그리던 사람들이 있다

한국화 화가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십여 년을 화실을 중심으로 오고 가며

공부도 하고 술도 가끔 마시고 더 가끔 자료 수집 겸 야유회도 하며 살았다.


여러 해 함께 지내며 남녀 구별(?)도 안하고 지내는 사이들이 되었다.

가정사도 서로 다 알게 되고 부모상에도 서로 위로하며 가족이 아프면

약도 나누어먹는 그런 세월들이 끊어질 듯 이어오기 십 수 년이다.


그들 중 한 남자는 난 전문가여서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들이 나오는

난 전에 심사위원으로 불려 다니고 그이 따라 나도 산속을 헤매기도

몇 번 했다 (야생 난 구경하러 - 아무나 데려가지도 않지만)


난을 좋아하는 이들은 보호한다는 입장에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난을 기르기도 하고 산을 다니며 청소도하고 조금씩 캐기도 한다.

아무튼 그들과 오가며 잘 생긴 난을 알게 되고 잘 키우는 법도 배웠다

지난주에는 인천에서도 난 전시회가 열렸다.

어머니 모시고 전시장에 가니 잘 가꾼 야생화도 좋았고 잘 가꾸어

예쁘게 꽃 핀 난초들이 즐비하다.

난향천리(그의 인터넷 이름이다)도 전시장에 있다가 우리를 반기고 함께 구경하고

올 때는 난 화분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전시장 한 쪽에 판매용도 있었으니까.


동양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문과 접하게 되고 글과 그림은서로 통해

그 상징성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활 속에서 서로

그 뜻을 알고 서로 자연스레 소통되어 마음으로 알게 되는 일이 참 많다.

말로 길게 하지 않아도.


그날 내가 받은 것은 새우난 이었다. 작년 봄 그이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우연히 우리 어머니도 홀로 되셨고 늘 소화 장애로 고생하시던 그분 어머님께

우리 아버님의 약을 가끔 드렸었다. 아마 고마웠었나보다. 말은 안했어도.


새우는 늙은이를 상징한다. 새우의 몸은 등이 굽었으나 굽은 몸이 자유롭게

폈다 굽혔다 할 수 있으므로 새우 그림의 뜻은 "말년에 자유롭게 살라"는

축수를 담고 있다.

" 뿌리가 새우등을 닮아 새우난 이에요. 가져다 키워 보세요"

이 말 뿐이다.

아마 우리 어머니를 보고 자기 어머니를 생각 했을지도 모르지.

늘그막에 자식과 함께 잘 살기를 바랐고, 평소 내 행태를 아니까 늙어도

잘 싸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려니 짐작하고 있다.


오는 길에 화원에 들러 할미꽃 모종을 두개 사 엄마 하나 드리고 나도 가져왔다.

베란다에 햇빛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새우난의 향기가 좋다.


할미꽃은 정답고. 난 향이 천리까지 미친다.




                         소나무 그림

                                          글쓴이 : 김영한

오래전 잠시 한국화를 배운 덕으로 소나무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르치는 분의 지도에 따라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기까지

한참이 걸렸고 겨우 볼 수 있게 된 후에는 다른 작품들도 전시장에 다니며

소나무들을 눈 여겨 보곤 했다.


그 후 여행 다니면서도 잘 생긴 소나무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고 소나무가

유명한 곳은 쫓아다니기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소나무 그림도 생기고 친정집만이 아니라 동생들의 집에까지

소나무 그림이 하나씩 걸리게 되었다.


"집집마다 소나무 그림을 하나씩 선물 해야지" 하고 십여년 전에 생각으로만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얼마 전 경인 미술대전에 나갔던 소나무가 있었다.(우 선생님 작품)

특선 결정이 나기 전 부터 마음에 들어 점을 찍어 두었는데 내 집이 좁아

걸릴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저걸 어떻게 가까이 두고 볼까 궁리를 했다.


마침 결혼 하고 얼마 지난 막내 여동생이 새 집을 사고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는 시어머님이 교회를 다니셔서 늘 예수상이나 십자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동생에게는 그게 좀 덜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


내가 소나무 그림은 어떨까 했더니 좋아라 하고 " 상 받은 그림을 그렇게 쉽게

받아도 되는거야?" 하길래 그보다 어머님께서 혹시라도 꺼리는 마음이 드시면 어쩌나

걱정된다고 했더니 그렇지는 않을거란다.


지난 토요일 마침 그 분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고 인사를 하는데 시어머님께서

"그런 좋은 그림을 보내주고 걸어까지 주어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몰라.


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셔." 하신다. 온 식구가 다 대환영이란다.

오월 칠일에는 집들이를 한다고 친정식구들을 다 초대하는데 간단히 저녁이나

먹자고 하면서 "그 화가도 함께 오시면 좋을 텐데... "한다.


