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네팔 14일 [2008. 3. 7 ~ 3. 20 ]


****3월 7일. [금]

난,

류시화님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란 책을 읽은 후,

줄 곧 인도 여행에 애정을 담기 시작했으나,

기회가 되질 않아 애를 끓여 왔다.

인도와 네팔 여행은 2월이 적기라고 들었으나, 

한 달 늦게 여행은 시작 되었다.

뜻을 같이한 20명의 여행팀으로,


난 마음착한 키다리[남편]과 인천공항에

오후 1시 30분 탑승에 맞춰 나갔으나 [인도항공]이어서인지

[3시간 30분 지연] 출발이라면서

항공사에서  일인당 만 원짜리 점심식권이 나오는 걸 보며,

느긋한 마음으로  여행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오후 5시가 되어 탑승을 했다.


****3월 8일. [토]

홍콩과 델리를 1시간씩 경유하여

[총14시간 30분]을 비행기에 갇혀 있다가

뭄바이에 새벽3시 50분[인도 시간]에 우린 내렸고,

우린 6개의 화장실중 한 개만 개방을 하여,

줄을 서서 오래 기다린 후 볼일을 본 다음,

우린,

인천공항의 선진화와 일등공항임을 또 실감한 후,

인도와 네팔을 안내 해 주실

ACHINT[인도인]님을 만났다.


일단 씻고 싶어 찾은 [ROSE WOOD HOTEL]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수동인 좀 어설픈 호텔이었지만

우린 너무 편안함으로 느껴졌다.


모닝 콜 전에  비둘기 떼들의 창문 쪼는 소리와 지저귐 소리로

잠을 깬 우린 아침을 먹고,

인도의 빨랫터를

[1달러에 10개의 손세탁 가능]보았다.

구경하는 관광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빨래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빨리 기계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나마 일자리가 문제라고 했다.

가림막이 없는 노천형태라서 비가 오는 우기엔 어찌하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에덴동산의 꿈은 지구상에선 영원히 이룰 수 없음이겠지?

  

인도 최고의 호텔로 바다에 떠 있는 듯한 *타지마할 호텔과

뭄바이의 상징물인 *게이트 웨이 오브 인디아가 있는

바닷가[아라비아 해]를 구경한 후

여왕의 목걸이를 닮은 *마린드라이브 해변은 여유로운 사람들의 호화로움이

빨랫터의 인부들과 대조적이었다.


우린 *아우랑 가바드로 이동하기위해,

뭄바이 기차역으로 가는데 대로엔 차선이 없었으며

자전거, 오토바이, 릭샤, 사람, 소, 손수레, 자가용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기차역 가까이에서 우린 내렸고,

짐 가방은 짐꾼[직업인]들이 머리에 이고,

계단을 오르고 내려와 플랫폼을 지나

기차의 좌석 밑에 짐을 넣어주었는데,

짐꾼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완장을 차고 있었고,

TV에서 보았었으나 이곳에서만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침대기차로 8명이 함께 잘 수 있으며, 기차 한량엔 64명이 탈수 있었으며,

입석권은 없는 특급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옛날 무궁화호나 통일호 열차보다 더욱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입석이 없는 고급이라서

도둑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창가 쪽엔 그물망으로 된 물병걸이가

개인별로 있고, 거울이 1개, 선반이 1개, 선풍기가 1개,

[에어컨은 잘되고 있었음], 식탁용 접이 탁자가 1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객차와 객차 사이에 2개씩 있었으며,

더운물을 쓸 수 있는 수도가 있었다.


우리 팀은 인도음식[기차내의 도시락]이 입맛에 맞지 않아

그냥 준비한 보온밥통의 쌀밥[호텔에서 해온 밥-25인용]에 김, 고추장,

그리고 각자 집에서 준비해온 깻잎, 무말랭이, 볶은 김치  등으로 먹은 점심은

진수성찬으로 다가 왔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때제배[해저기차]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룩소까지 갈 때의 야간열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설의 기차였으나 밥맛은 최고였다.

창밖의 서민들의 삶은 더위 때문인지 게을러 보였으며,

많은 농지는 기계화로 짓고 있었다.

우기를 대비함인지 땔감으로

쇠똥을 반대기로 만들어 많이 말리고 있었으며,

바짝 마른 것은 짚 낫가리처럼 쌓아 놓기도 했고,

많은 쇠똥은 바구니에 담아 시장 장터에서 팔고 있기도 했다.


