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문학>의 원고 청탁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모교 (인일여고)를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난해(1999년)에 졸업 30주년 기념식을 가졌으니까 내가
            인일여고를 졸업한지 어느새 만 31년이 된 셈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때엔 인천여중과 인일여고가 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1963년 인천여중에 입학한 나는 우리들과 함께 조회를 서는 우리 선배님들의
            고등학교 이름이 인일여자고등학교라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학교를 벗어나 동인천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인천여고가 있었고
            그 울타리 안엔 상인천여중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내 마음을 헷갈리게
            하였다. 평범한 우리네 생각으론 인천여중과 인천여고가 한 울타리 안
          에 있어야 맞고, 상인천여중과 상인천여고가 한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엉뚱한 이름으로 뒤섞여 있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서 안 얘기지만 원래는 인천여중과 인천여고가 한 울타리에 있었는데
            인천여중이 기상대 뒷산 기슭으로, 인천여고가 동인천 굴다리 부근으로
            터를 잡아 이사하는 바람에 서로 독립되어 있다가 인천여중은 인일여고를,
            인천여고는 상인천여중을 한 가족으로 삼게 되었단다. 어쨌거나 중학
            시절엔 조회서는 날마다, 그리고 학교 행사가 있을 적마다 언니들이
            늘 곁에 있어서 좋았다. 중3이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할 적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인일여고로 진학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은 중학교이고  고등학교이고 평준화 정책으로 인하여 무시험으로
            들어가지만 그 때엔 중학교부터 입시를 치르는 시절이었다. 입시 성적에
            따라 학교의 순위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던 때였으므로 누구나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학교에 입학하기를 소원하던 때였다. 그 때, 초둥학교에선
            남자아이들은 인천중학교에, 여자아이들은 인천여중에 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물론 중학교선 남학생들은 제물포고등학교에, 여학생들은 인일여고에
            가기를 꿈꾸던 시절인지라 그 시절 우리들의 프라이드는 대단했었다.
            교복의 윗도리가  검은색 털실로 잔 스웨터에 횐 깃을 붙인 것으로
            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 것이었는데 우린 그 옷을 아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아주
            추운 옷이었는데도 여간해서는 코트를 걸치지 않은 채로 다녔다 인일여고에
            다니고 있다는 것 하나로 길거리에서나 버스 안에서나 힘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석바위에서 동인천까지 버스로 통학을 하였는데 남들보다 항상
            30분 정도 일찍 학교에 도착하도록 출발을 했다. 인일여고 학생이 늦어서
            가방 들고 허덕거리며 뛰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는 인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안개가 시내를 자욱히 덮고 있는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고요한 아침마다 그렇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 질
            것만 같아서 옥상꼭대기에 올라가 별의 별것들을 다 빌었었는데 언젠가
            그 옥상에 다시 한번 올라가 보고싶다.
            공부시간엔 선생님들마다 숙제를 보따리로 내주셔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힘에 겨워도 꾀를 피울라치면 '인천 제일의 학생들이~ '운운 하셔서
            아야 소리도 못하고 공부벌레가 되어버렸다.
            
            '인천의 여학생들 표본이 바로 우리들이다' 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행동거지 하나에도 무진 신경을 썼고, 인일여고에 다닌다는 것 하나로
            부모 형제의 어깨에 힘을 실어드리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인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우리 오빠는 동생이 인일여고에 다닌다는
            것을 아주 자랑으로 알았다.
            
           우리는 그 시절에 이웃 모 여고 아이들이 옷차림과 몸매에 부단히 신경을 써
            아주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어도 그것을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사람은 외면적인 것 보다 내면적으로 알찬 것이 멋있는
            것이라는 것을 주입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굵은 다리와 못생긴 얼굴
            등은 부끄러움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우리였다.
            젊은 시절에 부단히 노력하여 공부하고 좋은 책 많이 읽어서 보이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 먼 훗날의 풍요로운 삶을 약속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믿게 해주신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생을 살아갈수록 새록새록 감사로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고3 때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었다. 그 시험에 합격된 학생만이 대학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
            시험이었다. 그 때 다른 학교에서는 불합격자가 휠씬 많았었는데 바로
            옆 학교인 제물포고등학교와 우리 학교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시험 에
            합격하여 그 시험 에 합격한 학생들 거의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해 사상 처음으로 인천교육대학에 100명이 넘는 친구들이
            가게 되어 인일교대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였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도록 행동한 것은 오로지
            그 시절에 계셨던 훌륭하신 스승님들 덕분인 것으로 안다.
            
            특히 현재 인천교대의 음악과 교수님이신 음악을 담당하셨던 류정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셨다. 코르위분겐의 음정 하나만 틀리게
            소리내도, 노래의 계이름 하나만 더듬어도 깜짝 놀라 야단을 치셨다.
            우리의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하면, 공부도 인천 제일, 덕성과 인품도 인천 제일인
            아이들이 그러면 되겠느냐고 호되게 나무라셨다. 똑똑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야무지게 커야한다고 훈시하셨다. 여자가 헤프게 굴
            어서도 안 된다 하시며 우리를 단속하셨다. 그 가르침 덕분에 난 정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남학생들에게 헤픈 웃음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중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강순옥 선생님은
            그 어려운 화학 과목을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쾌하게 강의하셔서
            인일여고 전 졸업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하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원소기호를 줄줄이 외워 내리시며 열강을 하셨던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도
            화학은 재미있을 수 있다는 신화를 낳게 하셨다. 오로지 교직에 대한
            열정 하나로 결혼도 마다하시고 후진양성에만 기여하시다 영원한 처녀로
            홀로 지내시는 강순옥 선생님 퇴직 이후인 지금도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시는 등 소리소문 없이 만인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사시는
            선생님이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오래 전에 고인이 되어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 선생님도 몇 분 계시다. 바로 최경섭 선생님과 황연자 선생님이시다.
            