아직 우리 집에는 소나무 그림이 없다. 집이 작아 벽이 좁으니 커다란 그림은

걸 수가 없고 눈은 있어서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은 걸기 싫고.

소나무가 보고 싶으면 동생네 집을 순회하게 될 모양이다.


친정에는 랑원 선생님의 소나무가 있다.

남 동생네 집에는 그가 배우던 취묵헌 선생님의 소나무가 있다.


언젠가 우리 집에도 하나쯤 소나무 그림이 걸리기는 할 텐데

어떤 인연으로 누구의 소나무가 오게 될까 나도 무척 궁금하다.





                    [스크랩] 여름은 다가오고

                                            글쓴이 : 김영한


어느새 봄은 꽃만 남기고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오늘은 반짝이는 햇빛에 눈이 부셔 종일 창밖을 보며  

푸른 하늘을 구경하는데 안에서 보는 길은 더워 보였다.


여름이 벌써 오고 있는가보다.

우리 집에는 에어콘도 없는데.


그래도 부채는 몇 개 있으니

나 혼자 오늘은 방에서 부채 전시회나 열어볼까 부다.

십여 년 전 부터 모아 내 애장품으로 간직한 부채들이 십여 개가 된다. (보고 싶지? )

그 옛날에 내가 그림 배우던 선생님이 그려 주셨던 매화, 동백, 참새, 개구리 등등

그리고 동생이 그리고 써 준 오래된 몇 가지 부채들.

또 그림 그리는 아는 이들이 그려준 것,

위협해서 뺏은 것, 애교떨어 받은 것 등등 이다.


정말 여름이 와도 그 부채들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여름이 생각나는 날 가끔씩 아무도 없을 때 나온다.

정작 땀내 나는 한여름에는 손때 묻을까 하여 남에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한가하고 사람이 그리운 날, 열개도 넘는 아름다운 부채들을 늘어놓으면

외로움은 멀리 가고 시원한 그림에, 그린사람 생각에 많이 즐겁다.


그러나 너무 자주 펴지 않을 일이다. 더위를 피하는 것도

그리고 사람 좋아하는 것도 절제가 필요할 테니. -수양버들 푸르른 날에-





                    어린이 날-서울 동생에게 보낸 편지

                                                           글쓴이 : 김영한


우리 집에는 이제 어린이(생물학적)가 없어 어린이날이 되어도 심심했다.

아침 일찍, 어제 밤에 생뚱맞은 제안을 한 그 사람 말대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아침 안 잡수셨으면 우리 집에서 드시고 뒤 수도국산 꽃 핀 거 지기 전에 구경하지..."


남편이 어제 산을 돌고 오더니, 오늘 밤 비 오면 영산홍 많이 핀 거 다 떨어질 것 같단다.

혼자 보기 아깝다고 엄마랑 같이 들 구경하고 점심도 나가 먹자고 했었다.

아들을 시켜 8시쯤 차로 모셔와 있던 반찬대로 아침 먹고 나는 치우는 동안

엄마 애들 남자 모두들 잠시 '시체놀이'-요즘 잠자는 걸 애들은 그리 부른다.-


한 후에 깨어나 커피 한잔 마시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인천 도시계획 전망도 의논하면서 다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어디 계신 거에요? 아침에 전화해도 경동 집은 비었던데...."


홍명이네(세 째 동생아이)다.

"우리 수도국산 꼭대기에 엄마랑 다 있는데? 어딨어?"-나

"여기 자유공원이에요. 이리 오셔서 짜장면이나 같이 먹어요."-동생 남편


엄마 말씀 "오늘 내가 무슨 재수가 이리 좋아 이산 저산 다니며 꽃구경하고

아침 점심 다 얻어먹고 다니냐 ㅎㅎㅎ"  

자유공원 인천 문화원 계단 아래로 오란다.

경윤이 기사가 다 태워갖고 차는 기상대 담벼락 옆에 세우고 다 만났다.


중국 냉면을 먹기로 합의가 되어 공원을 돌아 태화관으로 행진을 했다.

어린이 핑계로 어른이 더 많고 차이나타운은 발 디딜 틈도 없어

대창반점으로 냉면 찾아 옮기고... 다 먹고 홍명이(우리 일행 중 유일한 꼬마)


트집에 풍미집 꽃빵과 만두까지(유명한 만두집)

사서 싸들고 삼국지 만화거리를 돌아 대장정을 끝냈다.

중간에 걸어 본 막내네 전화에서는 월미도에 있단다. 노인, 조카 모두 모시고.


그 집도 어린이 많으니 아마도 행사가 있었겠지.

어제 그리 덥더니 비가 온다. 이른 여름을 익히는 비가 오고 있다.

어린이 날 다음에 어버이날이 있고 그 다음에 선생의 날이 있으니

역시 어린이가 가장 중요한 모양이다. 여름 어린이 같은 비가 온다.