열악한 집 구조를 보면서,

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매일 매일 [일급호텔]에서의 삶이라고 생각되었다.

항상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야함도 느껴졌다.


4시간을 달려 *만마드역에 도착해 우리들의 짐가방은 또 한 번

흙먼지에 구루지 않고 머리에 이고 가는 호사를 누린 후,

차선이 없는 길을 3시간 버스로 씨름하며 아우랑가바드에 도착했다.


음식이 호텔식도 까다롭다는 말에 겁을 먹고

우리 팀은,

네팔인으로 한국요리를 전공하였다는 요리사[쟌다르]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들은 

별이 빛나는,

넓은 수영 풀 가까이에 차려진 MEADOWS RESORT 호텔 뷰페식에

쟌다르가 준비해준 감자와 호박이 들어간 [미소된장국]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저녁의 단잠은 환상적이었으나

모기가 있어 모기향을 켜야만 했다.


****3월 9일. [일]

우린 아침은 간단히 먹고,

6-10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엘로라석굴 사원을 보았는데,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3개의 종교양식으로

지어진 석굴이 34개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웅장함과 크기와 섬세함이 우릴 놀라게 했으며,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트 사원은 돌을 쌓아 올린 것이었지만,

이곳은 매우 큰 한 덩어리의 등선으로 이루어진 돌산을 파내어 건축되었고,

조각됨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신을 위해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 싶다.

사람이 먼저가 아닌가?

석굴의 망가짐을 방지하기 위해

불을 밝혀 놓지는 않고 후랫쉬를 사용해 설명을 곁들이고 있었고,

가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영화 촬영하듯

석굴 밖에서 조명판을 사람이 들고 비추고 있었다.


버스로 이동 도중에 점심 식사 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우린 작은 식당을 빌렸는데,

식탁의 먼지를 우린 물티슈로 닦고 앉기에 바빴다.

바람을 쏘이며 쉬는 동안,

[쟌다르]가 서둘러 북어국을 끓였고, 양배추, 오이, 무, 계란 등

[지나오던 길가에서 시장 본 것]으로 만든 반찬과 보온 밥[호텔에서 해온 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과 식당에 있던 손님들은 우릴 몰려와 구경하고 있었고

우린 또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추수가 끝나가는 질펀한 목화밭과 씨를 맺어가는 겨자 밭을 보며 버스로 달려

*아잔타석굴 사원에 도착했다.

2-7세기까지 약 900년이라는 기간 동안 만들어진

조각예술과 벽화예술이 잘 보존된 불교 석굴이었는데,

석굴 안을 관람할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가야만 했다.

영국 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왔다가 발견 했고,

지금은 28개가 발굴되었다고 했는데 혹시 더 발견되려나 모르겠네.

현무암을 파내서 만든 석굴인데,

말발굽형태로 모두가 이어진 하나의 능선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석굴내부엔 불이 켜 있지 않으며,

후랫쉬로만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밖은 더웠으나 내부는 시원하였다.

경주 석굴암과 비교 한다면,

중국의 자금성과 우리나라의 경복궁정도의 크기 비교가 될 듯 싶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런 건축을 생각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저녁은 미역국을 먹고,

*잔시로 가기위해 부사발 기차역으로 이동을 했다.

기차역엔 모기가 많았으며 역 천정엔 도마뱀도 붙어 있었는데

무공해라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3월 10일. [월]

10시간을 지난번에 탔던 등급의 기차를 타고 잔시에 아침 9시 30분에 도착했다.

난 2층 침대에서 잤는데,

좀 좁은듯했으나 피곤함에,

준비했던 안대와 귀마개를 하고 단잠을 잤으나 ,

내 짝궁은 다리를 펼 수 없어 무릎을 세우고 자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고 투덜거렸다.

항상 큰 키가 부럽더니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기차내부의 광경은,

64명 승객을 볼 수 있는 복도식이라서

꼭 영안실의 시체 또는 미라 같단 생각이 들었다.

더위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이 흰 홑이불만 덮고

담요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차에서 

샌드위치와 쥬스로 아침을 해결한 후

버스로 *카쥬라호로 이동하였는데,

어제 낮에 이어 오늘도 버스로 이동 중엔

톨게이트나 휴게소 등에서 화장실을 이용 할 수 가 없어서

우린 2시간마다 적당한 장소에서 [자연화장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물이 잘 나오지 않는 화장실보다,

기다림도 없고 훨씬 나은 듯 싶었다.