            최경섭 선생님은 국어과를 가르치셨는데 얼굴 모습이나 콧수염을 기르신 모습이
            영화배우 허장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허장강 선생님이라고 불리었다.
            선생님은 연극부도 맡으셨는데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오며가며
            연극부 언니들이 연극 연습을 하는 것을 훔쳐보곤 했는데 정말 웃기시기도
            하고 열정적이기도 하셔서 직접으로 배운 바는 없되 우리들 모두가 아주
            좋아하였다. 나중에 내가 문단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옛날부터 시인이셨다는 것을 우린 학교 때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멋쟁이
            선생님께서 말년에 병석에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전해듣고 오래도록 마음이 편치 못했다.
            
            황연자 선생님은 세계사를 가르치셨는데, 노처녀 선생님으로서 키는 훤칠하게
            크셨고 어찌나 마르셨는지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감기는 늘
            달고 다니셔서 횐 손수건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사를
            어찌나 훤히 알고 계신지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으셨다.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연세대학 출신으로서 신물이 나도록 연세대를 추켜세우셨던
            점이었다. 몸은 비록 허약하셨어도 최선을 다하여 우리에게 열강을 하셨던
            고고하신 황연자 선생님께 우리들이 아마 마지막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지난해에 졸업 30주년 기념식 때에 나는 부끄럽게도 졸업이후 처음으로 모교엘
            갔었다. 그 때 놀랍게도 우리가 중학교 1학년 때 인일여고 1회 졸업생이며
            전교 조회를 지휘했던 전교회장 허회숙 언니가 모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와 계신 것이었다. 인일여고 1회 졸업생 언니가 모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계신다는 것이 어찌나 자랑스럽고 기분 좋은지 몰랐다 .거기에 동창생
            박숙희가 또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선배님과 동창생
            덕분에 우리의 3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날 30년 만에 만난 백 여명의 동창생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을 했다. 오십을 넘긴 중년의 모습이었지만 모두가 몸과 마음이
            여유로와 보이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평생회비를 모으는 일, 성금을
            모으는 일에 앞다투어 선뜻 발벗고 나서서 그 자리에서 일이 척척 해결되는
            것이 마치 인일의 저력이 과시되는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이랴! 훌륭한
            사나이 곁에는 훌륭한 어머니의 정성, 혹은 격조 높은 내조의 아내가
            있다고들 하는데, 인일여고를 거친 수많은 인재들이 오늘날 그 숨은
            힘으로 보이지 않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 날 모인 동창생들의
            가정 이야기에서 그들의 훌륭한 내조의 실제를 들으며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신 선생님들 중에는 가정과목을 맡으셨던 90세를 휠씬
            넘기신 최정숙 선생님의 정정하신 모습이 우리를 기립 박수하게 만들었다.
            홍창기 교장선생님, 강순옥 선생님, 류정희 선생님, 김남옥 선생님 ,김세경
            선생님 , 김윤옥 선생님 , 김재옥 선생님 , 경순호 선생님 , 이기영
            선생님 , 정형규 선생님 둥 참석하신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한 말씀씩
            하실 때 나는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 주신 은사님들께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내가 그토록 마음으로 사모하고 그리워했던 홍순숙 선생님은 연락이 되지
            않아 나오시지 못했다. 국어선생님으로서 또한 인천여중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으로서 한자와 일기지도를 무섭도록 열심히 하셔서, 그때에
            배운 것들을 평생토록 활용하며 마음 한구석에 늘 감사의 등불을 끄지
            않았던 분이시다. 그 선생님을 지난 겨울방학에 수소문하여 30년 만에
            만나 뵈었다. 고웁던 모습이 할머니가 되어 나타나셔서 내 마음을 짠하게
            했던 날 선생님께서 얼마나 행복해 하시던지‥‥‥‥ 바로 지난 가을엔
            우연히 집으로 모실 기회가 있어 중학교때 영어선생님이셨던 박영애
            선생님과 함께 내 집엘 오셨는데 아무것도 없고 책만 가득한 나의 거실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셨다. 그 연세에도 이 책 저 책을 들추시며 독후감을
            줄줄이 외우셔서 나를 기쁘게 했다. 예전엔 선생님들께서 우리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공부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을텐데 이젠 우리들이 정정하신
            모습으로 열심히 독서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세월이
            참 많이도 갔음을 입증하는 것 같아 남은 시간이 귀함을 깨닫는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가 우리의 30주년 행사 때 찬조 출연을
            해 주었던 후배들의 공연이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의 귀여운 중창과 사물놀이를
            보고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가 되어 가는 선배 언니들의 행사에
            즐거운 토요일 오후를 기꺼운 마음으로 반납한 그 마음이 어여뻤다.
            옛날에 우리들은 그 높은 언덕과 백 개가 넘는 층계를 오르내리느라고
            굵어진 다리로 예쁘다고 할만한 아이들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의 후배들을
            보니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었다.
          
           학교연혁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동안 학생 수나 건물의 크기 등 모든 면에서 곱절
            이상으로 커졌다. 교가는 옛 것 그대로이되 교훈은 「성실.
            단정.;협동」에서 "지성(至誠)"으로 바뀌었다. 평준화 시대라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방면으로 상을 탄 것도 많고 새롭게 추진하는
            일들도 많았다. 평준화 시대이긴 하지만 아직도 인일의 전통을 이어서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올해로 이제 38회의 졸업생이 배출되는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진 인일여고이지만
            '지성(至誠)' 이라는 교훈 그대로, 사랑하는 후배들이 지극히 성실한
            자세로 앞길을 닦아 간다면 인일여고는 영원히 명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1-01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