                      수면보살

                                  글쓴이 : 김영한


지난 가을,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보살상을 흙으로 빚어보자고

주물러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게 생각같이 쉽지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아주 늙으면 암자하나 사서 산속에 들어가 살면 좋겠다" 고

하길래 "암자는 무슨 암자, 여기 산 중턱이니 암자 자리 좋고

부처다 생각하고 절하면서 나를 모시면 되지!" 하고 대꾸해 주었었다.


연말에, 딸아이가 설명해주고 재미로 봉사(?)하러 다니는 종묘에

'종묘지킴이'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문화재청장이 카드를 보냈다.

그 카드표지 사진이 석굴암 감실 보살인데 눈 감고 턱 받치고 고개 기울여

자는 모습이 고와 보였다. 그래서 그걸 도자기 부조로 만들어 볼 생각을 했다.


지난겨울 동안 두 번을 만들었는데 두 번다 실패였다. 다 만들어 말리다가

한번은 가슴이 갈라져 버렸고 두 번째는 배가 터져 버렸다.

겨울 실내가 건조해서 너무 빨리 마른 탓에 그리된 듯하다.

다 되면 "수면보살"이라고 이름을 붙여 줄 작정이었는데 이름 먼저 지어

그리 되었는지 잘 말라 유약까지 칠해 놓았는데  또 가마가 고장이다.


내 친구 구 선생님 부인의 별명이 "수면보살"이다.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웃지 않는 사람이 없다. 별명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걸 붙여준 남편의 마음이 참 따듯하다.


가마가 고쳐지고 잘 구워져 나오면 남편에게 주고 암자 살 생각 말고 염불이나

하라고 말해 주어야지.


우리 집 뒷산 너머에는 향적사가 있다.

어제는 산꼭대기에 서서 들으니 바람결에 땡그렁 땡그렁 풍탁이 울린다.

소리가 산을 넘지 못해 집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 집 거실에도 도자기로 만든 풍탁이 하나 매달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바람을 만나지 못하니 늘 소리 없이 조용히 매달려 있다.

눈 감고 세상일을 모두 잊어버린 보살이 곱고 흔들리지 않아도 벽에 그림자

드리우고 있는 풍탁이 아름답다.


사람들은 바람을 맞아 소리 내는 추녀 끝의 물고기를 좋아하지만

그 소리는 산을 넘지 못한다. 우리 집 나팔꽃 모양의 풍탁은 바람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함부로 흔들릴 수 없다.





                시계꽃 비슷한 그 꽃

                                        글쓴이 : 김영한


기순네 베란다에서 봤던 '시계 꽃'이라고 불리웠던 그 꽃.

한택식물원 ‘씨크릿 가든’의 작은 풀들 한가운데에

탑처럼 버텨놓은 지지대 주변으로 감아 올라가며 피어있었다.


8개의 선명한 꽃잎과 그 특별한 꽃술에 크기는 더 컸다.

아마도 화분보다 살기 좋은 조건 일테니까.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학명이 "크로마.... " 란다. 역시 오늘 보니

걱정 했던 대로 그 이름을 못 외운다.  

이럴까봐 어제는 "크로마뇽인" 과 비슷하니 그렇게 외워야지 했었다.


봉희는 "크로마하프"로 기억하겠다고 했었다. 크로마티아. 맞나?

식충식물원 근처에서는 기괴한 식물들이 궁금해 학명을 읽어보려 했으나

복잡한 꼬부랑글씨를 읽기 힘들어 "잘 안보여 못읽겠다"고 둘러대고 말았다.


가끔 집에서 산에서 본 낯익은 고운 꽃들이 더 많아 참 즐거웠고

애써 이름 알려 고생할 생각 없으니 그냥 아름다움이, 시원한 바람이 거기 있다.


한택실 식물원으로 착각할 뻔한 택실이와 붕어빵 먹으며 안성장을

어슬렁대던 일도, 남사당 총각 차 얻어 타고 나온 뜻밖의 시골길도 있었다.


수생식물원의 붓꽃은 서양에서는 신사의 표상이다.

연꽃은 동양에서는 극히 도가 높은 이를 뜻하는 꽃이다

한창 만발한 가지가지 보라색 붓꽃 사이사이 이른 연꽃이 곱다


한주일쯤 후면 귀부인 모란이 만개 하겠지. 꽃도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시길.





                       위창(오세창)이 쓴 글씨를 보고- 동생에게

                                                                          글쓴이 : 김영한


지난 14일, 만해 기념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개막 행사에 갔습니다.

남한산성 가는 길(성남 시청 가는 길지나 올라가는 길)을 가서 입장료 받는

터널을 통과한 직후 남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계곡 가는 샛길로 5분쯤 올라가면 우측에 돌비석이 '만해기념관'이라고 있습니다


전부터 알던 이가 초대 받았다며 독립지사 천도 영산제도 한다고

같이 가 구경하고 저녁 먹고 오자고 하길래 따라 나섰습니다.