정말 더러운 것은 똥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인 비닐봉투였다.


비닐봉투가

썩지 않고 뒹굴거나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정말 정말 보기 싫었다.

버스에서 내려 비닐을 모아

당장에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도 했다.

아침에 주민들 모두가

밭이나 둑이나 집 뒤를 화장실로 쓰고 있음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카쥬라호에 도착 후 우린 호텔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한 다음

호텔 뷔페로 점심을 먹고,


우린 유네스코 문화제로 지정된

서군의 *자이나교 사원과 박물관을 보았는데

사원 전체가 오밀조밀한 조각 덩어리로 돼 있는 큰 사원을 둘러본 후

호텔로 돌아와 여유롭게 정원을 돌며 휴식 했다.


****3월 11일. [화]

우린 몸수색과 검열을 받은 후 동군의 *에로틱사원을 보았는데

사원은 

여러 개의 무리로 돼 있었으며

외벽과 내부가 온통 손톱만한 조각이 모여 큰 탑 모양의 조각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것 같았다.

우린 다시 버스로 *바라나시로 이동 중에

쟌다르가 해준 [김지찌게-참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맛 보았다.

현지 음식이 없었거니와 또 있다고 한들 먹기 거북했을 터였다.

주로 인도인들이 많이 먹는 것은 담백하게 화덕에 구워낸 넓적한 얇은 빵[난]에

카레가 섞인 소스를 찍어 먹는 것이었다.


그래도,

호텔식을 먹을 때에도

우리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었던 음식은,

담백한 빵과 계란으로 만든 오트밀이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먹지 않아 우린 어쩌다가 닭고기를 먹는 정도였는데

키다린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했다.


넓게 펼쳐진 밀밭, 보리밭, 겨자밭, 콩밭을 보며,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의 지류를 지나며 계속 달려

우리들은 저녁 8시에 바라나시에 도착하였다.


****3월12일. [수]

아침 일찍 일어나

갠지스강의 [해돋이]를 배를 타고 나가서 보고,

인도인 생애의 마지막을 제일 가고 싶어한다는 갠지스 강의 화장터[가트]를 보고,

인생 무상이 실감났다.

아침부터 여러 개의 시체들이 운구 되고 있었는데 매일 반복된다고 했다.

동시에 100구 정도를 화장 할 수 있는데,

하루 종일 계속 되고,

또 일년 내내 계속 된다고 한다.


갠지스강은 왠지 더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인지 생각보다 깨끗했다.

여기저기서 몸을 물에 담그고 목욕을 하며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물은 계속 돌아 흐르기 때문에 스스로 정화가 된다고 했다.


인도인이라면 꼭 와서 한번만이라도

몸을 담그고 목욕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인지

다른 외국인들도 몸을 담그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난 손을 담가 물을 만져 보기만 했다.


이곳까지 오지 못하는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의 지류[좁고 작은 강]에서도 화장을 하는 것을

지나오며 볼 수 있었다.


내가 본 인도인들은 순수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착함이 보였고,

피부는 까만 편으로 이목구비는 또렷 했으며, 맑은 영혼의 눈망울을 엿볼 수 있었다.

[몇몇의 부자는 아니겠지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엔,

소, 소마차, 말, 개, 말마차, 원숭이, 걷는 사람, 자전거,

오토바이, 자전거릭샤, 오토바이 릭샤, 장사군 수레, 택시,

경찰, 낙타, 코끼리들로 길은 엉켜 있으되 사고 없이 물 흐르듯 서로

밀려 움직임을 볼 수 있었으나,

귀마개를 하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생겼다.

아침은 뷔페로 간단히 하고,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으로 유명한*녹야원엘 갔는데,

그곳엔 정좌를 한 후 명상이나 수행할 수 있는 작은 원형의 단을 여러 개 볼 수 있었고,

스님들이 설법을 잔디에 앉아 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마음의 부자가 진정한 부자가 아닐런지?

욕심은 한이 없으니 말이다.


카메라를 가져 갈 수 없는 *사르나트 국립박물관을 보았는데,

네 마리의 사자상과 초전법륜불좌상이 특이했다.


