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 3학년$반
앞줄에 앉은 K 와 맨 뒷줄에 앉은 A 는 당시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원래 키 큰 애들은 더구나 반장을 하던A는 다른 학교 친구도 많았고
졸업후 둘은 각각 다른 학교로 진학하고 또 졸업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들이 병장으로, 예비 훈련병으로, 또는 이미 제대하고 있기도 하다.


어제는 "별들의 고향"에 다녀왔다.
우리나라 육해공군 장성들을 모두 합치면 몇이나 되는지?
그 중 대부분이 모여사는 곳이 어딘지?
퀴즈 문제 같지도 않지만 짐작해 보시라.
지금부터 이십여년 전 한때는 삼각지 로타리 근처에, 아니면
서울 어느 모퉁이에 모여 있던 때가 있었다.
내 남편은 그때 본부에서 유리창도 닦고 주례사도 대필하며 살았다.


박정희 정권 초기 까지만 해도 계룡산에는 민간신앙의 끄트머리가 많이
남아 있었고 그 일대에는 수많은 무속 신앙의 맹주들이 모여 각양각색의
민물상 종교집단의 전시장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의 작위적인 발전(?)으로 그들은 모두 쫓겨나고
불타버렸다. 전설적인 계룡산 신도안은 그렇게 없어져 버렸다
속칭 무당, 박수, 도사 들은 그들의 메카를 잃었고
지금은 역술인, 역학인, 지리학자(?) 등으로 변신하여
세미나도 열고 학문적인 간판도 세우고 살지만
그 당시 아마도 만만찮은 탄압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경부선 새마을호가 처음에는 급행으로 달리던 때가 있었다.
정확한 기록은 철도청에 있을 터이지만 서울역을 출발하여
서울(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원, 김천, 대구, 부산에만 서고
다니던 때가 몇년인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논산 근처
이름도 없던 촌 구석에 (두마면) 새마을호가 서는 역이 생겼다.
내가 그곳에 가는 기차표를 영등포 역에서 사는데
"두개역 가는 표 주세요. 어른 하나 어린이 둘 이요"했더니
표파는 직원이 "그런 역이 있어요?"한다.
"새로 생겼어요. 찾아 보세요" 했더니 힌참 더듬거리며
전화도 해보곤 하다가 표를 만들어준다.(기차표 전산화 되기전)
그 표를 들고 남편 사는 B O Q (독신장교숙소)에 찾아가
불륜 아닌 불법 숙식을 하고 온 때가 있었다.
새로 옮겨간 본부 소속 장교 가족들은 아파트 짓기 전까지
대부분 그렇게 오가며 살았다.


여고 시절, 옆에 붙은 남자 고등학교 동급생에게 코 낀 A 는 오십넘어
이제 오랫만에 옛 동창들을 불러모아 집구경도 시켜주고 등산도 하고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어 일을 벌였다.
차 태워 모셔다가 구경하며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놀자고.
자주 나가 놀 수 없는 사람은 친구 불러다 노는거지 뭐. 좋잖아.


계룡산, 국제선원 옆길을 지나 향적산과 국사봉 가는 길 사잇길로 가면
싸리골이 나온다. 지금 한창 조팝나무 꽃이 만발했고
향기가 온 산을 덮었다. 멀리 가까이 봉우리들이 줄을 잇고 섰다.
A 의남편은 아직도 별들의 고향에 살고내 남편은 이제 자유인이 되어 산다.
남편의 소속과 하는 일이 달랐어도 그간 몇번 만났던 부인들이
이제 또 만나 애들 처럼 히히거리고 싸리골을 돌아 다녔다.
열 일곱에 옆에 두고 붙어다니며 연애하던 A나
스물 일곱에 천리밖에 살던 남자 만나서 결혼한 나나
그들끼리 만나면 말하는 "팔자 사나운 군인 마누라" 다


아들들은 이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느라고 홈페이지 만드는 병장도 있고
입영날짜 받아놓은 예비병사도 있다.
휴가나온 그 아들은 기특하게도 어머니 친구들을 모시고 다니며
의전실장 노릇을 톡톡이 한다.
" 얘 니 아들 어쩌면 이렇게 착하니? 요새 애들이 누가 엄마 친구 모시고 다니냐? 벌써 달아나 다른데 가서 놀 텐데.."
" ㅇ ㅇ 아 ! 너 생일이 언제냐? 우리딸 지금 삼학년 이거든
유학 갔는데 오면 미팅 시켜 줄께. 내가 찍었다~~."
"저 임자 있어요 헤헤" "하하하"


시인이 된 경분이는 신벗고 양말 벗고 잔디밭을 뛰다가
아까먹은 이슬에 취해 하늘도 올려다 보고
아직도 개구장이 같은 평남이와 뒷머리가 예쁜 영숙이는
샐샐 웃으며 연못가를 돌아다닌다. 누가 이들을 말릴 수 있으랴.
노래 잘 가르쳐 주신 선생님 덕에 귀도 즐겁다.
느긋한 오십을 넘기니 평준화된 수다발로 고속도로를 타고
집에 계신 서방님들 드리라고 준 입막음용 떡을 들고 돌아 왔다.
그래 우리들은 아직도 "무공해" 친구들이다.
나는 가난해 동창회비도 다 못내고사는데도 이런 호사를 보는구나


십년 전 썰렁하던 그 골짜기에는 이제 우람한 건물들과 널따란 헬기장,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공원이 있다.
동학사 입구는 어느 유흥가도 못 따라 갈 만큼 번창하고
엄사리 시골에는 기가찰 만큼 높고 많은 아파트도 생겼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또 모여든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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