봉은사에서 정식으로 하는 영산재와 시아버님 49제 때 그쪽(마산) 절에서 하던

범패 작법을 구경했지만 그래도 구경이라면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봉은사팀 이었습니다. 전수자와 문화재급들, 그 방면 교수급들 이었습니다.


염불은 지루하고, 태극기들은 구질 맞고, 유묵들은 허접했지만(영인본들이라서)

부페는 배를 채워주었고 박물관협회 머리 허연 교수들은 거의 백명 가까이 모여

"그들의"  악수를 나누고 관장의 그 쪽 힘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볼거리는 딱하나 있었습니다.


그날의 지루함을 보상할.

위창 오세창의 반야심경 병풍. 매직 글씨 처럼 가는 선으로 우아하게 쓴

글씨-예서라고 했던가?  어쩌면 하나하나 그리 또록또록 하고 예쁜지.....


줄맞춰 가지런히 인쇄한 듯 고르고, 수놓은 듯 부드럽게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품격이 있어서 그런지 지루하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서예전에서 본 수많은

예서들이 그렇게 좋다고, 아름답다고 느껴 본적이 거의 없어서.

집에 있는 위창의 부채 글씨에서도 별 감흥은 없었는데 (내용도 잘 몰랐고)


그 자리에서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만해(한용운)와 상관없는 작품이어도 그 내공으로 그대로 아름다웠습니다.

요새 열고 있는 예술의 전당 서예관의"천자문 전시회"와  함께 묶어 "글자여행"을 하면

어떨까요.

딸이 어렸을 때 한문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마음먹고서

천자문의 내용을 보니 중국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 생각들이조금은 탐탁지 않아

'우리 아이들의 지금 교재'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노자'를 가르쳤지만

조선사회 내내 한석봉의 천자문은 어린이의 필수교재였지요


다산(정약용)의 글씨로 된 천자문이 저는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위창(오세창)의 글씨를 보니 다산의 천자문과 함께

이 시대 어른들의 황량한 정신에 또 다른 샘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을 나들이

                                  글쓴이 : 김영한  


아직 낙엽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하늘은 높고 푸르다.

한가하지 않은 아들을 꼬여서 기사를 시키고  모임 회원 두어 명과

나들이 갔다. 용인(호암 미술관)으로 양지(돌 박물관)로 다니며

가을바람을 마셨다.


우아한 연꽃 전, 잘 가꿔진 희원,(한국식 정원) 그리고 벅수, 장승 늘어선

야외전시장 모두 즐거웠는데 희원에 모인 사람들은 유치원 꼬마 동행한

젊은 엄마 아빠들이었고 석물들 사이로 오가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가을의 맑음을 이야기 하고, 풍요로움을 즐기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을의

스산함을 깔고 있어 우리 오학년들은 너무나 밝은 햇볕이 쓸쓸하다.

아이가 다 커서 이제는 날 태우고 다니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왜 그런지

대견하면서도 쓸쓸 해 지는 건 아마도 곧 내 곁을 떠나야 할 거라는,

그리고 제 짝을 찾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인가 보다.


요즈음 부쩍 늙어 사사건건 아들 타령을 하는 우리엄마를 보며


"우리엄마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자식을 출가시킬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내게도 어느 순간 그런 일이 닥쳐올 텐데.....

좋은 가을 속에는 또 다른 가을도 포함되나보다. 벌써 다 지나간 친구들도 많겠지.

  


                        남쪽 진도 바닷가에서

                                                    글쓴이 : 김영한


지난 토요일 무박으로 일요일까지 남쪽 바닷가에서 돌아다녔지요

진도의 남도석성 아침 해를 보고, 성 위를 걸어도 보고 성의 앞쪽으로는 바다가 있습니다.

왜구가 들락거리는 곳이어서 성을 쌓았고 우리는 그곳에서 관광을 합니다.

소나무에는 그네도 있고요.


용장산성은 진도 북동쪽 벽파진(옛날에 쓰던 뱃터)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인데

고려시대 몽고족과 싸움에서 강화도에서 버티다가 왕조가 항복하니까 삼별초군이

배에 식솔과 무기 식량 등을 싣고 진도 용장산성에서 계속 버티다가 또 쫓겨

제주도까지 피해 갔습니다.


용장산성은 행궁 터가 넓게 남아 있고 억새가 가을빛에 아름다웠습니다.

원래 답사목적은 소치일가의 운림산방을 보고 18 ~19세기 남종화의 맛을 보고자

진도로 갔으나 그림들은 모두 목포에 있고 원화도 별로 없어 좀 허술했습니다.

그래도 가을 햇빛은 중년의 우울증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고 함께 다녀온 이들의

사람 맛이 자연과 함께 좋았습니다




                우리엄마 칠십 넘어 신문에 떴단다. 1월5일 경인 일보.