점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을 먹고 난 후,

남들은 피곤하다고 쉴 때,

난 몇몇이 모여 근처 백화점엘 갔는데,

백화점 정문에서는 공항 통과하듯 검색대를 지나야 했고,

냉방이 잘 되고 있는,

매장에 들어서니 점포마다  출입문에 경비가 서고 있었으며,

나와 키다린 편안한 신을 산후 호텔로 돌아오려는데,

인도의 부유층만을 위한 백화점임이 분명하였다.

우리가 4시경에 나왔는데 그때 벌써 가게 문을 닫으려고 정리를 하고 있었고,

한켠에는 맥도널드 매장이 있었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1평 남짓한 매장이나 노점,

또는 로또 복권방모양의 가게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대로변의 1-2평 남진한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투어버스를 보면 언제나 웃으며 손 흔들어 주던 얼굴도 잊혀지질 안는다.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이 무표정하며, 말 붙이기가 어렵고,

한편 너무 영악하다고 함도 이해가 되었다.

너무나 문명의 이기에 물들어 있고,

생존경쟁으로 치달으며, 빨리 빨리 문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느낌이 든다.

무엇을 위해,

누굴 위해

그리도 달리는 것 일까?


브라질에 갔을 때,

[한국에선 방학을 해도 공부에 매달리고,

공부 못 해 자살도 한다면서요.] 하며 매우 놀랐단 얘길 들은 적 있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다.

자식을 위한 별거인 [기러기 아빠]도 아마도 한국에서나 통할 일이다.


가족은,

부부중심이며 사랑으로 엮어지며,

늘 가까이서 마주할 때 행복이란다.


글쎄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지기 때문이겠지.


인도인들이,

부에 욕심 없이 살 수 있음은

아마도 종교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우린 아침에 갔던 갠지스강에서의 야간 힌두의식[횟불 추도식]을 보기위해,

호텔 앞에서

자전거 릭샤[세발자전거 모양]를 탔는데, 베트남의 하노이보다 매연은 더욱 심했으며

움직이는 온갖 것이 뒤엉켜

발디딜 틈도 없이 복 잡한 거리를 릭샤는 잘도 간다.

운전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타고 있는 손님인 우리들은

부딪칠까 봐 소릴 지르며 위험을 알린다.


30인승 작은 배에 일행 모두가 타고,

갠지스강으로 나아가 [촛불 추도식]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 볼 수 있는 행사라고 했는데,

우리들과 같은 소형 배는 50여척정도가 관광객을 싣고 운집에 있었고,

의식은 계속되었다.


제단이 7개 있는 주 무대와 100M 정도  떨어져 제단이 5개 있는 부 무대가 있었는데,

제단은 강보다 높은 강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느 곳에서든 강에선 잘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영혼을 달래는 힌두교 음악이[불교 풍과 비슷한] 연주되는 동안,

우리들도 작은 꽃 접시에  촛불을 밝혀 소원을 담아 강물에 띄우고,

연주에 이어 횟불이 여러 개 모여

꽃처럼 보이는 불꽃을 들고 춤추는 듯한 의식이 음악과 함께

한참 동안 진행되었고,

주술사의 주문의식이 계속되고 ,

다시 춤으로 끝이 났는데.

가족은 제단과 조금 떨어진 위쪽 계단에 앉고,

그 위쪽으론 배를 타지 않은 관광객들이 천명 가까이 앉아서 관람을 했다.


인도인들의 소원인 갠지스강에서의 죽음인

이들은 진정 천국으로 간 것일까?


아마도 욕심 없는 삶이 천국으로 인도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행복지수가 우리 한국보다 훨씬 높고,

세계 제2위란 말도 이해가 됨직 했다.


하지만,

내 집,

나의 가정,

내 나라가 바로 천국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감사와 기쁨만 생각해야지.


다시 릭샤로 호텔로 돌아와,

집에선 좋아하지 않던 라면과 과일로 저녁을 해결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지금 이순간이 바로 천국이었다.


****3월 13일.[목]

우린 네팔로 가기위해,

간단히 빵과 오트밀로 아침을 먹고 일찍 버스에 올랐다.

