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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의 순천만



 

* 그것 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 전후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무진기행’도입부입니다.

1964년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김승옥은 이 문제작을 <사상계>에 발표합니다.

이 소설은 6.25 이후 한국 문단에 횡행했던 소설 구도의

 경직성과 상투적 계몽주의 경향을 조롱하듯 벗어 던집니다.




서울과 시골, 현실과 과거, 세속과 허무 등 이항대립적 요소를

팽팽하게 얽고 갈등과 대립 지점을 입체적으로 교직합니다.

추억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자가 결국은

현실로 다시 도피하는 60년대 도회지 인생의 실존을 생생히 그려냅니다.




늘 서정적 배경으로만 머물렀던 안개 바람 햇빛...

이 자연현상들을 실존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감수성의 촉수로 확장시킵니다.

남녘 소도시의 한 자락 霧津邑을 감싸던 안개는

한 귀향자의 허무와 버무려져 놀라운 기교적 문체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당대 평론가들은 60년대 김승옥의 작품들을 일컬어


‘단편 미학의 전범’‘감수성의 혁명’이라고 상찬합니다.





[무진기행 줄거리]



서른셋 '나’윤희중은 큰 제약회사의 전무가 될 예정이다.

아내는 나와 재혼했고 제약회사는 장인의 입김 아래에 있다.

젊은 과부에게 장가가서 팔자 고친 경우이다.

아내의 권유로 휴가차 고향 무진으로 향한다.

6.25를 겪어내며 나의 어두웠던 청년시절이 묻혀있는 무진.

그 곳은 언제나 나른하고 축축하다.



고향후배들을 만나고 출세에 성공한 세무서장 친구를 대면하게 된다.

한편 자신의 모교 무진중학교에 근무하는 음악교사 하인숙과도 조우한다. 

노래를 잘하는 하인숙은 나에게 무작정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 걸요.

하여튼 서울로 가고 싶어요. 절 데려가 주시겠어요? >
 
나는 그녀와 방죽 길을 걸으며

그녀가 나의 생애 속으로 끼어드는 것을 직감한다.



<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

소금기가 섞인 밤바람 같은 사랑은

서울서 급하게 내달려온 ( 아내가 보낸 ) 전보 한통에 의해 중단된다.

고향이 주는 허무와 센티멘털리즘에 젖어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무진은 또다시 저 먼 곳의 추억공간으로서만 남게 된다.
 
하인숙에게 전하려는 미래기약의 편지를 결국 찢어버리고
 
상경 버스에 올라탄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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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 무진기행의 공간 배경은 순천만 대대포구입니다.

김승옥은 순천중학교와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가 소설 속에서 드러낸 무진이란 공간의 몽환적 묘사는

1950~1960년대 안개 짙은 순천만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50여년이 지난 순천만은 갈대숲과 철새도래지로 유명합니다.

세계 5대 연안습지. 한국 최대의 갈대 군락지.

해안선 40킬로미터 갯벌 면적은 670만평.

갯벌과 갈대밭을 배경으로

해돋이와 해넘이의 장관은 차라리 숙연케합니다.


 




늦가을 순천만,

금가루를 뿌린 듯 황금빛 사금파리들이

갈대꽃 끝자락에서 일렁거립니다.

진홍빛 칠면초 군락과 진귀한 철새들의 군무는
 
전국의 많은 사진작가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봄 갈대의 파릇한 싹.

짙은 녹음의 여름

갈대숲 사이로 뭇 생명들의 열기가 가득합니다.

겨울엔 흑두루미 청둥오리 왜가리가 유유상종하면서

'생태계의 보고' 갯벌을 부리로 쪼아댑니다.

흔들리는 갈대 따라 부유하는 마음을 맡기고 싶은 탐방객들은
 
다리 하나를 건너 갈대숲으로 빠져듭니다.

바로  무진橋입니다.


 



마음이 높은 깃대에 매달려 표표히 휘날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갈대처럼 해풍에 나부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때 살며시 남녘으로 잠입해

순천만의 갈대숲에 잠기십시오.



                                                                                           <동아일보 ,김용길 기자>