                                                                           글쓴이 : 김영한


     인천인물 100인·35] 한국근대예술 '혼' 불어넣다

    ▶ 김병훈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지수제 목각과 수판.


  인천의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의 존재는 최근까지 묻혀 있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인천을 넘어 한국 근대 예술사의 큰 획을 그은 후학들이 최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그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는 그의 후학들은 한국미학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을 비롯, 법조인 조진만 선생, 한국 근대 서예의 혈맥 박세림, 유희강, 고일 선생 등이다.

  이들에게 지고지순한 예술혼을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그다. 따라서 그는 한국 근대 예술의 뿌린 셈이다. 그러나 인천을 빛낸 후학들의 명성에 비해 그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따라서 일제치하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직전에 '의성사숙(意誠私塾)'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며 동시대 선각자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족적을 되짚어 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시 중구 경동 232 신신예식장 입구 4층짜리 건물은 김병훈 선생을 비롯, 5대째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손주 며느리 홍사숙(77)씨가 홀로 고즈넉이 집을 지키고 있다. 집 구석구석에는 김병훈 선생의 묵은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손때 묻은 옛 수판과 탁자 등을 가족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홍씨는 “거실에 걸려 있는 호랑이 그림은 시조부께서 일본인 화가와 맞바꾼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시아버지(김상규)로부터 전해들은 시조부는 말 그대로 엄격하고, 정확하고, 단정한 분 이었다”며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집을 와 문밖엘 제대로 나가질 못할 만큼 절제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또 “10살적에 창녕초등학교에 다닐 때 가끔 서당 훈장 선생님 복장을 한 근엄한 할아버지를 자주 목격했었다”며 “그런데 시집와서 그 분이 시조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있다”고 일담을 전했다.

 이처럼 엄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김병훈 선생의 아들 상규씨는 한약방 대제원을 운영했고 가업을 이어받은 손자 태진씨는 초대 대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후손들이 가풍을 잇고 있다.
이어 증손자 성한씨도 할아버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서예작품으로 국선에 수차례 입상하는 등 예술적 잠재력을 발산하고 있다. 홍씨는 바로 최근 유명을 달리한 태진씨의 부인이다.

 그러나 현재 김병훈 선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손주 며느리 홍씨에 따르면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 집으로 쓰던 목조건물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김병훈 선생의 작품과 초상화 등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에는 김병훈 선생이 1863년 충북 단양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아홉살때 경기도 양근에 거주하는 이석재에게 한문과 화도를 배웠다.

  그는 26세가 되면서 한양으로 와서 수륜원(현재 농수산행정 관련 부서) 주사가 돼 수년간 근무하다가 1908년 인천에
이주해  한문선생이 됐다.
이 당시에 그가 지금의 금곡동 창영학교 현 강당 서쪽에 지은 것이 '의성사숙'이다.
사숙은 규모가 작은 마을의 종합학교다. 조선시대 말까지 있었던 글방(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자 고일 선생은 지난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 자신의 스승을 “지조가 높고 청빈한 양반으로 박학다재하고 강직 청렴한 인격자”로 평했다.

 인천석금에는 “김병훈 선생이 머리에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등나무로 만든 긴 회초리로 학동들을 다스렸다”며 “또 중국의 유교 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매란국죽과 산수 풍경을 그리는 동양화도 지도했다”고 적고있다.

특히 고일 선생은 “고인향무군자 즉여산수위우 이무군자즉이난죽위우 좌무군자 즉이금주위우(古人鄕無君子 則與山水爲友 里無君子則以蘭竹爲友 座無君子 則以琴酒爲友=옛 사람들은 마을에 군자가 없으면, 산수와 더불어 벗을 삼고, 이웃에 군자가 없으면 난과 죽으로써 벗을 삼고, 자리에 군자가 없으면 술로써 벗을 삼았다)의 경지로 선비의 처세를 지켰다”고 스승을 추켜세웠다.

 특히 그의 교습법은 특이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해 스스로가 분발하고 격려하는 경쟁심을 갖게 했다.
그는 의성사숙을 그만둔뒤 아들이 운영하는 한의원 한켠에 '지수제(芝壽齊)'라는 서재를 마련하고 후학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손주며느리 홍씨는 “시조부는 말년에 내동 집과 지수제를 오가며 학문을 연구했다”며 “시조부가 돌아가신 뒤에도 고일 선생 등이 지수제에 찾아와 시어버지 상규씨와 스승을 회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년에 그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청빈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천석금'에는 의성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전문대학을 마친 대표적 수재를 조진만, 고유섭으로 꼽고 있다. 또 인천의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박세림, 장인식, 유희강도 김병훈 선생의 수하에서 예술혼을 갈고 닦았다.

 김병훈 선생의 새로운 발굴은 인천지역사에서 남다른 의미로 평가받고 있다. 인천 근대사에서 예술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배경에는 마지막 선비 김병훈 선생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인천의 근대 예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병훈 선생의 가치를 확인했다”며 “이번에 그의 족적이 확인된 것은 지역 예술계 연구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 이희동·dhlee@kyeongin.com

  


                                  커피

                                           글쓴이 : 김영한


                     아침 식구들이 다 나갔다.