조금 쌀쌀한 아침이라서,

거리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목에 걸치고 다니던 긴 수건 모양의 천을 목에 감거나 머리까지 감싸고[터번]

다니고 있었고,

영어 간판은 거의 볼 수가 없고,

위쪽 한 줄로 이어져서 써 있는 인도 글씨의 간판은

꼭 빨랫줄에 빨래가 널려 있는 듯 싶기도 하고, 원숭이가 매달려 있는 듯 했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종이는 희고, 검은 것은 글자다.]라고 했다더니

지금의 내가 그렇다.


글로 내 마음과 뜻을 기록할 수 있음도 큰 기쁨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혹 지나는 버스[곧 멈출 듯한 낡은 버스]엔 좌석이 꽉 차고, 입석도 차고,

지붕위엔 25명 정도가 앉아서 간다.

그런데 위에 앉은 사람도 요금은 똑 같다고 한다.

다음 버스를 기다릴 시간이 없는 사람이 말없이 타고 간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위로 오르는 계단이 버스 출입문 옆으로 밖에 붙어 있었다.


트럭은 정면과 운전석을 호화찬란하게 장식[꼭 무당집]을 했는데 ,

꿈자리가 뒤숭숭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차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가정집에도 호롱불로 밝히거나  아예 불 없는 집도 있었는데,

밤엔 달리지 않는 차에 운전사도 있었고 불도 켜져 있었다.


작은 차에도 많은 손님을 태우고 있었으며,

작은 오토바이에도  어떻게 실었는지 많은 짐을 묘기대행진 같이 싣고 달린다.


학생들은,

매우 대접을 받는 듯 싶었는데 바지와 와이셔츠에 타이 차림이었고,

스쿨버스도 있었다.

역시 나라의 기둥 대접이리라.


줄을 잡아당겨 세우는 톨게이트를 돌아

이삭이 나온 청보리 밭과 밀밭의 넓은 들을 지나고,

쇠똥말림을 무수히 많이 보며,

또 운 좋게 신축사원을 짓기 위해 가는 봉헌 행렬을 만나서 지켜보고,

우리들은 계속 네팔로 향 하던 중,

쟌다르가 준비한 찐 감자로 새참을 즐겼다.


계속되는 야외의 자연 화장실에도 이젠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어디에서 몰려드는지 투어버스가 서면,

항상 10명 안팎의 주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몰려 와 우릴 신기하단 눈망울로 지켜 보았다.

이러다가 좁은 화장실 공간이 영원히 싫어질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화장실에서 볼일 을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맞지 않는 이론인 듯 싶었다.

죽어서도 한 줌의 흙으로 빨리 돌아[화장의식] 가 듯,

문명이 만들어 내는 화학 섬유나 시멘트, 비닐 ,프라스틱 등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재앙이리라.


오후 1시가 넘어서며 우리들은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아름드리 무수나무[한국의 상수리나무 비슷]가 8-9그루 있는 농가 들판이면서,

길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돗자리를 폈다.


쟌다르[요리사]가 호텔에서 해온 보온밥과

즉석에서 가스번허로 끓인 북어국에

오이무침, 김, 양배추 쌈과 쌈장, 단무지 무침은 우리의 입맛을 살리기에 충분하였다.

어느새,

마을 꼬마 15-20명과 어른 주민들이 서너 명, 들소, 개들이

우리들 주위로 먼발치로부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우린 그들을 구경하고, 그들은 우릴 구경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 일행 중 여행 중에 생일이 두 명 있어서

준비한 케익을 축하노래와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반 정도가 남아 주위에 있는 어린이들을 주니,

빵 같지도 않고

맛도 이상하다면서 먹지 않고

나누어 준 사탕만 받았다.


아마도,

담백한 인도의 구워낸 빵맛에 길들여 있어서 인지

달콤하고 느끼한 크림 케익이 오히려 푸대접이었다.

어린이들은 한없이 말고 밝은 표정이었으며,

순수하고 순진했다.

정말 평화를 지키는 법이 있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린 너무 이해 타산적이고,

나만,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계속 달려,

오후 4시 40분에서야

네팔 국경에 도착하였다.


입국수속을 한 것 뿐인데,

네팔의 분위기는 인도와 많이 달랐다.

건물도 2-4층으로 돼있었고,  사람들도 우리와 좀 비슷한 몽골리안 이었으며,

피부도 훨씬 인도보다 흰 편이었다.

길가의 간판도 영어와 네팔글자가 함께 기록되고 있었고,

[뉴 코티지 로지. 레스토랑]이란 한글 간판도 반갑게 보았다.

