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 타운과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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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김병종 서울 미대 교수의 책을 접하다보면

그 분의 글에 조금씩 비쳐지던 인천 차이나타운의 모습은

수런수런 비밀한 냄새에 섞인 전족을 한 여인네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추억 속

소아마비를 앓던, 땋은 머리의 중국 소녀와

청관의 모습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그 언덕에서 사생대회를 하고

가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그래서 막연히 내 안에 자리 잡았던 그곳에

한국에 가면 꼭 찾아봐야 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인천에서 여학교를 다니며, 5년여를 살았건만

중국인 거리를 가보지 않았기에

그곳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내겐 없다.

 

떠나갔던 많은 화교들이 다시 속속 모여들어

새로운 중국인 거리를 만들었다는 그곳.

 

김병종 교수의 글에서 알게 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라는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여고 시절,

늘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두고 책을 읽던 친구-그 친구는

여전히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는데

그녀가 안내한 교보문고에서

몇 권의 다른 책 가운데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도 샀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건만,

그 분의 글을 처음 읽는다는 것이 나도 이상하다.

그 분의 작품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책을 자주 읽던 내가

어찌해서 그 분의 책을 놓쳤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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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한국 전쟁 후의 1950년대 중반
모두가 살기 어려운 그 시절
인천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중국인 거리는
좁은 골목에 길을 사이에 두고
일본식 집, 중국집이 즐비 했다.
 
그곳에서 <>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다소 되바라지긴 했으나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다.
 
일곱 번째 임신을 한 엄마 이야기로부터 할머니
친구 치옥이와, 치옥이 집에 세든 양갈보 등, 이웃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실제로 오정희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에서 5학년까지
석유회사의 인천 출장소 소장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거리에 살면서 인천의 신흥초등학교에 다녔다.
 
이 책의 표지에 씌어져 있는 문장을 소개 해 보면,
 
해안 촌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려지는 우리 동네는
겨우네 북풍이 실어 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짚수세미에 아궁이에서 긁어낸 고운 재를 묻혀
번쩍 광이 날만큼 대야를 닦았다.
아버지의 와이셔츠만을 따로 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람을 들이지 않은 차양 안쪽 깊숙이 넌 와이셔츠는
몇 번이고 다시 헹구어 푸새를 새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가의 유년이 고스란히 묻어난, 작가의 성장 소설로
어려운 한 시대의 삶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김병종 교수의 글을 먼저 읽은 탓에
청관 주변과 중국인의 삶을 좀 더 많은 분량으로 기대했는데
그 부분은, 나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흡인력 있는 낱말들과 문장력은
그 분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어린 소녀인 <>를 통해 보여 지는 팍팍한 삶은 눈물겹다.
회충약을 먹는 날은 아침밥을 굶어서
뱃속의 회충이 요동을 해서 더 어지럽다.
햇빛이 노랗게 끓는 거리.
 
 
친구 치옥의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하다 다리가 잘린 후
부모는 시골로 떠나고
치옥이가 미장원에서 보조로 일하는 광경을 유리 너머로 보면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끔 창을 통해 보여 지던 그림자 같은 중국인 <>에게
선물을 받는다.
 
마지막 장면,
엄마가 여덟 번 째 해산을 하며 질러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2층 벽장에 숨어서 낮잠에 빠진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 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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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느 토요일.

실제로 차이나타운에 친구와 가기로 하고

우리는 지하철로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인천역에서 내렸으면, 바로 그 앞이 차이나타운인데

그걸 모르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나도 모르게 중국 촌!’했더니

운전기사는 중국 촌이 어디예요?’하며 반문한다.

순간 차이나타운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인데

나중에 친구가 그랬다.

그 아저씨는 전혀 영어를 모르는가 보다.

번역까지 해 줬는데, 우째 몬 알아 듣는지.....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 된 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라는데

붉은 색 간판과 한자가 무성하고, 홍등, 팔기 위해 내 놓은 상품,

세워진 조각 등,

다른 곳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서

조금 신기하고, 들끓는 관광객들로 해서 다소 들뜨긴 했지만,

어딘지 어지럽고 어설프고 유치했다.

그것은 붉은 색깔 때문이 아닐까.

중국 사람들은 왜 지나치게 붉은 색을 좋아하는 걸까.

하긴 나는 예전의 차이나타운을 가 본 적이 없고,

중국 대륙에도 가 본적이 없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새 것이고, 붉은 칠을 한 새 간판이고

살림 사는 집이 들어있는 동네가 아니라

완전히 상업지구여서

눈만 홀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난 짜장면 식당은

들어가려면 2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연경이란 곳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점심을 먹고

그 거리로 해서 위 계단으로 올라가니,

자유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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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은 서구식 공원으로는 한국 최초라고 한다.

1888년에 만국 공원불렸다.

 

그곳의 상징인 맥아더동상은 옛 모습 그대로

그곳에 서 계셔서,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급속히 변해가는 가운데, 변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타이를 멘 여름 하얀 교복을 입고

방과 후 친구들과 책가방 들고 가 사진도 찍었고

세시의 다이얼에 전화가 연결 됐어.’하며

까르르 웃던, 약간 허스키의 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그 아인 진즉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 아래로는 명문 J고교가 보였다.

J고교와 담을 사이에 두고, 우리학교가 있다.

원형의 건물은 사라졌지만.

 

멀리 은빛으로 반짝이는 해안과

정박해있는 배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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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Piano Sur La Mer ( Andre Gagn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