              커피 한잔에 하늘도 따라 들어온다.

                가을 산이 다가와 놀자고 부른다.

                커피가 진하다. 그리고 씁쓸하다.

             아마도 생각을 너무 많이 섞었나보다.

                     저녁 커피는 잠을 쫓는다 .









                        "라디오 스타" 와 라디오에 대한 추억

                                                                글쓴이 : 김영한


영화나 소설의 감상 후기를 쓸 때면 늘 자신의 어린 시절, 또는 추억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딸려 나오곤 한다. 어쩌면 그에 의지해 영화나 소설이나 다른

예술 작품들도 관람객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개인적인 감성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겠다. 내게도 이 영화는 두 가지 추억거리를 끌어내 온다.


영월을 배경으로 한물(?)간 스타가수가 디 제이로 지방에서 다시 뜨는 과정과

그를 보좌(?)하던 매니져간의 인간적인 공생관계를 코믹하게 그려 놓았다.

영월지방 사람들은 아마도 앞으로 영월 선전을 이영화로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늘 환경관련 단체들에 의해 스산한 싸움터로 비치던 동강, 처연하고 서글픈

청령포와 어린 단종의 사연으로 대표되던 역사의 영월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영월로 보여 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전에 우리 답사팀이 함께 갔던 때,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영월과 법흥사 답사이다. 인원이 넘쳐서 기름을 짜듯

끼어 앉아 다녀오면서도 좋아라하고, 오가는 길 구불구불 운전 중에도 무명가수들의

신나는 음악도 들으며 왔다. 그 젊은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나이 오십이 넘었거나 가까운 이들은, 중 고등학교 시절에 라디오 들으며 살던 이들은

아마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트럼펫 은은한 시그널과 함께

조금은 느끼한 음색으로 서양의 대중음악을 이 나라에 '대중적'으로 퍼뜨린 디제이 최동욱.


오십년 대에 '팝 송'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야간 업소 사람들이나

그 방면 전문가들이 아닌 사람들이 팝송을 "범국민적으로"듣게 된 것은 조금 먹고 살만해진

육십년 대 들어서 이고 그때 폭발적인 인기 프로그램이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였다

심야에 일하는 이들이나 밤새며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그 프로는 참 친근했었다.


그 후 이종환이나 김기덕 등의 디제이 들이 활약했을 때까지도 디제이는 음악평론가들의

영역 이었다.

그러나 그 후 배철수를 비롯한 재주 많고 유능한 가수들이 늙으면 겸직하는

분야가 되어버렸다.

그런 현상의 좋고 나쁨은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듣는 이들의 감성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지방 방송이어도 "다방 커피 외상 갚으세요"라든가 "고스톱 규칙 상담" 등을

방송하고 비속어 구사해 가며 즐겁게(?)들려주는 방송이 생긴다면 참 웃기기는 하겠다.


크고, 엄청나고, 희한한 사건들만을 쫓아다니는 방송이 이런 작은, 일도 아닌 일들을

내보내며 웃겨(?)주는 시대. 이 시대가 우리가 사는 시대인가 보다. 너무도 큰 일에

치어 사는 우리들에게 작고 개인적이고 시덮지 않은 것도 사실은 중요하다는 것을 비꼰다.  





                   남한산성의 봄나들이

                                      글쓴이 : 김영한


삶의 중심에서 늘 바쁜 일상이지만 그 바쁜 중에도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여 나들이를 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새순이 몽글몽글 피는 산을 걸으며

참으로 "쓸데없는" 그리고 "기억도 못할" 이야기들을 나누며 산길을 걸었다.

언제나 꼭 쓸 데 있는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만나 즐겁게 함께 가는 것도 삶을 잘 쓰는 일이다.

우리 걸음에 맞게 가파르지도 않고 포장도 잘 되어 있는 길

그래도 마음은 히말라야 사진처럼 높은 산도 가고 싶었지.


그래도 우리 길은 소담하고 고운 편안한 길이다.

아직도 덜 핀 산길의 꽃들이 곱다.

우리들의 갈 길이 아직도 멀리까지 뻗어 있겠지

건강하고 편안한 고운 길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다음 달 나들이를 벌써 기다리고

입으로 밥 먹고, 내 발로 걷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을

고마워하며 쓴다.

멀리서 온 창주, 우리를 모셔다 준 봉희. 끝까지 함께 온 택실이...

모두들 잘 들어갔지?  




                       택실에게 : 관곡지의 연

                                            글쓴이 : 김영한


안부 전화 반가웠어, 오래 전에 만난 것 아닌데도 많이 반가웠지.

