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이다`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에 저런 문구가 있었다.

하긴 불행하려고 여행을 떠날까 `궁극적인 목적지` 같은 센 표현이 걸리긴 하지만 맞는 말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일정이 제법 그럴듯했다.

이스탄불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부터 배로 갈아타고 미코노스,아테네, 몰타,시실리,로마까지.

로마에서 다시 비행기로 프라하를 경유해 인천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매일 짐 싸서 떠나는 여행이 우리 나이에는 이제 체력에 부치는 게 사실이다.

배에 짐을 풀고 기항지에서 몸만 홀가분하게 호도도 내려 어슬렁거리기만 하면되니 편하긴 편했다.

 

10여년만에 다시 찾은 이스탄불은 당연히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성소피아 성당,블루 모스크,그랜드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에서 깔깔거리며 스카프를 사들이는 우리들을 보며

가이드 언니가 스카프族이라 불렀었지

기억을 되살려 바자르 중앙路에서 샛길로 우회전해 스카프가 많은 집을 찾아냈다.

이미 추억에 잠겨있는 상태에서 백프로 캐시미어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으니  아니 살 수 없었다.

세계에 이곳저곳을 다녀본 후 늘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늘 꼽히던 이스탄불이었다.

그런데 전보다 감흥이 훨씬 덜하다.

나이 탓,밤에 이스탄불을 못본 탓,같이 간 일행 탓.

세가지 탓 중에 나이에서 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듯하다.


이십대에 수원 연구소에 있던 오빠를 친구와 함께 찾아 간 적이 있었다.

종일 오빠에게 대접을 잘 받고 헤어지는 시간이 됐다.버스에 올라 오빠를  보니  왈칵 눈물이 솟았다.

수원에서 인천이 천리길이라도 되는 양, 내가 뭐 오빠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훌쩍 키만 크고 마른 오빠를 보며 불빛이 흔들리도록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그것은 젊음의 싱싱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육십이 넘으니 눈물샘도 마르는가. 이역만리에 딸과 손자를 떠나 보내면서도...

그때 같았으면 대성통곡하고 사흘은 울어야 했을텐데...

그런면에서 늙은 건 축복이지 싶다.담담이라는 묘약을 세월따라 체득했으니.

 

배에 올랐다.

아파트 한 채보다 더 큰 배다.

여행지에서 혼자 방을 쓴 경험이 없었다.새로운 경험이다.

베란다가 있는 방은 깨끗하고 혼자 쓰기에 호사스러울 정도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저녁식사 자리에서 비로소 일행들을 제대로 만났다.

우리 가족 다섯명을 빼면 네쌍의 부부가 우리 일행이다.

 예쁜 부인과 함께온 수재형의 신사,남도에서 온 의사부부,부인이 영문과 교수인 부부,

여교수의 언니 부부 그들은 50대 중반에서 육십대 초에 나이였다.


저녁식사는 꼭 만찬처럼 치뤄졌다. 이름하여 양식 풀 코스. 좌빵 우물, 포크와 나이프가 어쩌고 저쩌고

여러 격식이 있는 먹는 예절, 거기에 맞는 사람들의 옷차림.

무쟈게 예쁜 부인을 보는 즐거움이 컸다.만찬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제대로 했다는 얘기다.

블랙과 화이트를 적절히 그리고 악세사리까지.

감각있는 옷차림을 보는 즐거움으로 밥맛까지 좋아졌다면 내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ㅎㅎ


남도에서 온 의사분은 밝음의 아이콘. 그는 우울이라는 단어를 모르는가 아예 제거했는가?

어쨋든 주위를 밝게 만드는 힘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새록새록 보태준다.

그의 부인은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네자녀를 훌륭히 키웠으며 시댁식구와 화기애애하게 잘 지내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지방의 명문 여고를 나오고 S대를 나왔다 하는데 그녀의 설명으로 들은 그 집안 사람들의 학벌이 일제히  어마번쩍했다.나도 그녀만큼 학벌이 좋다면 쫘르륵 얘기했을까는 의문이지만 여행지에 젖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얘기가 속물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fact일 테니까 또는 그런 상황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일테니까.

남의 행복을 구경하는 게 불행을 보는 것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가 말이다.

`행복은 생각보다 훨씬 오묘해서`......

 

*`사람 너는 누구냐`

 

미코노스 섬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끼가 묵었다 해서 관심이 간 섬이었는데,

재클린과 오나시스가 밀월여행을 했다해서 유명해진 섬이라한다.

불가사의한 여자 재클린.그래서 샘솟는  매력이 있는 것 같던 여자.

그런데 그녀의 일생은  내 머리 용량으로는 해독불가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선천성 징그러움 회피증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물질적인 호사가 좋다지만  지성을 갖췄다는 그녀를 의심해보게되는 부분이다.

알수록 몰라지는 게 사람이란 생각을 하며 소박한 섬 미코노스를 둘러봤다.


모든 집들이 흰색이다.프라하나 두브로니크의 집들이 붉은 지붕 가진 것과 대조적이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푸짐한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마신 한 잔의 맥주 맛, 여행의 참 맛을 보탠다.

 

*`여행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드디어 아테네 도착 파르테논 신전을 보는 날이다

그리스 여신 같이 차려 입을까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어떻게 차려도 결국은 여신의 짝퉁일 뿐, 그래서 아주 눈에 안띄는 희끄무레 파란빛이 들어간  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물론 배가리개용으로 하늘거리는 스카프는 길게 둘렀다.