느낌으론 인도보다 10배는 더 잘사는 듯 싶었다.

네팔에는 가로등도 있고, 차선도 있었으며,

가전제품도 LG를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산이 많고, 기후도 인도보다 선선하고,

언덕 비탈엔 밭농사가 계단식으로 많았으며,

공기가 맑고,

전원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왠지 사람들은

인도보다 순수해 보이지 않았으며,

욕심이 있는 듯 싶었다.


내가 살아야한다면 그래도 네팔이 조금 나은 것 같았다.

*룸비니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3월 14일.[금]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이 태어난 곳에서 룸비니에서

구룡 못, 마야사당, 아쇼카 석주 등을 보았는데,

먼저 다녀간 한국의 불교 팀들이

한글이 쓰여진 연등을 달아놓은 것을 보고 한편 반갑기도 하였다.

버스 내에서

아침을 간단히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계속 산의 풍광과 맑은 물이 풍족한 전원마을을 보며,

산길[히말라야산맥]을 말티고개의 S자로 달려

산장에서 미역국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에 호수모양의 아늑한 도시*포카라[네팔의2번째 대도시]에 도착했는데,

네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살고 있었다.

데이비스 폭포, 굽테라스와라 동굴과 티벹 시장을 구경한 후,

눈이 녹아내린,

아름다운 옥색의 폐와 호수에서 4명이 한조가 돼,

40분정도 노 젓는 유람선을 타고 긴 호수를 한 바퀴 돌고나니,

버스에서의 

지루함이 한결 달아나는 듯 싶었다.

모처럼,

호텔음식이 맛있어 저녁을 달게 먹고 곤한 잠을 잤다.


****3월 15일. [토]

아침 5시에 일어나,

조깅객들을 보며,

안니푸르나 봉우리와 그 주변의 봉우리들의 설경을 보기위해

1500M 높이에 있는 사랑코트로 향했다.

네팔에서는,

3000M내외의 산은 언덕이라 부르며,

7000M이상의 봉우리는 100여개 정도가 있으며,

8000M이상 되는 총 14개 봉우리 중에서 9개 봉우리가 네팔에 있다고 했다.


높은 봉우리들이 보여주는

해 돋기 전의 풍광과

해 돋을 때의 풍광,

그리고 해가 돋고 나서의 풍광은

우리들의 함성을 받기에 충분했다.

눈 앞의 장관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여행 떠나기 일주일 전에 TV로 본 [힐말라야 다큐]에서

해돋이로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던 눈 덮인 봉우리가 생각났는데,

우리 눈 앞의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보통 산악인들이

3000M에서 시작하는 등반은 날씨가 최적일 때

안나푸르나 정상까지 15박이 걸린다고 했다.

그 옆의 5000M급의 봉우리도 7박은 기본이라고 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카트만두로 가기 위해 국내선 비행장으로 갔다.

안내를 맡았던 한국어를 배우는 중인

인도인 안내자[아친트]와 네팔 요리사[쟌다르]와는

그동안 정이 들어 서운했으나 이별이었다.


짐 검사를 가방을 열어서 검열을 받은 후 30인승 소형비행기에 탑승하여,

우린 또 다시 환상적인

네팔의 아름다운 눈 덮인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는데,

비행기는 1100M로 비행했기 때문이었다.

안개 위로 솟은 눈 덮인 7000M-8000M 봉우리들을,

버스가 가로수를 지나치듯 비행기로 보는 즐거움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맑은 날씨는 우리를 기쁘게 했고,

우리들은 기내에서 창밖의 풍광을 디카에 담기에 바빴다. 


카트만두[나무집이라는 뜻]에 도착 후 네팔인[아르죤] 안내자를 만나

중국식의 느끼한 점심을 먹고,

우리들은 바라나시의 가트 비슷한 힌두교식의 화장터가 있고

윗 쪽엔 파쉬파낫트  사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 구경하였는데,

한번에 200명 정도 화장을 할 수 있는 시설[화장을 할 수 있는 대]이 있었고,

화장을 하지 않는 대에는 앉아 잡담하며 쉬는 사람들이 있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역시,

삶과 죽음은 한 울타리 안에 함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더워 짜증이 났지만,

언제 또 올 수 있으랴 싶어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토요일이라서 좀 복잡한 시내를 지나,

원숭이사원으로 불리는*스엠부나트 사원을 보았는데,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는 사원이었으며, 

종모양의 쇠에 새겨진 경전을 돌리며 기원하는 사원으로,

한 바퀴 경전을 돌리면서 기원하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다하여,

열심히 돌며 기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트만두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

시내엔 모든 건물이 3-5층으로 된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일급 왕궁호텔에서의 특별식을 먹고 곤한 하루를 마감했다.