마침 당번 날이라 함께 가자던 관곡지를 놓친게 영 아쉽구나

요즈음 한창 예쁘게 피어나는 연꽃이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고 하네.


어제 비가 와서 오늘 아침은 유난히 하늘도 바다도 예쁜 창밖 풍경에

박물관 봉사실에 앉아 전화 받으며 많이 아쉬웠다.


연은 다음 주까지도 예쁠 거야. 먼저 갔다 온 이가 올린 사진을 퍼왔다.

더 예쁜 사진은 안올려야 가서 보는 꽃이 더 좋겠지...

연잎 차도 한잔 같이 마시면 좋겠다. 강희맹 선생에게도 감사한다.


백년 전에 연을 심어 (조금이지만) 후손이 이렇게 더 길러 즐기게

시작을 해 주셨으니. 늘 연꽃 같은 마음으로 지내시기를..... 안녕히.  




                   물맑은 '을수골'기행

                                        글쓴이 : 김영한


8월 폭염의 꼬리가 보이는 지난 주말에 나는 동생네 별장(?)에 갔다 왔습니다.

남동생네 친척이 전에 가지고 있던  찐빵 동네 안흥 근처 농가 주택을 처분하여 새로 마련한 곳은 내린천 상류 열목어

서식지 인데 '을수골'이라는 곳입니다.


영동 고속도로 속사 IC에서 나가면 6번국도와 이승복 기념관 가는 길 갈라지는 쪽이  있고

(이승복 기념관은 평창군, 아직도 그런 게 남아있는 우리나라입니다)그걸 지나서

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홍천 방향으로 가려면 "운두령:1010"을 넘어서 가는데 운두령 정상에서 파는 감자떡이

맛있어서 사 먹고 내려가면 홍천군입니다.


운두령으로 안 가려면 홍천에서 솔치재 넘어 가면 되는데 그것도 만만치는 않지요.

어쨌든 창촌이라는, 산골의 장터와 학교가 있는 중심에서 20분쯤 더 가면 사람 사는

끝에 쯤에 칡소폭포라는 곳이 있는데 말이 폭포지만 열목어가 기 쓰고 뛰어 오르면

용이 될 만한(?) 작은 폭포가 있고 그 여울이 계속되는 골짜기가 을수골 입니다.

을수골이 끝나는 곳은 오대산 적멸보궁의 뒷쪽 계곡이 되는데 차도 사람도 못가지요.


칡소폭포를 끝으로 포장도로는 없고 비포장 길로 10분쯤 더 간 곳에 집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열쇠 하나 주고 집주소와 집을 앞뒤로 찍은 사진 두 장을 메일로 보내고 나서

"운두령 넘어 창촌 사거리에서 우회전후, 칡소폭포 지나 비포장길 외길이니까 십분 가면

보이는 집 두 채 중의 오른쪽 집" 이라는 말을 설명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엄마 모시고 가서 열고 들어가 쉬고 있으면 수업 끝나고 갈테니까

저녁거리 가지고 밤 아홉시쯤 들어 갈꺼야. 기다려" 합니다. 전화로.

남편이 운전하고, 노인네 태우고 이게 무슨 써바이벌 께임도 아니고...연예인도 아닌데

길 찾기 생존 께임 같습니다.

상품은 맛있는 저녁, 집 못 찾으면 노숙 또는 생사불명? ㅎㅎㅎ


평생 생존 훈련을 한 기사(남편)를 대동하고 인간 네비게이션을 자처하는 우리 엄마 와

함께 전국 어디라도 주소만 있으면 찾아간다고 그동안 큰소리치고 살았던 나니까 가

봐야지요.


어쨌든 집 사진까지 있는데 그 집을 대낮에 왜 못 찾아 가겠습니까.  ㅋㅋㅋ.

곧바로 찾아 들어가 해지기 전까지 계곡에서 발 담그고 놀다가 저녁 되어 평상에 누워

있으니 하늘의 달과 별이 마구 반짝입니다.

반딧불이도 날라 다니고 서늘해서인지 모기도 없구요.


8시 반 쯤 슬슬 배가 고파져서 나는 밥을 전기 솥에 앉히고 있는데 남편은 벌써

어디서 찾아내었는지 컵에 담긴 술을 들고 나오고 마침 차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

동생네 식구들이 왔습니다.


구워 먹을 고기와 야채, 과일 그리고 포도주까지. 이슬은 많이 내리니 안 가져 왔다나요.

지난주에 와서 냉장고에 채워놓고 갔다지요. 밤이 깊어 슬슬 추워질 때까지 놀다가

한밤중에 남자들은 메기 잡으러 나갔고 어머님, 나, 올케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가을, 겨울에 오면 은둔하는 재미가 특별하지 않을까 합니다.

10분 이내거리에 펜션 두어 군데와 농가 두어 집이 있을 뿐입니다.

산과 나무, 당귀 밭, 그리고 하늘 이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농사는 고추, 호박, 그리고 고냉지 배추 조금입니다.

