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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 목록에 '은퇴 후 어떻게 살지 미리 생각해놓기'를 올렸다.

무얼 하면서 나머지 30여년을 살아갈 것인가.

젊은 시절 로망처럼 꿈꾸던 전업 작가에 도전해볼까. 자그마한 출판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의 나래를 펼쳐보지만 결국엔 '내가 될까…' 하는 좌절감에 부닥치곤 한다.

나이 든 내게 경쟁력이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 일을 벌였다 망신당하면 어쩌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새해 벽두 일본 아사히신문에 한 장의 사진이 실렸다.

꽃무늬 수영복 차림 할머니가 수영장 한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깊게 파인 주름살에 세월의 흔적이 찬란하지만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매다.

사진엔 '세계기록을 11개 보유한 99세'란 제목이 붙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가오카 미에코(長岡三重子), 곧 100세 생일을 맞는 시니어 수영 선수였다.

그녀는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인 마스터스 수영선수권의 세계 챔피언이다.

 2년마다 열리는 세계 대회에서 지금까지 메달을 60개 따냈다.

 그녀가 활약하는 95~99세 체급에서 세운 세계신기록만 11개에 달한다.

주(主)종목인 배영(背泳)은 적수가 없는 최강이고, 자유형·평영에서도 대회만 나가면 메달을 따낸다.

신문은 그녀가 53세 때 남편과 사별한 뒤 야마구치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전했다.

내 눈길이 확 꽂힌 것은 그녀가 수영을 시작한 나이였다.

나가오카 할머니는 원래 수영 선수 출신이 아니다. 70대까지는 수영장 근처에도 안 가보았다고 한다. 무릎 통증에 좋다는 아들 권유로 난생처음 동네 수영장을 찾은 것이 80세 때였다.

 처음엔 그냥 물속을 걷기만 했다. 25m를 헤엄칠 수 있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실력이 늘자 욕심이 생겼다. 87세부터 미국·이탈리아·뉴질랜드 등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90세에 처음으로 은메달을 땄고, 95세 땐 배영 200m 종목에서 첫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후 95~99세 체급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신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3~4회 수영장을 찾아 1㎞씩 연습을 한다.

 새해엔 100~104세 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다.

치열하도록 아름다운 99세의 '청년 정신'이었다.

나가오카 할머니의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100세 시대, 30~40년의 삶을 덤으로 갖게 됐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다수는 아니다.

 많은 노년이 가난과 질병, 무관심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말년을 맞는다.

 그래서 국가 책임론이 화두(話頭)로 등장했다.

국민의 은퇴 후 삶에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동시에 노년층 스스로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노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 일가(一家)를 이루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작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賞)을 받은 작가는 75세 할머니였다.

그녀는 교사·사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 정상에 올랐다.

 99세에 처음으로 출간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여류 시인(고·故 시바타 도요)도 있었다.

국내에서도 70대가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사례가 나왔다.

미켈란젤로가 그 유명한 성베드로 성당 천장화를 완성한 것은 70세 때였다.

디포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이성비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76세에 처음 붓을 들어 101세로 눈감을 때까지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렸던 모지스 할머니(1860~1961) 케이스도 유명하다.

 

(중략)



우리가 누구나 80세에 시작해 챔피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마음먹기 따라선 노년을 새로운 인생으로 맞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주책' 소리 들을까 봐 겁내지 않는 청년 정신일 것이다.

은퇴 후 30년은 또 다른 청년기(期)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