****3월 16일. [일]

일찍 일어나,

다른 방향에서 8000M급의 히말라야 일출을 보기위해

우린, 

다시 말티고개 S자로 계속 산을 올라,

2100M에 있는 *나가르콧으로 향했다.

해뜨기 전과,

해 뜰 때,

해가 떴을 때의  또 다른 각도에서 보는

히말라야의 풍광을 볼 수 있음이 또 기쁨으로 다가 왔다.

몇 몇 분들은 체력이 안 된다면서

호텔에서 아침잠을 즐기기도 했으나,

나와 키다린 그 좋은 기횔 놓칠 리가 없었다.


아침식사 후,

불교사원인 *보오드넛트 사원을 구경했는데,

이곳은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곳이며,

자궁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그 내부의 훼손을 염려하여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국제공항으로 가서 델리로 향했다.

신도시로 형성된 뉴델리는 아름다운 정원이 길가를 장식하고 있었고,

차선과 차선 사이도 분리 화단이 있었으며,

집도 2-3층의 단독주택으로 넓은 정원을 갖고 있어 풍요와 호화로움이 보여,

인도 아닌 다른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할 만 했다.


그렇지만, 빈부의 차는 극복하기 어려움인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볼 수 있었던

어린이의 재주넘기 구걸과  가족이 모여 하는 구걸 행위는 계속 볼 수 있었다.

델리에서 다시 인도 안내인[VINAY]을 만나 아그라까지 갔다.


****3월 17일. [월]

우린 다시,[라마스데]라는 인사말과 함께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라마스데-오른손은 나를 왼손은 너를 뜻하는데,

합장을 하면서하는 인사법으로 사랑합니다란 뜻이라고 했다.


인도엔 854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8개의 공식 언어가 사용되며,

16개 언어의 신문이 발행된다고 했다.

인도는,

7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라지만,

빨리 언어부터 통일해야 발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제 사랑의 금자탑인***타지마할을 보았다.


입구에선 공항 검색하 듯 검색을 한 후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 국보1호인 [남대문]의 허술했던 보안이 생각나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책이나 TV 화면으로,

인도하면 보았던 대표적인 건축물이지만,

정말 아름다움은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었다.

세계의 건축가들이 제일 보고 싶어하는 건축물이라고 들었는데,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는 평면이 아닌 4차원의 입체감과

조각과 보석장식의 아름다움은 말과 글로 표현 할 수 가 없는 것 같다.


세계7대 불가시의 중 하나이며,

궁전이 아닌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사자한의 부인인 뭄 타지마할의 무덤인데,

년인원 2만여명이 22년간의 공사 끝에 1653년에 완공되었단 얘길 듣고 ,


키다리님의 말씀,

[죽어서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지어주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무덤보다

살아생전에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함께 와서

볼 수 있음이 더 큰 행복이 아닐까?] 라고 했다.


글쎄, 

나도 다음 생을 믿지 않는 편이며,

부모나 형제도 그리고 자식도 살아 있을 때,

기쁜 맘으로 서로 사랑하면 되는 것 같고,

부부간에도,

살아있는 동안

여한 없이 남김없이 서로 사랑한다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지우개가 없다고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단 한번 주어지는 생을,

정말 후회 없이,

아름답게 ,

또 만족하며 살도록 더욱 힘써 봐야지.


타지마할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아그라성을 보았는데 돌로 이루어진 넓은 궁전은 정말 대단했다.


점심을 먹고,

타일 세공공장과 매장을 방문했는데

정말 사람이 이리도 아름다운 세공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솜씨로 타지마할도 완성된 듯 싶었다.


성금으로 100년 전부터 건축중인 *더얄박 힌두사원[흰 대리석 사원]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빨리 문화의 장점도 있지만,

기다림의 미덕도 배워야 하지 않을 가를 생각케 했다.