공부해야 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있다면 은둔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가소롭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곳에 산불나면 어쩌나, 열목어 없어지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옆집 강아지가 다가 오길래 먹다둔 쵸코파이로 꼬셨더니 잘 먹고

우리식구들을 졸졸 따라다닙니다. 어미 개가 품위 있게 앉아 쳐다보고 있지만 이놈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나봅니다. 아마도 두려워할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지요


오래도록 그렇게 살기 바랍니다.

그 강아지가 어른이 되어도 사람이 늘 반가운 존재이기를.




                                  미장원의 미술

                                                       글쓴이: 김영한

나와 딸이 함께 다니는 미장원이 있다. '미장원'이라는 말은 50넘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지만

아무튼 우리 식구들은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

사십 가까워 보이는 박미란은 자신의 "헤어 숍"을 가지고 원장님으로 고객을 맞아 머리칼과 얼굴을 만져 꾸며준다.

함께 일하는 미용사들도 주인의 취향을 알고 그러는지 많이 조잘댈만한 젊은 나이 들인데도

고객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데에 필요한 말이 대부분이다.


"커피, 녹차 어느 걸로 드릴까요?" - 손님의 순서가 있어 조금 기다려야 할 때.

"샴프 해드리겠습니다"-머리 감겨 줄 테니 일어나라는 말.

"평소 어느 쪽으로 넘기시나요?"- 가르마를 할거냐 말거냐 묻는 말

"책 드릴까요?"- 가운 입고 파마 뼈다귀 말고 앉아 기다려야 할 때. 등등

원장이 성실하고, 입에 발린 소리, 동네 아줌마 흉 안하고, 내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좋아

딸과 함께 몇년을 이용하는데 그녀는 나름대로 프로다운 실력도 갖추고 있어 보인다.


머리 손질을 하며  미용사와 고객이 나누는 대화에는 손님의 종별에 따라 다양한 화제가 있겠지만

언제부터인지 나와의 대화는 '미술사조와 연결된 헤어디자인'이 주제가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다니는 헤어아카데미 강사과정의 숙제를 하기위해

내게 조언을 구하는 대화가 되어버렸다. 오늘은 '큐비즘'이 주제가 되었다.


몇달 전에는 "혹시 프리다 칼로를 아세요?" 하고 시작되어 머리 손질 받으러 간 나에게

한시간 반에 걸쳐 프리다칼로와 멕시코 혁명, 그리고 디에고리베라, 벽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시켰다.

그리고 머리 손질 값은 안받고 "숙제 해 놓을테니 꼭  봐주세요 " 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안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날카로운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으나 웨이브를 넣었고,

금속 재료를 첨가해서 만들어는데, 아마도 긴 머리가 적절하지 않았나봐요.

다른이들은 모두 단발로 했더군요. 저는 칼로의 감성적인 부분을 중시했는데...."

어쨌든 결과는 참패 였단다.

"아마도 재연을 했나보군요. 재 해석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해준 말이다.


그 다음 번에는 내가 시작했다. "혹시 영화 시카고 보셨어요? 거기 나오는 주인공 두 여자의 머리가 대조적으로 나오고

그 시대의 패션과 어울려 연구해 볼 만하던데...... 미국 대중문화의 본령이에요."했더니

"어머나! 시카고를 아세요? 작년 졸업작품 주제가 시카고였는데... 와! 우리 선생님 이네"한다.


오늘 큐비즘 이야기를 하면서 "헤어칼러로 부드러운 분홍과 노랑색을 섞어 썼는데 너무 이상해서

어떤지... " 하길래 "큐비즘은 우리말로 '입체파'라고 하구요, 색보다는 형태와 부피,

각도 등을 중시해요. 우선 큐비즘을 컴퓨터 사전으로 읽어보고,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한번 찾아 보고, 그리고 다시 봅시다"


그녀가 내머리를 만져놓고 다른 이를 해주는 잠시 기다리는 중에 나는 잡지에서  

마침 큐비즘에 딱 맞을 듯한 패션을 한 여배우사진과 헤어디자인 사진을 두어개씩 골라 보여주었다.


"아~ 그렇구나 이제보니 난 완전히 반대로 해버렸네.... 이제 좀 알겠어요." 한다.

강사가 되려면 기술적인 바탕과 함께 인문학적 바탕도 있어야하고 알고 있는 것을

잘 전달하는 기술과 자신감도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 주고 나니

너무 잘난척 한것 같아 꼬리를 달았다.

" 흐흐흐  ...  나는 입으로는 못하는게 없단 말이야.... 인문학 한다는 이들의 병이기도 하지만...."


사학과 나온 딸도 옆 자리에서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다음 번에 가면 아마 그 숙제를 가지고 어떻게 평가 받았는지 말해 주겠지.

내가 아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와 함께 나누며 즐거울수 있는게 또한 큰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