세계문화 유산 일번지라는 파르테논 신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귀퉁이 벽에서 셀카를 찍으려 하니 웬 서양청년이 찍어주겠단다.서양 사람들의 자연스런 친절한 메너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저렇게 큰 기둥을 세우려고 얼마나 많은  노예들을 동원했을까.그 덕에 수천년 후에 후손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을 미리 계산해서 했을 리는 없다.다시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깊게 감사드렸다.우린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몇십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언감생심 이런 여행을 꿈이라도 꿔봤을까.


신전 내려오는 길에 세계적인 음악가만이 공연할 수 있다는 야외 음악당을 보았다..언젠가 그곳에서 음악을 들을 날이 있을까 그런 꿈이 생기니 살아있는 자의 기쁨이 느껴진다.


 *`아는 것과 느끼는 이 두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고 그중 정말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다`


 하루종일 바다에서 선상생활을 하는 날이다.

서양인들은 낮에는 수영과 선텐을 즐기고 밤엔 댄스를 하는 즐거움이 있어 하루가  바쁘지만

나는 그냥 빈둥빈둥  쉬면서 선내 도서관을 기웃거렸다

모두 알파벳으로 돼 있는 책은 다만 불립문자(不立文字)일뿐,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부러워진다.

할일 없어 방에 들어앉아 책을 읽는다.`꾸베씨의 행복여행`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쓴 소설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에 크게 공감한다.

늙어가면서 줄어들기만 하는 느낌들,그래서 파생된 서걱거리는 메마른 감정이  마음에 나는 쥐를 잡아주는 특효약일까 아니면 쥐약일까?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거울 같은 지중해를 보며 늙은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


 몰타 라 발레타항에 도착 기항지 관광을 하는 날 예쁘고 몸매도 날씬한 현지 가이드가 나왔다. 

어학 연수를 왔다가 현지인을 만나 아들 낳고 딸 낳고 행복하게 산다고 본인 소개를 한다.

우리네 규격화된 삶에 비하면 그녀의 삶은 얼마나 파격인가.

우리가 삶의 규격 안에서 살려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소심함 때문일 것이다.

기존틀 밖으로 나가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그녀가 참 용기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보내고 나서 헤어지는 시간,그녀는 울컥 목이 메어서, 금년에 처음으로 한국 관광객을 맞았는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고 자기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흐느낀다.

 나도 속으로 읊조린다 그래요 행복하게 살면 됐어요. 삶의 공식은 정말 다양하군요


* `Rome was not built in a day`


시칠리아아 가타니아 항에 기항에 에트나 화산을 보는 일정이  이번 여행의 큰 결점으로 남아 있다.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로마 유적도 많이 있건만 어째서 시커먼 화산재만 구경시켰는지 정말 모르겠다.

언제 또 그 먼 곳을 갈 수 있다고 원망들을 일을 벌인 것인지 크게 실망했다.

국내 굴지의 H사, 그들의 얄팍한 상혼을 발견한 일은 민망하기만 했다.


이러구러  배는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입항 버스로 갈아타고 로마로 향한다.

로마도 두번 째다.트레비 분수,콜로세움,스페인광장 나보나 광장 등을 눈도장 찍고 바티칸으로 향했다.

실은 로마에 또 오고 싶었던 건 미켈란 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십여년 전 너무 많은 인파에 밀려 넋이 나가  성당안에 있는 피에타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무더운 날씨 (33도) 떄문에 혹은 나의 예술적 심미안 부족으로 글로 표현된 피에타의 감동을 실제로 느끼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미켈란 젤로의 어머니가 그가 네살 때 세상을 떠났음으로 작가의 머릿속의 어머니는 영원히 젊기 때문에 피에타의 성모마리아 얼굴이 젊은 거라는 설명만이 새로웠다.


너무 더운 날씨에 넘쳐나는 볼거리는 마치 식사 끝에 다시 상다리 휘어지게 받은 12첩 반상만큼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갑자기 고즈넉한 화엄사 경내가 떠올랐다.이곳보다 볼거리 훨  부족해도 여백의 미가 충만한 그곳이 그리웠다.

로마는 젊어서 봐야 하는 곳이다.매사에 소화능력이 부족한 논네가 하루 관광할 곳은 절대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로마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반 날아 체코 프라하에 도착.

도착 멘트 대신 먼저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이 흐른다. 멋진 나라다.

선선한 공기가 우선 반가웠다.공항 근처 호텔엔 일본인 관광객 일색이다.


7시간 일정의 프라하 관광, 프라하 성과 카를 교 등을 보여준다.

프라하성 광장에선 여전히 클래식 연주자들이 연주했다.

연주에 감동받아 달랑 5유로 남은 돈을 바구니에 넣었다.

또 걸어보는 카를 교 언제 또 와볼 수 있을까~~~?유한한 인생!

몰다우 강이 내려다 보이는 우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적어도 여행을 하는 동안은 벌레로 변신한 거 같은 불유쾌한 감정이 낄 새 없으니

카프카님 당신은  여행을 독려하는데 일조를 한 건가요?

`프라하의 봄`을 연출한 바츨라프 광장에서 자유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을까 살짝 생각해보기도 했다.

20대에 본 새벽의 7인`이란 영화에서 이미 체코인들의 불굴의 정신을 보았었다.


어느날 문득 자기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져 의기소침해지면 무조건 여행을 떠날 일이다.

낯선 곳을 무작정 걸으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