아크바르 왕의 걸작품인 *시크리성[붉은 성]을 보고

우린 또 한번 웅장함과 조각에 놀라고,

자이푸르로 이동을 했다.


호텔에선 

생화 목걸이와 쥬스 한잔을 건네며 우릴 환영했으나,

우린 바쁜 일정과 인도 도착 다음날부터

일행이 돌려가면서 닐레이로 배알이를 하는 바람에

대부분 녹초가 돼있었다.

여행도 젊어서 해야,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낄 수 있단 얘긴 참말이었다.


다행이 난,

각별한 음식조심과 물조심 그리고 비타민 준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물 샤워와 발 문지르기

그리고 편안한 신과 안대와 귀마개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3월 18일. [화]

16세기에 건설한 *암베르성에 가기위해,

우린 코끼리를 타고 올라갔는데,

돌로 만든 성의 크기에 또 놀라고,

거울로 조각된 아름다운 건축에 우린 넋을 잃고 말았다.

예전의 천문대[해시계와 별자리 등]를 관람하고,

하렘의 여성들의 아픔이 서린 곳 *하와마할을 보고난 후,

핑크시티[남대문 시장 비슷한 곳]에서 사고 싶었던

인도 풍의 가죽신과 마후라를 몇 개 산 후,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2시간 정도 자고 난 후,

흰대리석으로 지은 ,

빌라힌두교 사원에서 학생과 많은 사람들이 넓은 공간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우린 마지막 호텔에서의 밤을 맞게 되었다.


길게 느껴졌던 여행이었으나,

내일은 기내에서 자기 때문에

오늘,

수영풀이 있는 호텔 뜰에서 간단히 맥주한잔 하며,

그간의 얘기를 나누며 서운함을 달랬으나,

모두들 맘은 집으로 달음질 치고 있는 듯 싶었다.


****3월 19일.[수]

다시 우린 델리로 향했다.

인도인들이 두 눈썹 사이에 하는 점이나,

붉은 빛의 물감을 바르는 것은 시바신과 같은 [제3의 눈]을 상징한다고 했다.


더 넓게,

더 바르게,

더 멀리,

바라보며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인도인들은 싸움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특히,

가족간이나 부부간 친구간의 서운함은 말로 풀어낸다고 했다.


내가 남을 모두 이해하기란 있을 수 없을 게다.

하지만 대화로 풀지 못할 일 또한 없다고 생각된다.


나도 [제3의 눈]을 갖도록 노력해 봐야지.


델리 도착 후 [쟌다르]가 생각났지만,

인도 전통 요리인[카레치즈 빵 요리]를 먹고,


노예왕조가 힌두제국을 제압하고 만든,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뤄진 높이 75M인 쿠툽탑을 본 다음,

연꽃을 주제로 만든 흰연꽃사원에 들어가

명상할 때 사원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으며,

소리 없이 안내자에 따라 들어가고 나아가야 했다.


여러 개의 신을 모시고 기원하는 빌라 힌두교 사원을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입구부터 신을 벗고 들어가야만 했고,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


신에 대한 믿음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야만 가능한 것이리라.


누군가는 종교를 갖고 큰 믿음을 갖게 됨은

[신의 부름=선택]이라고도 했다.


신의 부름을 받아서 일까?


내 생각엔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 좀 더 행복한 것 같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세계1차대전에서 전사한 9만 명의 인도병사를 위한

위령비인 높이 42M나 되는 *인도문을 보았다.

인도문을 통해 푸른 잔디  멀리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건물

그리고 가운데 대통령궁을 바라본 후,

저녁을 중국식으로 느끼하게 먹고,

철학의 나라, 명상의 나라, 신들의 나라, 웰빙의 나라라고 칭송 받는

인도의 델리 국제 공항으로 옮겼다.


****3월 20일.[목]

홍콩을 경유한 후 약 10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우릴

세계 제1의 시설을  갖고 있고,

비행출발 시간을 잘 지킨다는 인천 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별 탈 없이

건강히 잘 먹고,

잠 잘 자며,

좀 덥긴 했으나 날씨도 한 몫을 해줌에 감사하며

즐겁고 뜻 깊은

여행할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하고 싶다.


또 내일을 위해 힘을 내야지.


모두들 기쁨이 늘 함께 하길 기원하렵니다.


“라마스데”

  인도4.jpg

 

인도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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